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아픔 이기고 강연 1000여번…성경 속 삭개오처럼 삽니다

[박정호의 사람 풍경] 아픔 이기고 강연 1000여번…
성경 속 삭개오처럼 삽니다

2016-12-03

미국 UCLA서 박사 학위 따고 온 이지선씨

 “3일 오후 서울 상암동 넥슨어린이재활병원에서 열리는 토크 콘서트에 많은 이들이 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때가 때인지라 시국 얘기를 빠뜨릴 수 없었다. “소위 이대 나온 여자라고 밝힌 적이 있죠. 요즘 착잡하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이대 재학 중 교통사고로 전신 화상
2003년 『지선아 사랑해』로 희망 전해
유학 12년간 재활상담·사회복지 공부
피부이식 수술 40여 차례 받아
다행히 이젠 끝낼 때가 된 것 같아
남들과 비교하면 모두 불행해져

“사건 초반 이대 평생교육원이 부각됐을 때는 안타까웠는데. 지금 돌아보니 후배들이 엄청난 일을 했어요. 가만히 있었다면 나라의 큰일이 묻혀 버렸을 것 아니에요. 국정 농단의 끄트머리를 잡았지만 정의롭게 참지 않은 게 자랑스럽습니다.”

그의 가방에 들어 있는 책이 살짝 보였다.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다. 행복이란 파랑새를 과학적 입장에서 접근한 책이다. 그는 책장 곳곳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메모지도 붙여 놓았다.

 이지선씨가 중앙일보 독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냈다. 사인과 함께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보물들을 꼭 찾으시길!’이라는 문구를 적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질의 : 요즘 읽고 있는 책인가 봅니다.
응답 : “평소 행복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아요. 행복은, 희망은 ‘막연한 기대’라고 대답했어요. ‘고난의 끝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보물이 있다. 저 또한 교통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해 왔지만 막상 행복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질의 :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요.
응답 :“두 몸이 붙어 있는 샴쌍둥이 사례가 뭉클해요. 사람들은 흔히 그들을 분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들은 태어난 그대로가 더 행복해한다고 합니다. 나의 프레임(액자)으로 타인을 들여다보는 건 그만큼 위험한 거죠. 책에는 셰익스피어의 말도 나와요. ‘타인의 눈으로 행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쓰라린 일인가!’라고요.”

질의 : 마치 본인 얘기 같습니다.
응답 :“사람들이 저를 보고 ‘나는 쟤보다 훨씬 낫네’ ‘힘내야지’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보다 안된 사람을 보고 위안을 얻을 수 있죠. 하지만 거기에 머무르면 곤란합니다. 그런 태도라면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볼 때 금방 불행해지잖아요. 비교만큼 나쁜 건 없죠.”

이지선(38)씨는 차분했다. 2000년 7월 30일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4학년 때 7중 교통사고로 전신 55%, 3도 화상을 입고 청춘의 꿈을 잠시 접어야 했던 그다. 2003년 낸 『지선아 사랑해』, 2년 뒤 발표한 『오늘도 행복합니다』로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그가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지난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를 받고 새 출발을 기약하고 있다. 2004년 미국 유학을 떠난 지 12년 만의 결실이다. 지난 9월 귀국해 내년 신학기 교단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

 올 6월 미국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지선씨가 부모님과 자리를 함께했다.
그는 “가족과 신앙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사람과 부딪히잖아요. 그렇게 사고를 만난 거라고 믿어요. 우리는 모두 특별한 사람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고 싶어요. 장애는 동정과 연민, 시혜의 대상이 아니거든요.”

질의 : 다시 광야에 선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응답 : “졸업 당시에는 꽤 불안했죠.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논문을 마쳤습니다. 요즘 대학 한 곳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까지 정해진 직장, 즉 사회생활을 한 번도 하지 않아 약간 긴장도 되고요.”

질의 : 박사 논문 주제를 소개한다면요.
응답 : “장애인을 접하고 난 뒤의 일반인 인식변화입니다. 미국 밀알선교단에서 운영하는 사랑의 캠프 참가자를 연구했어요. 2박3일간 장애인과 비장애 봉사자가 일대일 짝을 이뤄 함께 먹고, 자고, 노는 프로그램입니다. 캠프 전후를 비교했는데 비장애인도 장애인을 더는 ‘불편한 사람’이 아닌 친구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230여 명의 응답을 분석했는데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질의 : 자칭 ‘LA 쭈글이’였습니다.
응답 : “박사 과정 1년차에는 누가 봐도 꼴찌였어요. 처음엔 영어도 잘하지 못했고요.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아무도 등수를 매기진 않지만 동급생 8명 가운데 가장 부진한 편이었죠. 하지만 졸업은 꼴찌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도, 남편도 없으니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죠.”(웃음)

질의 : 석사 과정은 재활상담 아니었나요.
응답 : “사고로 3급장애 판정을 받은 뒤 장애인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가족과 지인의 도움으로 일어설 수 있었잖아요. 그 모든 게 상담이었죠. 2008년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 석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재활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입니다. 한국과 사정이 많이 다르죠.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보다 좀 더 큰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뉴욕 컬럼비아대 사회복지 석사 과정을 다시 마쳤어요.”

질의 : 만약 보건복지부 장관이 된다면요.
응답 : “초·중·고교에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강좌를 1순위로 개설하고 싶어요. 미디어에도 장애인이 훨씬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들도 저를 TV로 보고 익숙해졌잖아요. 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뜻에서 TV에 나가고, 인터뷰도 자주 했습니다. 일단 호기심이 사라지면 장애인을 두 번 쳐다볼 일이 없거든요. 우리 모두 마라톤 러닝 메이트처럼 함께 뛰는 세상을 소망합니다.”

이씨의 홈페이지(www.ezsun.org)에는 유머가 넘친다. 수술을 자주 받아 ‘즐수술’, 병원에 오래 있어서 ‘베테랑 환자’, 책 사인을 잘한다 해서 ‘사인 머신’이란 표현도 등장한다. 생과 사의 경계를 딛고 일어선 한 인간의 아픔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질의 : 외부 강연을 자주 해왔습니다.
응답 : “지금까지 1000번은 된 것 같아요. 유학 중에서 방학 때는 멈추지 않았죠. 올해도 연말까지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교회든, 회사든, 학교든 요청이 오면 갑니다. 내년에 직장을 잡으면 좀 줄여야겠죠.”

질의 : 16년 전 사고를 다시 꺼내야 하잖아요.
응답 : “이제는 소화가 돼서 괜찮습니다. 2003년부터 강연을 다녔는데 사실 초반에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너무 심각하게 들으니까 농담도 자주 했는데 문득 제가 싫어지더라고요. 마치 제가 녹음테이프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러다가 성경 속 삭개오라는 인물을 만나게 됐습니다.”

질의 : 삭개오가 누구인데요.
응답 : “키가 작은 세리입니다. 군중 속에서 예수를 보려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는데, 예수가 ‘내려오라’며 그 사람 집도 찾아가셨어요. 삭개오는 이후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었죠. 제가 힘겨워할 때 지인 한 분이 ‘삭개오를 떠올려 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순간을 늘 얘기하지 않았겠느냐고요. 이후 주변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삭개오가 된 심정으로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질의 : 피부이식 수술은 계속 받아야 합니까.
응답 : “지난해까지 40여 차례 받았습니다. 피부이식 수술은 식물을 옮겨 심는 것과 비슷해요. 옮겨진 피부가 영양공급을 잘 받으면 분홍빛을 띠면서 뿌리를 내리지만 상황이 안 좋으면 검은색으로 괴사하고 말죠.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이 컸지요. 다행히 이제는 끝낼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질의 : 마라톤도 두 번이나 뛰었습니다.
응답 : “제가 홍보대사로 있는 푸르메재단 기금 마련 때문이었죠. 2009년 뉴욕마라톤(7시간22분26초), 2010년 서울마라톤(6시간45분)에서 죽을힘을 다해 완주했어요. 이왕 한 것, 삼세판인데 한 번 더 뛰어 볼까도 했는데, 이젠 체력이 따라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질의 : 이상형으로 유재석을 꼽았는데요.
응답 :“유학 시절 예능프로를 보며 외로움을 달랬죠. 진짜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축구선수 이영표씨입니다. 저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은데 정말 치열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사람 같아요. 하지만 배우자로는 말이 통하고, 재미있는 사람이 좋아요. 너무 열심히 살면 부담스럽지 않을까요(웃음). ‘내 짝은 어디에 있나’라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이젠 그것마저 비웠습니다. 만나면 감사하고, 안 만나도 받아들이고요.”

지하철 타고 식당 가고…“보디가드·운전기사 이젠 없죠”

 “그러게요, 이제 거의 다 없어졌네요.”

이지선씨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연예인과 닮은 점이 사라진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서다.

이씨는 13년 전 『지선아 사랑해』에서 그와 연예인의 공통점 10가지를 간추린 적이 있다. ①보디가드(오빠)가 호위한다 ②매니저 겸 운전기사(엄마)가 있다 ③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사람들이 쳐다봐서 ④식당도 맘대로 못 간다 등이다. 그는 3년 전 SBS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도 “나는 연예인이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엔 그런 ‘인위적 비교’가 필요 없다.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보디가드 없이 다니고, 혼자 승용차를 몰고, 지하철도 거리낌 없이 탄다. 식당에 가도 별다른 불편함이 없다. 그의 홈페이지에 하루 100번 이상 들어오는 열혈 팬도 이제 찾을 수 없다.

그간 변하지 않은 건 ‘인기가 올라가면 큰 차로 바꾼다’ ‘성형수술을 한 경험이 있다’ 정도다. “사고 당시 경차를 탔기에 크게 다친 게 아닌지 부모님이 엄청 아파했다”고 했다. 지금 타고 다니는 승용차는 쏘나타다.

“당시 10가지를 꼽은 건 슬픈 상황을 이겨내려는 마음에서였어요. 사람들이 쳐다볼 때의 불편한 시선이 정말 싫었거든요. 오빠는 가서 싸우고 싶을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 아픔을 유쾌하게 바꾸려 했습니다. 이제 다 옛일이 됐지만요. 하하하.”

글=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출처 : http://news.joins.com/article/20957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