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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우리 곁의 재활병원<2> 낯선 땅 오지의 병원에서 프레시안 [2006-07-05]

[우리 곁의 재활병원] 무수한 은혜와 위로 속에 기적 일어나다

2006-07-05 오전 9:17:10

칼라일은 북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지방에 위치한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였다. 고대 스코틀랜드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영국 동해안과 서해안을 가로질러 설치된 거대한 장벽이 칼라일 시의 북부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칼라일 병원은 인구에 비해 비교적 규모가 큰 300병상을 가지고 있었다.

병원 하면 비좁은 병실과 환자, 방문객이 뒤엉킨 로비가 연상되던 나에게 영국과 독일 병원의 한가로움은 낯선 풍경이었다. 칼라일은 우리로 말하면 강원도 영월이나 정선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병원 본관은 200년 전 대영제국의 영화를 상징하듯 코린트식 거대한 열주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고 있었다. 특히 병원을 둘러싼 정원은 꽃과 나무가 어우러져서 감탄이 절로 났다. 하지만 병동 내부는 마치 2차대전 때의 야전병원처럼 낡고 을씨년스러웠다.

나와 딸애는 병원에 붙은 가족호텔에 기거했다. 다른 지역에서 온 가족들이 머물 수 있는 가족호텔은 무엇보다 깨끗하고 싼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우리처럼 불의의 사고를 당한 환자 가족들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시설이었다. 우리의 특급호텔에 버금가는 곳이었지만 펜션과 같이 스스로 음식을 해 먹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 영국병원 정원. ⓒ프레시안


▲ 영국 칼라일병원 본관. ⓒ프레시안

연민이었을까? 직업의식이었을까?

아내가 입원한 중환자실은 6인실과 1인실로 구성돼 있었다. 아내는 중환자실에서도 가장 위중한 환자였다. 아내를 전담하는 의료진으로는 30대 후반의 주치의와 6명의 간호사가 배치됐다. 2명의 간호사가 8시간씩 3교대로 교체됐다. 환자를 보살피는 것은 환자 가족이나 간병인이 아니라 의료진의 몫이었다. 영국으로 여행 왔다 혼수상태에 빠진 외국인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봉사와 희생의 직업의식 때문이었는지 의료진의 간호는 극진하다 못해 눈물이 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간호사들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시트를 갈고 체온과 혈압을 재고 아내의 상태를 30분 단위로 끊임없이 확인하고 기록했다. 혼수 상태의 아내에게 주사를 놓을 때도 일일이 어떤 주사이고 왜 주사를 놓는지를 아내에게 설명했다. “미스에스 황! 이 주사는 조금 아플 거예요.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의 출혈을 멈추기 위한 것이고 하루빨리 깨어나길 빌어요”라고
말이다. 조금이라도 환자나 환자가족이 부르면 간호사들은 달려왔다. 그들로부터 “절대 안돼요”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늘 서로 상의한 뒤 “미안해요. 그 대신 이게 좋을 것 같아요” 하고 차선책을 제시했다. 많으면 귀하지 않다. 우리 사회도 병상이 일정 부분 비어 있고 환자로 넘쳐나지 않는다면 우리 간호진도 영국과 같이 친절할 수 있을까. 환자의 부름에 늘 응답할 수 있을까.

아내의 주치의는 ‘화이트'(White) 성을 가진 40대 초반의 남자였다. 외국 의사가 주는 선입견과 영국인 특유의 신중함 때문에 처음에는 그가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 그는 아내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중환자실에 올 때마다 아내를 둘러본 뒤 중환자실 옆 응접실에서 초조히 서성이고 있는 나를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고마움과 황송스러움이 겹쳐졌다. 화이트는 오전 오후 한차례씩 보통 1시간 넘게 아내의 상태를 상세히 설명했다. 나중에는 귀찮을 정도였다.

▲ 영국병원에서 민주그림. ⓒ프레시안

▲ 영국병원내 가족호텔. ⓒ프레시안

비록 국적을 달리하지만 나와 그는 같은 백(White) 씨였다. 나중에는 농담할 정도가 됐지만 생존의 기로에 선 보호자로서 의사를 대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는 경상도 사투리보다 심한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사용해 그래프까지 곁들여 친절하게 설명했다. 아내의 뇌기능이 30% 이상 손상됐으며 사고의 충격으로 패혈증 등 여러 합병증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나에게 궁금한 것은 ‘아내가 얼마나 위독하며 과연 살아날 수 있는가’였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할 때면 그는 손사래를 쳤다. ‘당신 아내의 정확한 상태를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하루는 그의 장황한 설명에 내가 “환자가 많아 바쁠 텐데 이제 가봐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화이트는 정색을 하더니 “당신 부인만큼 이 병원에서 위독한 환자가 없다. 당신 부인이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환자이고 당신은 부인의 상태를 정확히 알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내가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감동이 일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사고 며칠 후 중환자실로 한국 유학생이 불쑥 찾아왔다. 칼라일에서 300킬로미터 떨어진 뉴캐슬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고 있는 전태일 씨였다. 그는 우연히 영국 경찰로부터 글래스고 근처에서 한국인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전태일 씨는 나와 민주를 위해 1주일에 한 번씩 김치와 불고기를 싸들고 병원을 찾아왔다. 리버풀에 살고 있는 마리테 민(민원순) 수녀님도 우리의 사고 소식을 듣고 천리길을 달려오셨다. 수녀님은 나를 보자 “우리 함께 기도해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예요. 가깝게는 가족과 많은 분들이 민주엄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하고 말해 결국 나를 울게 만드셨다. 칼라일 시에 살고 있는 영국인 데블린과 카트린 씨 가족도 민 수녀님의 소개로 병원을 찾아 우리 가족을 위로하기도 하고 민주를 데리고 소풍을 가기도 했다. 경희대 철학과 교수가 된 친구 박인철과 후배 강형동 부부도 독일 도르트문트와 뮌헨에서 자동차를 타고 바다를 건너 우리를 찾아왔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고 했는가. 모두가 그 가장 어려운 순간에 조건 없이 우리 가족을 도와준 은인들이었다.

영국경찰은 런던에 있는 한국대사관에도 우리 가족의 불행을 알렸다고 했지만 한국대사관으로부터는 열흘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그 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영사로부터였다. 런던에 너무 일이 많아 오지인 칼라일에 올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황씨 담당간호사들과 함께. ⓒ프레시안
병원 내에 설치된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민주는 병원 식구들에게 단연 인기였다. 아내의 주치의부터 간호사, 심지어 청소부 아줌마들까지 한국어와 독일어를 조잘대는 민주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사람들은 출근길에 그림책과 스케치북, 크레용, 작은 인형 등을 민주 손에 쥐어주곤 했다. 민주가 그린 그림은 아내 병실을 뒤덮을 정도가 됐다. 간호사들은 “엄마가 깨어났을 때 네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랄 꺼야” 하고 민주를 격려했다.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피어난 위로의 꽃들

두 번째 수술 후 상처부위가 다시 감염되면서 아내의 얼굴에는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아! 이렇게 죽고 마는구나.’ 나는 절망했다. 늘 밝게 대하던 간호사들도 더 이상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내의 시신을 수습해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잘 수도,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 65킬로그램을 넘던 내
체중은 48킬로로 떨어졌다.

입원한 지 한 달이 되던 날 화이트는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상태라면 아내가 24시간을 넘길 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대퇴부까지 절단하는 수술을 시도해보자는 것이었다. 보호자가 수술에 동의하며 사망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였다. 만약 수술이 실패로 끝나 척추와 골반까지 감염된다면…. 아내의 죽음이 이제 현실로 다가왔다. 일주일 전 한국에서 달려온 장모님은 주치의의 말을 듣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이제 자네가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 하네. 죽음을
준비하게.” 민주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지 나와 외할머니 눈치를 살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내 입에서 쉼 없이 성모송이 나왔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묵주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손가락을 묵주 삼아 성모송을 외우고 또 외웠다. 겨자씨 만큼의 신앙심도 없던 나였지만 잠결에도 성모님께 ‘당신도 그렇게 소중하게 사랑하던 아들이 눈앞에서 숨지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다른 모든 사람이 외면해도 당신은 그 고통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고통을 거두어주십시오.’ 나는 눈물로 호소하고, 때로 항의하며 성모님께 종주먹을 내밀었다.

▲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중환자실로 옮겨진 후. ⓒ프레시안

아내가 병원에 입원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옆 침대에 40대 스코틀랜드 여성이 입원했다. 위암 환자라고 했다. 그녀는 혼자 정원을 산책하고 노래를 부를 정도로 건강해 ‘왜 응급실에 들어왔을까’ 의문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3주 후 갑자기 숨을 거뒀다. 환자를 둘러싼 가족들은 임종 직후 울음을 삼키며 손을 잡고 기도를 올린 뒤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 같으면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발버둥치고 통곡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데 가족 한사람씩 나에게 다가왔다. “비록 내 아내는 숨졌지만 당신 부인은 젊고 할 일이 많아요. 반드시 하느님이 당신의 부인을 살려주실 겁니다.” “우리 언니가 못 다한 삶을 당신 부인이 살아가길 바래요.” 슬픔 속에 잠겨 있어야 할 이들이 오히려 나를 포옹하며 위로했다. 나는 바보처럼 그들을 껴안고 울고 말았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병원 안에 있는 성공회성당 여사제도 매일 혼수상태에 있는 아내를 찾아 기도를 올려주었다. 24시간을 넘길 수 없다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 독일에서 친하게 지냈던 예수회 김용해 신부님께 전화를 했다. 독일 성당에 보좌신부로 계셨던 신부님은 다음날 오지의 병원을 찾아오셨다. 내가 종부성사를 부탁하자 신부님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은 런던의 한인성당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유럽 한인 가톨릭 공동체는 시간을 정해 아내의 소생을 간구하는 미사를 일제히 올렸다고 한다.

기적, 그리고 그 의미를 생각하다

▲ 사고후 처음으로 산책을 나왔을 때. ⓒ프레시안

  그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과 교인들의 기도 때문이었을까. 희망이 없을 것 같다던 아내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270을 넘던 혈압이 떨어지고 신장 기능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고 했다. 대퇴부로 감염되면 가능성이 없다던 주치의는 ‘장례절차가 필요 없을지 모른다’며 조금씩 희망을 전하기 시작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던 몸에서 붓기가 빠지면서 아내는 사람 몰골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수술을 받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정말 거짓말처럼 아내의 의식이 돌아왔다. “여기가 어디야? 아니, 엄마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나와 딸애, 그리고 장모님은 사지에서 돌아온 아내를 맞았다. 서둘러 아내를 독일로 이송할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리고 다시 독일 땅을 밟았다.

우리 가족이 두 달 반 동안 영국 오지의 작은 병원에서 느꼈던, 애를 끊을 듯하던 고통과 슬픔을 떠오르곤 한다. 우리 가족에게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 너무도 따뜻하고 친절했던 영국 의료진, 환자뿐 아니라 환자 가족을 위해 설계되고 움직이는 영국병원의 시스템 등 우리 가족이 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 나는 하느님이 아내에게 죽을듯한 고통을 주시고 다시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되새겨보곤 한다. 그때마다 교통사고나 뇌졸중 같은 한순간의 불행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환자들을 위한 일을 해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곤 한다. ‘네가 급한 놈이니 우물을 직접 파라’고 말이다.

백경학/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