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박일원 / 프리랜서 작가]



천상병 시인이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귀천이라는 시이지요. 신경림 시인은 이 시를 두고 “죽음을 얘기하며 당연히 음울하고 처절해야 할 터인데 이 시에서는 마치 죽음에의 길이 아름다운 것으로 연상될 만큼, 맑고 곱기만 한 가락이다. 더구나 노을빛과 단 둘이서 놀다가 구름이 손짓하면 이슬과 손에 손을 잡고 하늘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된, 나이브하기 그지없는 소년이 그린 환상적인 동화를 보는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상병 시인의 현실은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나이브하거나 동화 속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질곡의 파란만장한 생애였지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심한 전기고문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음주벽과 영양실조로 거리를 헤매던 중 쓰러져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습니다.



 


 


 


 


 


 


▲ 이 글을 쓴 박일원 님


얼마 전 모 통신회사의 공익광고를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잠자는 데 하루 평균 약 6.7시간을 사용해서 80 평생 동안 총 수면시간은 22년이라고 합니다. 또 일하는 데는 8시간을 써서 26.6년, 먹고 마시는 데는 매일 2.6시간을 소비해서 9년, 하루에 이런저런 근심 걱정을 하면서 3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평생 동안 합산하면 10년을 애면글면하며 지낸다고 합니다. 반면에 웃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해야 90초, 이를 일생 동안 더해나가면 약 30일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이 통계가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늘인다고 해도 30일에서 얼마나 더 늘어나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한 시간은 우리 인생에서 참 작은 부분인 것 같습니다. 집을 나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친지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유고 시집인 ‘새’까지 발간합니다. 그런 모진 시간을 보냈어도 시인은 이 세상의 삶을 소풍이라고 표현합니다. 즐겁고 흥이 나는 소풍 말입니다.



▲ 천상병 시인과 그의 아내 목순옥 여사


귀천에서 천상병 시인은 마지막에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말합니다. 하루 90초 정도 밖에 웃을 일이 없는 이 풍진 세상을 소풍에 비유하며 아름답다고 하시니 시인은 참 낙천적이고 천진난만한 분입니다.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소풍은 누구에게나, 일 년에 두 번 봄가을로 있었던 참으로 신나고 기대되는 행사였지요. 하지만 제게는 그리 좋은 추억은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고가는 소풍길도 즐거웠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 당시 소풍의 하이라이트는 점심식사 후 행해지는 보물찾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대개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학용품, 가령 노트, 연필, 필통, 크레파스 등을 종이에 적어 숨겨 놓으면 그걸 찾기 위해 바위나 나뭇가지 수풀 속을 뒤지는 신나는 놀이였는데 담임선생님의 부탁으로 몇몇 학부모들이 그걸 사전에 숨기는 일을 맡아 했습니다. 그런 경우 저의 어머니는 뭔 생각을 하셨는지 선생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원해서 보물 숨기는 일을 맡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 선생님의 신호로 보물찾기가 시작되면 어머니는 저를 업고 찾아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쓸데없이 나뭇잎도 들춰보고 개울가 돌멩이도 들었다 놓았다 하시면서 연기를 하시다 마침내 보물을 그것도 몇 개씩이나 찾아서 제 손에 쥐어주곤 하셨지요. 그런데 저는 그게 어머니가 미리 숨겨 놓은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보물을 찾을 때마다 얼마나 기뻤는지요. 교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 야외에 나가서 뛰어놀며 장기자랑도 하고 싸온 도시락을 까먹으며 즐거워야 할 소풍날이 다가오면 저는 은근히 비가 오기를 기다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어머니만은 속으로는 어떤 마음을 지니고 계셨는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제 기분을 북돋워주기 위함인지 장에 가서 소풍날 입고 갈 옷도 사오고 김밥을 말며 달걀을 삶는 등 열심히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소풍날 아침에는 어머니는 저를 업고 저는 륙색을 메고 기나긴 코흘리개 동무들의 맨 뒤에 붙어서 노란 감꽃이 뒤덮인 고샅길을 지나 쑥부쟁이 덮인 논둑길을 따라서 뒤뚱뒤뚱 소풍을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이렇게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차근차근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그 때 소풍날의 추억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만약 시인처럼 이 세상살이를 소풍에 비유할 수 있다면, 저 역시 세상 끝나는 날 돌아가서 말할 수 있는 게 하나는 생겼습니다. 이 세상으로 뒤뚱뒤뚱 소풍 와서 찾아낸 커다란 보물이 있는데 그건 바로 어머니였다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소풍날이면 제게 찾아줄 보물을 미리 숨겨 놓았듯이 어머니는 저 보다 한 세대 일찍 오셔서 저를 위해 스스로 보물이 되어 이 세상 언저리에 자리 잡고 계셨던 것입니다.



호주로 이민 와서 쿠링가이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쿠링가이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보빈헤드 길가에 감나무 집 앞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집 주인이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라고 그랬는지 잘 익은 주황색 감이 대바구니에 가득 담겨 길가에 놓여있어 그걸 집에 가져와서 실컷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그 보빈헤드 길을 지나다 보니 감나무에 잎이 무성하더군요.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감꽃이 차도 위로 후두둑 떨어지기도 하고요. 얼마 안 있으면 아기 주먹만 한 설익은 감들이 탕탕거리며 떨어지겠지요.


“엄마를 부탁해”는 중견작가 신경숙이 얼마 전에 내놓은 장편소설입니다. 또 그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종된 엄마를 9개월 동안 찾아왔던 딸이 로마의 베드로 성당 내에 있는 피에타 상 앞에 서서 성모마리아께 드리는 독백이기도 하고요. 눈물겨운 삶을 살아오신 우리들의 엄마, 이미 떠났거나 우리 곁을 떠나실 엄마 또 소설 속에 그 엄마가 말씀하십니다. “감은 금방 열린다. 칠십년도 금방 가버리더라.” 감꽃이 달갑지 않은 요즘입니다.



박일원님은 1995년 호주 이주하여, 13년째 시드니 근교인 쿠링가이에 거주 다문화 장애인 옹호협회(MDAA)에서 근무하며, 한국 KBS라디오와 열린지평, 장애인신문 등에 호주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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