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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께 춤출래요?

자신이 송두리째 삼켜져버릴 것 같다는 위협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어릴 적 나는 매일같이 이러한 공포를 느끼며 살아왔다. 막막한 침묵 속에 자신을 잃어가던 그곳은 바로 병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 나를 영영 잃지 않기 위해 가야만 하는 곳이 병원이었다는 점은 그 모순된 공간의 특징이었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결혼을 앞두고 어느 날 밤 문득 생각했다. 지난 10년간 발길을 끊었던 이 공간을 다시 찾아 가야겠다고.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권위적인 의사의 목소리가 싫지만, 진찰대기실의 무거운 공기를 감당할 수 없겠지만,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남들보다 병원을 신뢰하지 못하고, 가기를 꺼려하는 이유는 나름 충분했다.

차가운 병원

나는 생후 10개월에 의료사고를 겪었다. 나의 장애는 병원에서 시작된 셈이다. 나를 삼켜버린 의사와 병원이라는 존재가 끔찍이도 싫었다. 병원에 갈 때면 항상 내가 더 사라져 버릴까봐 두려웠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어린이 병동에 같이 있던 친구가 사라졌다. 그때까지 나는 병원이 그를 삼켰다고 생각했지, 병마가 그를 삼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텅 빈 침대에 나뒹구는 이불과 장난감이 그가 입원 동지였던 내게 남기고 간 유일한 유산이었다. 한 달 후에는 내 수술이 잡혀있었는데, 어렸던 나는 나름의 생존 본능을 발휘해 도저히 수술을 진행할 수 없을 만큼의 위험한 컨디션을 만들었고, 결국 수술은 취소됐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퇴원했다.

결국 다음 해 다른 병원에서 수술은 진행됐지만, 적어도 9살 당시에는 살아남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돌이켜보면 어린이 병동은 참 이상한 곳이었다. 일반 병동은 보통 환자가 불안해하고 보호자는 침착해하는데, 어린이 병동은 그 반대로 어린이 환자가 침착하고 활발하지만 보호자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는 침울한 표정을 띠곤 했다. 이 알 수 없는 분위기가 왠지 싫었다. 아이들의 철없는 행복과 어른들의 슬픔이 공존하는 어린이 병동의 천진난만함이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생과 중학생 시절을 마지막으로 병동에 발길을 끊은지 10년째다.

10년 만에 다시 찾아가려니 모든 것이 새로웠다. 당시에는 어머니가 내 모든 병원 업무를 도맡았다. 진찰을 예약하고, 제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도록 병원 시간을 조정하는 일들 말이다. 성인이 되어 혼자 하려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예약콜센터에 전화해 쭈뼛쭈뼛 “진찰을 받으려면 어떻게 예약해야 하죠?”라고 묻는 모습은 베테랑 환자라기보다는 아픈 아이를 두고 어쩔 줄 모르는 신혼부부에 가까웠다. 상담원 안내에 따라 내 진찰기록이 네다섯 개의 과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느 부위가 급하고 덜 급한지를 몰라서 모든 과에 외래진료를 예약했다.

차트를 보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

오랜만에 다시 찾은 어린이 병동은 여전했다. 그 사이 리모델링이 됐다고는 하지만, 환자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분위기는 아직도 남아있었다. 병원이기에 어쩔 수 없다. 또 발랄한 아이들과 침울한 부모님들이 만들어내는 모순적인 병원의 공기도 여전했다. 가끔 응급 침대에 누워 숨을 가쁘게 쉬어대거나 아픔을 참지 못해 엉엉 우는 아이들 옆을 지나갈 때면 가슴이 너무 아팠다. 특히 나보다도, 함께 처음 대학병원을 찾은 내 아내 가연이가 더욱 힘들어했다. 그녀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처음이니 훨씬 낯설고 두려웠을 것이다.

병원에 오기 전까지 당시 내 주치의는 모두 은퇴한 줄도 몰랐다. 당장 어떤 의사선생님이라도 만나서 조언을 듣고 이 공간을 빠져나오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기에 머물수록 애써 잊고 있던 어린 시절 투병생활의 기억이 살아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검사 시간이 되자 진료실로 들어갔고, 예상했듯 왜 이렇게 병원을 찾지 않았냐는 의사선생님의 꾸짖음과 함께 진찰이 시작됐다. 내 진단기록이 너무 오래된 관계로 몇 가지 검사를 새로 해야 할 상황이었다. 희귀질환 환자로 분류되는 기간이 지난 탓에 보험적용이 되지 않은 상태로 검사를 진행해야만 했다. 모든 과정이 힘들었고 모든 것이 슬펐다. 특히 아내가 내 병명을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숨겨진 내 치부가 드러나는 것만 같아 더욱 부끄러웠다.

휴대폰 액정에 손을 갖다대고 있는 남성

각종 검사를 마치고 장인어른에게 전화를 드렸다. 지금 제 신체 상황은 부정적이지도 호전적이지도 않다고 솔직히 말씀드렸다. 앞으로 추적검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더 알아봐야 할 문제들도 남아있어서 병원을 한동안 다녀야 될 것 같다고 자신 없게 털어놓았다. 장인어른은 잠자코 얘기를 듣고는 말하셨다. “병원 다니며 스트레스 받지 말게. 자네를 위한 것 아니겠는가. 몸이라는 것은 좋을 때도 있지만, 아플 때도 있다네. 나도 그렇고. 그보다 더 지켜야할 것은 안정된 정신을 갖는 것일세. 자네는 그저 그것만 생각하게. 가연이와 함께 어떻게 행복하게 살지. 오래오래 몇 살까지 사는 지는 중요한 게 아닐세. 남은 기간 동안 얼마나 서로 즐겁게 춤추며 살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자네의 장애가 호전되지 못해도, 아파도 속상해하지 않을 걸세. 오직 자네와 내 딸 가연이, 두 사람만을 생각하며 살게나.”

변재원 작가 청첩장

담담한 장인어른의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린이 병동의 모든 환자들은 쾌활하지만, 보호자들은 낯빛이 어둡고 침울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걱정되던 것도 환자인 내 감정보다, 나 때문에 힘들어할 아내와 그녀 식구들의 염려였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실까 하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장애인 사위라는 것에서 출발하는 불안함과 병세가 호전되지 못한 오늘날까지의 진단들이 혹시라도 그들에게 큰 절망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시고, 즐거운 인생을 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는 장인어른의 성숙한 조언 속에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조언을 따라 결혼식(7월 2일)의 명칭도 ‘Shall we dance’라고 지었다. 내가 당장은 조금 아플지라도, 병원에 꾸준히 다녀야만 하는 장애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래도 나와 춤을 추겠느냐는 의미의 인사이다.

아직은 모든 것이 두렵다.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언제 다시 아플지, 수술을 또 해야 하는 일이 닥칠지, 그 모든 상황이 두렵다. 장애인으로서 평생 다녀야 할 병원에서의 추적검사도 두렵고, 의사 선생님의 꾸짖음도 두렵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와 가연이를 위해 즐겁게 이 모든 과정을 받아들일 것이다. 나와 우리 가족의 즐거운 삶을 지키기 위해.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신부와 신랑

*글= 변재원 작가

변재원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했고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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