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씨이야기] 아버지와 눈물

아버지와 눈물


93년 3월에 입대했다. 남자에게 군대는 20대에 경험해야 할 필수 과정이자 인생이 쉬운 게 아니라는 걸 가르쳐주는 첫 번째 산교육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군에 입대한다는 사실에 이런저런 핑계로 친구들과 매일 술을 마셔댔고 한 달 동안 몸무게가 8kg나 빠진 채 입대해야 했다. 막상 집을 떠나보니 예상대로 편한 게 없었다. 훈련은 고달팠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잠자리는 딱 상상 이상이었다. 제대까지 2년 2개월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첫 저녁식사 때 나온 녹아빠진 브라보콘처럼 내 마음은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경기도 모사단에 배치 받아 신병훈련을 받았다. 4월이었지만 눈이 펑펑 내렸다. 4월의 눈은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기상이변으로 기록되었다. 하얀 눈은 훈련병의 흙먼지 덮인 국방색 군복위에도 어김없이 쌓였다. 눈은 무겁지 않았는데 하루하루가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몇 주가 지나고 신병훈련의 꽃이라는 화생방 훈련이 있었다. 훈련이 어렵고 위험할수록 조교들의 눈빛은 더욱 매서워졌다. 다음 주에 있을 사격과 수류탄 투척 훈련을 앞두고 작은 것 하나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화학무기라며 하루 종일 방독면을 씌우고 이 산과 저 산을 뛰게 했다. 제대로 숨을 못 쉬고 헐떡대는 모습을 조교들은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고통이 끝날 수 있다면 오후에 맛보게 된다는 가스실에 오히려 빨리 뛰어들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후 3시가 넘어서야 가스실을 체험했다. 얼굴은 콧물 범벅이가 되어 연습한대로 높은 산에 올라 바람으로 땀과 눈물을 말렸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하루에 다 체험한 것 같았다.


훈련이 끝나자 다른 날과 다르게 주임원사는 훈련병 모두를 연병장에 앉혔다. 그리고 군복 상의에서 꼬깃꼬깃한 봉투 하나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소리는 명쾌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훈련병 부모에게서 받은 편지가 분명해 보였다. 입소 얼마 후 부대에서는 훈련병 부모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답장이 온 것 중 하나를 읽어 주는 것 같았다. 구구절절한 내용에는 부모가 자식을 입대시키고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 아들은 막내로 태어나 누나들 틈에서 어려운 것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아들이 잘 적응할지 걱정이 됩니다.”라고 시작된 편지를 주임원사는 계속 읽어나갔다. 그런데 주임원사가 읽을수록 나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용을 들을수록 나의 아버지가 쓰신 글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얼마 후 읽기를 마친 주임원사는 “59번 한광수 훈련병~”이라는 호명으로 나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동기들의 이유없는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아버지가 쓰신 편지를 받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눈물이 마를 새 없는 날이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몇 달이 지났다. 오히려 신병훈련소보다 더 바쁘게 지나갔다. 해야 할 일도 외워야 할 것들도 많았다. 그리던 어느 날, 선임의 말 한마디가 이등병의 순진한 머리에 박혔다. 다음 달 국경일에는 부모가 일찍 면회를 오면 외박을 보내준다는 것이다. 작년에는 자기를 포함해서 4명이나 외박을 나갔다고 자랑은 계속되었다. 며칠이 지나도 선임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꼭 집에 가고 싶었다. 우연히 집에 전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 사실을 누나에게 알렸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갔다.



날씨는 무더워졌고 국경일이 되었다. 점호가 끝나자 간단하게 청소를 하고 아침 식사를 위해 이동하려는데 한광수 이병은 아버지가 면회를 오셨으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면회를 오시다니 한 달 동안 무심하게 잊고 있었던 외박이 떠올랐다. 아들을 위해 새벽부터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고 오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외박 허가를 위해서는 중대장의 허락이 필요하니 먼저 면회를 하고 있으라는 일직사관의 말에 신이 나서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부대에는 다른 부모들의 면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나자 일직사관의 호출이 있었다. 일직사관은 오늘 면회자가 많아서 모두 외박을 보내줄 수 없고 두 명만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 중대에 면회자는 다섯 명이었고 이등병에게까지 외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너무 비참했다. 아들의 말만 믿고 일등으로 오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으신 아버지는 오히려 먹을 것을 싸오지 않은 것을 미안해 하셨다. 온가족이 함께 오지 못한 것도 아쉬워하시는 눈치였다. 복지회관에서 냉동식품과 과자만 잔뜩 펼쳐놓은 채 아버지와 아들은 서먹한 대화를 이어갔다. 먼 길을 가셔야할 아버지를 위해 또 선임들의 눈치 때문에 면회를 일찍 끝냈다. 위병소를 지나 먼지 펄펄 나는 비포장 플라타너스 길을 빠져 나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눈물을 훔쳤다.


 

점처럼 희미해지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들보다 더 서운해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군 생활이 고통만 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군대라는 삭막한 조직에서 흘린 두 번의 눈물을 통해 무뚝뚝한 듯 깊은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일요일에는 아버지에게 전화라도 드려야겠다. 20년도 훨씬 지난 아들과의 추억을 혹시 기억하고 계실까.


*글= 한광수 팀장 (홍보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