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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3. “우리 엄마 다리는 곧 자라날 거예요!” [프레시안] 2006-7-12

[우리 곁의 재활병원] <3> 개인의 불행과 국가의 책무

 

영국에서 독일까지 비행기로 불과 한시간 거리였지만 우리 가족이 독일로 돌아오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영국을 떠나기 전날 한 동양 남자가 나를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런던 대사관에서 파견된 교민담당 영사였다. 나는 그를 만나 할 말이 없었다. 사고 직후 스코틀랜드 경찰이 우리의 사고소식을 한국 대사관에 알렸고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지만 담당 영사는 “칼라일이 너무 멀고 할 일이 많아서 갈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막상 그의 얼굴을 보자 분노가 치밀었다. “대사관 임무 중 가장 중요한 일이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 아닙니까.” 그는 “2만 명이 넘는 교민을 혼자 관리해야 했고 무엇보다 대사관 행사가 많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며 거듭 사과했다.
  
  나는 그날 밤 최동진 영국대사에게 편지를 썼다. “대사님, 이역만리에서 자국민이 교통사고를 당해 생사를 넘나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대사관 직원 중 누군가 달려와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대사관의 임무가 아닙니까. 대사님 가족이 사고를 당했다면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겪은 일을 잊지 않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최 대사로부터 “미안하다”는 전화가 걸려 왔지만 나는 그의 사과를 받지 않았다.

  


▲ 독일병원. ⓒ프레시안

  다음날 독일행은 예정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아내가 들 것에 실려 비행기에 오르자 루프트한자 조종사가 질겁하며
이송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의 몰골이 너무 심각해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주장했다. 영국에서 사고를 당한 것도 분한데 독일마저 우리를 버린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다. 루프트한자 맨체스터공항 지사장과 의료진이 나서서 조종사를 설득했지만 그는 ‘환자의 이송 여부는 조종사의 권한이라며 탑승을 끝내 거부했다. 우리는 결국 독일행을 포기하고 전시·막사 같은 맨체스터병원 응급실로 아내를 옮겼다. 우리가족은 분노에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나와 대사관의 항의 때문인지 다음날 루프트한자는 특별기를 마련했고 우리는 드디어 독일땅을 밟았다.

  
  영국과 비교하면 독일은 훨씬 상황이 좋았다. 영국보다 깨끗하고 편리한 병원시설이 그랬고, 무엇보다 2년 동안 살아 와서 편안했던 데에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고향에 온 것 같은 위안을 줬다. 병원으로 직행한 아내는 다음날부터 무시무시한 재활치료를 받았다. 두 달간의 혼수상태로 근육이란 근육은 모두 사라졌고 사고의 충격으로 운동신경과 균형 감각이 상실된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도 아내에겐 고통이었다. 아내는 들 것에 실려 평행대 위에 세워졌다. 아내는 계속 비명을 질렀지만 독일 의료진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두 번씩 혹심한 전쟁을 치르면서 절단수술도 마취제 없이 했다는 독일의 의료 전통이 아내에게 적용됐다. 아내는 재활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차라리 사지가 마비됐더라면 이런 운동을 하지 않을 텐데…” 하고 한탄을 했다. 나와 장모님은 ‘독한 놈들…’을 연발하며 발을 굴렀다.
  


▲ 독일병원수영장. ⓒ프레시안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내는 아침부터 오후 4~5시까지 수험생처럼 맹훈련을 받았다. 독일병원은 영국병원과
다른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병원 시설과 주변 환경이 쾌적했다. 마치 국립공원 안의 호텔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재활치료와 훈련도 환자의 입장에서, 환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지속적인 상담과 여러 팀으로 구성된 의료진이 회의를 거쳐 아내에게 맞는 재활치료의 내용과 강도를 결정했다. 아내의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인 상태는 매시간 기록됐다. 한 달이 지나자 아내는 병원에 있는 수영장에서 수중재활치료를 받았다.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할 것을 걱정하던 아내는 부력을 이용해 물속을 몇 발자국 걸은 뒤 “나도 혼자 걸을 수 있어’ 하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날 오랜만에 우리가족이 함께 웃었다. 독일병원은 오전 오후로 두 시간씩 가족과 친지의 방문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환자를 24시간 병원에서 간호했기 때문에 나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4시가 되면 퇴근해야 했다.

  


▲ 독일병원에서 물리치료사와. ⓒ프레시안

  아내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는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김용해 신부님과 사고 후 도움을 많이 준 유학생 배정한 씨와 강형동 씨, 독일교민 아주머니, 아저씨들이었다. 병실에 들어서며 아주머니 몇 사람이 “민주엄마…” 하고 눈물을 터뜨렸고 아들 부부처럼 우리 가족을 사랑해주셨던 송준근 사장님은 말없이 나를 끌어안았다. 병실에 침묵이 흘렀다. 그때 일곱 살 민주와 민주친구 난이가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엄마 다리는 곧 자라날 거예요.” “맞아요.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도마뱀도 꼬리가 잘리면 또 자라나잖아요.”
  
  한동안 말을 잊었다. 우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아이들은 슬픔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고 있었다. 그 때 김 신부님이 사람들에게 기도를 하자고 하셨다.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당신께서는 우리 인간의 사고와 상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아직 우리가 당신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울고 있지만 당신이 사랑하는 딸 민주와 난이가 슬픔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것처럼 민주 엄마의 다리가 빨리 자라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비록 아내의 다리는 잃었지만 수많은 다리로 재생되기를 기원했다.
  
  아내는 다행히 조금씩 독일병원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무엇보다 낙천적이고 늘 웃는 성격이 어려움을 당하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됐다. 사고 후 눈물을 흘리던 아내는 어느 날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생활은 익숙해졌지만 먹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독일에서는 마늘 냄새에 질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독일 사람들과 생활을 해야 하는 유학생과 교민들은 금요일 저녁이 돼야 비로소 김치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병원생활을 하는 아내가 한국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아침식사로 우유와 소시지, 빵 한 쪽, 점심과 저녁식사로 차가운 돼지고기 한 덩이가 대부분이었으니 입맛도 없거니와 먹어도 무언가 늘 속이 찌뿌둥했다.
  
  때맞춰 교민들이 김치를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외국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김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삶의 원동력이었고 내가 한국인임을 느끼게 하는 정체성이었다. 냉장고에 김치가 들어가자 일부 간호사들은 “어디서 악마의 냄새가 난다”고 난리를 쳤지만 나는 모른 체 하며 아내에게 조금씩 김치를 먹였다. 아내에게 김치는 보약이었다. 하루는 철학을 전공하던 홍경완 신부님과 태권도장을 운영하던 장재희 사범이 문병을 왔다. 들어설 때부터 눈을 꿈벅꿈벅하며 시그널을 보내는 것이 ‘뭔가 독일 간호사가 싫어할 것을 가지고 왔구나’ 생각했는데 작은 냄비를 내밀었다. 한국을 다녀오는 교민에게 부탁한 ‘개고기’였다. 교통사고 환자에게는 개고기가 특효라며 게슈타포도 무서워했다는 독일 세관의 눈을 피해 어렵게 개고기를 공수한 것이었다. 그날 밤 아내는 고국에서 가져온 개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이 사실이 알려졌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 우리가족과 개고기 이야기는 일주일 넘게 독일 언론의 톱뉴스를 장식했을 것이다. 독일 세관과 병원 관계자는 곤욕을 치렀을 것이고 동물 보호로 악명 높은 프랑스 여배우가 달려와 농성이라도 벌이지 않았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아무튼 그날 밤 아내는 국물까지 남기지 않고 개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 독일병원에서 퇴원. ⓒ프레시안

  독일 병원 생활을 거치면서 고문에 가까운 가혹한 재활훈련이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던 아내는 시간이 지나자 휠체어를 혼자 굴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자 혼자 평형대에서 걷는 연습을 했다.

  
  병원을 퇴원하는 날 가톨릭봉사단체인 카리타스에서 파견한 두 사람이 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 일을 도와주는 독일 아주머니와 뮌헨의대 학생이었다. 독일 병원에서 카리타스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매주 이틀씩 집을 찾아 왔다. 독일 학생은 장애인증 발급과 체류허가갱신 등 주로 서류 문제를 맡아줬고 독일 아주머니는 아내를 대신해 집안 일을 도와줬다. 독일 사회보장제도의 힘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가족의 사고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이 우리의 사고 기사를 실으면서 8000마르크(약 480만 원)의 성금이 전해졌다. 마을에 있는 신경정신과 여의사는 귀국할 때까지 아내의 치료를 맡겠다고 나섰고 옆집 할아버지는 유치원에서 민주를 찾아주고 내가 병원에서 퇴근할 때까지 놀아주곤 했다.
  
  되돌아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거친 폭풍우 속에서 우리 가족이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도움 때문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나는 독일 할머니들은 달려와 아내의 손을 잡고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고 한국 교민들은 몸에 좋다는 음식을 만들어 오곤 했다.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독일병원정원. ⓒ프레시안

  우리 가족은 조금씩 사고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주말이 되면 도움을 준 사람들과 함께 바비큐 맥주파티를 열기도 했고 아내는 소형 전기자동차를 타고 나와 딸애는 자전거를 타고 마을 호수를 산책하며 그동안 피폐해진 심신을 회복했다. 아내는 매일 마을에 있는 재활센터에서 물리 치료와 지압치료를 받으며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귀국 전 프랑크푸르트 인근도시 ‘트라운펠드’의 재활병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병원은 2차대전 후 독일 상의군인회에서 기금을 모아 정신질환 전문병원으로 건립됐지만 1980년대 환자가 줄어들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문병 온 헬무트 콜 총리의 부인이 낙후된 시설을 보고 50만 마르크(약 3억 원)를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과 기업이 모두 500만 마르크(약 30억 원)를 기부해 리모델링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가 독일에 머무는 동안 뉘른베르크에서는 한 중소기업인의 기부가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우리로 치면 ‘만도기계’ 같은 견실한 자동차부품회사를 30년간 이끌어 오던 노사장이 은퇴를 선언하면서 재산을 지역사회에 기부하고 회사 경영권을 장애인 중국인 직원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지역사회는 재산을 기부한 사실은 환영했지만 외국인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것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았다. 사장은 인터뷰를 자청해 “나는 아들이 둘인데 첫째는 몇 년 내 회사를 말아먹을 것이요, 둘째는 나와 비슷한 능력을 가졌지만 중국인 직원은 회사를 몇 배나 성장시킬 것으로 확신한다. 당신이라면 누구에게 회사를 물려주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신문은 기사 내용을 전하면서 “당신은 못난 아들에게 유산을 남겨주겠느냐”는 제목을 달았다. 참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 자동차를 타고 독일마을 산책. ⓒ프레시안

 

  우리 가족은 독일에서 의료보험료와 사고가 나면 법률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자동차 보험료로 매달 1000마르크(약 60만 원)와 200마르크(약 12만 원)를 각각 냈다. 이것은 나의 월급과 언론재단으로부터 받는 장학금, 가족 수와 연령 등을 모두 고려해 책정된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 비해 너무 비싼 보험료에 불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가 사고를 당하자 우리가 받은 혜택은 상상을 초월했다. 영국과 독일 병원비, 의족과 휠체어,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자동차 리프트, 안경과 특수 신발, 8년 동안 소송을 진행한 독일 변호사와 영국 변호사 비용까지. 아마 보험에 들지 않았더라면 내가 가진 재산은 물론 피해보상금도 고스란히 소송비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두 독일 보험회사가 우리를 위해 지출한 비용은 10억 원이 넘을 것이다.
  
  외국의 사회제도가 좋고 우리 것이 나쁘다고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각자 발전단계와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독일 사회보장제도와 기부문화는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무얼까. 나는 단연 ‘남에 대한 배려와 의료 및 교육문제를 국가에서 책임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갑작스런 질병과 사고로 인한 불행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지역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백경학/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