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남’ 아닌 ‘내’가 된 장애인


 

고갈된 감정 탓인가요. 처음엔 ‘나는 멋지고 아름답다’(이승복·김세진·이상묵 외 지음, 부키)도 수많은 장애인의 성공 수기 중 하나이겠거니 여겼습니다. 눕듯이 의자에 기대 심드렁하게 책장을 넘겼지요.

그러나 머리말을 읽으며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장애를 이겨낸 24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란 부제가 붙은 책의 머리말을 쓴 이는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그는 모르는 이가 아니었습니다. 초임 기자 시절 한때, 그는 경찰 기자실에서 매일 새벽부터 얼굴을 맞대던 기자였습니다. 1990년대 후반, 그가 가족과 함께 유럽 어느 나라에 연수를 떠날 때만 해도 그는 그냥 기자였습니다. 그러나 귀국을 얼마 앞두고 떠난 영국 여행길에서 부인이 교통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게 되면서 그의 삶이 온통 뒤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바람결에 전해 들었지요.

책을 보며 인터넷에서 접한 백씨의 근황은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부인의 거듭된 수술과 재활치료비 마련을 위해 기자를 그만둬야 했던 그가 새로 택한 직업이 안정되자 ‘푸르메재단’을 만들어 재활전문병원 설립에 나섰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장애인이 된 부인의 길고도 힘겨운 치료과정을 지켜보며, 그가 장애인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도 같았습니다. 이 책도 증권전문가 최중석씨가 푸르메재단에 기부한 출판기금을 씨앗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자세를 달리하니 책 내용도 가슴에 확 다가들었습니다. 체조 선수로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다 중증 장애인이 된 뒤 다시 의학을 공부해 미국 존스홉긴스대 병원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가 된 이승복 박사부터 그랬습니다. 2006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지질 조사를 나갔다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었으나 다시 강단에 서면서 ‘한국의 스티븐 호킹 박사’로 불리는 이상묵 박사의 수기도 신문에서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일상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는 전신마비에도, 기존 학자로서의 삶에 더해 장애인을 위한 삶이 하나 더 추가됐을 뿐이라고 담담히 쓰는 그는 이 시대의 영웅이었습니다.

장애인 수영 유소년 선수 김세진, 사고를 당한 뒤 수묵 크로키를 창안한 의수 화가 석창우, 인권영화상 수상 시각장애 영화감독 노동주, 열 손가락을 잃은 채 세계 7대륙 최고봉을 등정한 산악인 김홍빈,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 초등교사 송광우, 곽정숙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중증장애를 극복하고 그림을 그리며 어려운 이를 돕는 윤숙인 수녀. 책에 나오는 24인의 아름다운 영웅 중에는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 배형진,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1급 지체장애를 극복하고 문학박사이자 문화일보를 통해 작가로 등단한 고정욱씨도 있습니다.

자신의 장애와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기획한 것으로 보이는 책에서 영웅들은 입을 모읍니다. 장애는 엄청난 시련이었지만, 이로 인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바뀌었다고요. 새로운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달렸더니 꿈은 이루어졌고, 그래서 어떤 이는 장애에 감사하기도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어야 하는 이가 어찌 장애인뿐일까요. 이들의 이야기는 지체가 멀쩡하면서도 타성이란 장애로 하루 하루를 때우듯 살아가는, 게으른 우리의 어깨를 내리치는 서늘한 죽비이기도 합니다.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기사 게재 일자 2010-01-22 1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