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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둡다, 호롱불을 밝혀라

[구텐백의 길]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강진기행 (5편)

 

‘士爲知己者死(사위지기자사).’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이다. 무릇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얘기다. 다산의 재능을 알아보고 총애했던 정조, 그리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 주군을 평생 그리워한 다산. 그는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파국으로 치닫는 당쟁을 보며 현실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된다. 다산은 유배지에 도착할 때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36년간 저술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 대흥사 입구의 꽃길

다산의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이 있지만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당대 대표하는  고승(高僧)들과의 만남이다. 두번째 고승 이야기는 대흥사(大興寺)에서 비롯된다. 대흥사를 감싸 안은 두륜산(頭輪山)은 703미터의 높지 않은 산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소백산맥이 해남반도에 와 닿으면서 우뚝 솟아난 두륜산은 멀리 다도해를 굽어보고 있다.

▲ 여관이라기보다 산사의 일부인 유선관
두륜산 대흥사를 찾았을 때 계절은 겨울에서 막 새싹이 돋는 봄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병풍처럼 웅장하게 대흥사를 감싸고 있는 두륜산은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대흥사 입구의 사하촌. 100년 전통의 유서 깊은 여관인 유선관(遊仙館)이 대흥사로 이어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 날아갈듯 솟아오른 기와지붕의 맵시와 고즈넉한 정원의 정취에 반해 임권택 감독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영화 <서편제>와 <천년학>도 이곳에서 촬영했다니 나도 짬을 내 정갈한 고택을 거닐어 본다.

유선관을 나서니 일주문(一柱門)까지 2킬로미터 가까운 길에 동백과 벚나무가 지천이다. 꽃피는 봄이 오면 동백꽃과 벚꽃들로 꽃대궐을 이룰 것이다. 상상만으로 행복하다. 최고 명승지에 자리 잡은 대흥사는 명당자리도 모자라 대웅전에 이르는 길조차 이처럼 아름답단 말인가.

산세에 반하고 절경에 취해 길을 걷다보니 어느덧 대흥사 대원보전 앞마당에 이르렀다. 대흥사는 31본산의 하나로 13인의 대종사(大宗師)와 13인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고찰이다. 하지만 이곳은 다산과 초의, 추사, 추사의 제자로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이라 불렸던 소치 허련(許鍊)의 행적이 어우러진 곳이다.

▲ 조선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대웅보전 현판을 썼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서산(西山)대사 휴정(休靜)스님과의 인연도 깊다. 우리나라 5대 사찰중 하나인 평안북도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에 주석했던 서산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1500명을 일으켜 왜구에게 빼앗긴 평양성을 탈환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명당과 함께 승병장으로 전장을 누볐던 서산은 전쟁이 끝나자 묘향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열반에 들기 전 자신의 유품인 가사와 바릿대를 보현사가 아니라 저 멀리 대흥사에 보관할 것을 유언했다고 한다. 서산대사가 남긴 선시(禪詩) 중 하나다.

밤은 깊어도 그대는 오지 않고

밤은 깊어 가는데 그대는 오지 않고
새들은 잠이 들어 온 산이 고요하네
소나무 달이 꽃 숲에 비추어서
온몸에 붉고 푸른 그림자만 무늬지네

夜深君不來
鳥宿千山睜
松月照花林
滿身紅綠影

마치 아름다운 가곡을 듣는 것 같다. 임을 기다리는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인데 달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그림자가 무늬지게 된다는 불교적인 정서로 승화된 것을 보면서 서산 대사가 아니라 서산 시인, 휴정 시인으로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 정조가 쓴 현판이 걸려 있는 표충사
서산대사의 유품이 대흥사에 기탁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대흥사는 평범한 사찰에서 일약 서산의 종찰(宗刹)로 떠올랐다. 대흥사를 한번 더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정조가 서산의 공덕을 기려 직접 쓴 표충사(表忠寺)라는 현판을 내린 것이다. 지금도 대흥사 내 표충사 조사전(祖師殿)에는 서산대사와 함께 그를 도와 왜적을 물리친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대사와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대사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있다.

▲ 왼쪽부터 사명당 유정대사, 서산대사, 뇌묵당 처영대사 초상화

다산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스님은 대흥사 주지였던 아암(兒庵) 혜장선사(惠臟禪師, 1772~1811)이다. 해남사람으로 성은 김씨(金氏), 호는 아암(兒庵), 법명은 혜장(惠藏)이다. 어려서 출가해 대둔사(大芚寺)의 월송 화상(月松 和尙)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는 서른 살의 나이에 천여명이 모이는 대흥사 불교학술대회를 주도할 만큼 높은 학식을 지녔다. 강진 읍내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아전의 자식을 가르치던 다산과 혜장이 우연히 만난 것은 다산에게나 열살 아래인 혜장에게나 더할 나위없는 행운이었다.

두 사람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다산이 초당에 머물고 있던 1804년 혜장도 다산초당의 뒷산인 백련산(일명 萬德山) 백련사에 머물고 있었다. 봄이 찾아오자 동백꽃으로 뒤덮인 백련산에 오른 다산은 작은 암자에 머물고 있던 혜장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다산은 한 눈에 그가 고승임을 알아봤지만 혜장은 그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던 다산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랜만에 세상 돌아가는 대화를 나눈 다산은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빠져나왔다. 깜짝 놀란 혜장이 부리나케 쫓아 나와 “당신이 다산 아니십니까? 소승이 밤낮으로 뵙기를 사모했는데 어찌 이렇게 떠나시려 합니까?”하며 다산의 손을 잡고 다시 절로 이끌었다고 한다.

▲ 다산과 혜장선사(출처 : blog.naver.com/and002?Redirect=Log&logNo=110135669986)
두 사람의 대화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주역에 이르러 다산이 혜장에게 물으니 막힘이 없었다. 다산은 혜장에게 “숙유(宿儒, 학식이 높은 선비)로다.”하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은 차와 곡차를 마시며 유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학문을 논했고 다선(茶仙)의 경지에 오르게 됐다고 한다. 서로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스승과 제자로, 학문의 길을 걸어가는 도반(道伴)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혜장이 스승 다산에게 보낸 시에는 존경과 사랑이 듬뿍 담겨있다.

은근한 말씨 속에 깊은 의미 담겨
두려운 마음으로 잘못을 고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주역의 상에 뛰어난 안목 있고
날카로운 필봉은 졸음을 몰아낸다
우연찮은 해후에 갖은 시름 다 잊다가
헤어지면 마음 아파 그저 생각뿐인데
때마침 들녘 절간 찾아
껄껄대는 웃음 속에 불법을 묻는다

혜장은 유교의 대학자인 다산을 통해 유학의 깊은 뜻을 배울 수 있었고 다산은 또한 혜장을 통해 유장한 불교철학에 빠져들었다. 다산은 주역에 통달했던 혜장을 통해 주역에 심취하게 된다. 다산은 아이들을 가르치다 틈만 나면 주역을 연구했다고 한다. “주역과 논어를 좋아하여 연구함에 빠뜨림이 없었고 역학, 음악, 성리학을 정밀하게 연마하여 속유(俗儒)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산이 혜장을 만난 지 7년만인 1811년 이른 나이에 혜장이 죽자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부도탑(浮屠塔)에 쓴 비문의 일부이다.

눈을 돌려 세상을 돌아보면 탐관오리가 판치는 세상이요, 그 아래 허덕이고 있는 백성들의 탄식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세상을 깨치고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다산의 사상은 아방강역고(1811), 맹자요의(1814), 경제유표(1817), 목민심서(1818), 흠흠심서・아언각비(1819) 등 500여권에 이르는 저서와 2500여 개의 이르는 시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 다산 정약용의 초상화
백아절현(伯牙絶絃)이란 말이 있다.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말로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말이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산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 있구나” 말하였고,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구나”하고 감탄하였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세상에 자기 거문고 소리를 들려줄 사람이 없다고 탄식히먀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은 다음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머나먼 유배지에서 자기를 알아주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두 사람의 고승이 있었다는 것은 다산에게는 큰 위안과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57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풀려나 남양주 능내에 있는 고향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매일 경전(經典)을 공부하며 자신의 집을 ‘여유당’이라고 지었다. 그 뜻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노자(老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 다산의 묘
회갑을 맞은 다산은 생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장지를 정하고 스스로 묘지명도 지었다.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갔다.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사람이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속에 태워버려도 괜찮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1834년 다산은 7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북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고향집 뒷산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다산은 숨지기전 가족들에게 “너무 어둡다. 호롱불을 밝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두 아들이 다가가 아버지를 애절히 불렀으나 다산은 말이 없었다. 한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였던 다산은 마지막으로 ‘세상을 밝히라’라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은 일본과 서구열강의 침략 속에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끝)

*글, 사진=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
*참조= <도서>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다산기행, 문화유산답사기, 절을 찾아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목민심서, 한국근대사, 선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등. <자료집> 편지 다산의 마음을 읽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찾아서, 다산 250(천명, 다산의 하늘), 다산 시화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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