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좋은 날

[안성기/ 영화배우]


인생의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글로 고백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보니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는 남보다 더 힘든 일을 겪었다고 할 만한 시기가 없이 그럭저럭 살아온 것 같다.


알려져 있는 대로, 영화에 몸담고 계셨던 아버지 덕분에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아역배우로 시작했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했으니 올해가 꼭 50년째 되는 해다. 세월이 참 빠르다.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게 오히려 부럽기도 했다"


 부모님이 처음부터 아역배우로 키울 작정으로 시키셨던 것은 아니고, 그저 ‘감독 친구 아들’ 데려다가 한 편 찍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때부터 쭉 하게 된 것이라고 해야 맞겠다. 부모님이 촬영장에 따라다니셨던 것도 아니고 촬영 끝나면 영화사 제작부장이 집에 데려다주고 데려가고 그런 식이었다.


 학교로 데리러 오면 조퇴하고 나가는 것이 거의 매일의 일상이다 보니 친구들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정작 조퇴하는 나로서는 또래아이들과 어울려 놀고도 싶고, 그냥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게 오히려 부럽기도 했다는 것을 그 친구들이 알 리 없었을 것이다.


어떨 때는 네 편의 영화를 동시에 촬영할 때도 있었으니, 학교고 뭐고 내 유년시절은 영화로 시작해서 영화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는 내가 자연스럽게 보고 배우고 그 속에서 호흡하며 자라난 자연스런 환경이었다.


▲ 영화 <하녀>에서 아들 '창순' 역을 맡았던 어린시절의 안성기 님

당시 ROTC 출신이면 대개는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던 시절이었지만 당장 못쓰게된 베트남어로는 취직은 되지 않았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고, 어린 시절부터 영화와 함께 자랐던 내가 생각할 것은 한 가지였다.그러다가 사춘기가 지나면서부터는 공백기를 거치게 되었다. 배우가 아닌 일반적인 삶에 대한 준비도 해야 했다. 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학과에 입학했고 ROTC를 지원했다.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대하기도 전에 베트남이 패망했고, 그 계획은 수정되어야 했다.


정황이 어떻든, 말 그대로 백수인 채로 2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주변에는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친구들도 있는 마당에 염치없이 부모님께 용돈을 타 쓸 수도 없고 해서,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집에 있긴 있으되 없는 것처럼, 되도록이면 눈에 띄지 않게 지냈다.


"2년 백수시절이 배우 인생에 중요한 밑거름"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없었던 시절이어서 프랑스문화원에 다니면서 많은 예술적인 영화들을 보았고, 영어공부도 하는 한편으로, 네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영화화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이때 시나리오를 쓰면서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을 통틀어 볼 줄 아는 눈이 생겼고 많은 감독들과 작품자체를 논할 수 있는, 그래서 믿음을 주는 배우로 여겨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 했던 준비들이 이후 배우 인생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주었다고 믿는다.


아버지가 영화 기획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영화에 출연하는 것 자체는 다른 신인들에 비해서는 수월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마음먹는 것만으로, 다시 영화에 출연하는 것만으로 내가 배우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계몽영화’의 일종인 ‘우수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저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그 후에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며 몇 편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최고의 감독이었던 이장호 감독과 영화의 동반자였으며 많은 도움을 주었던 배창호 감독과 만나게 되었고 우연히 내가 쓴 시나리오에 관한 얘기를 나눌 기회도 갖게 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배창호 감독이 다음 작품에 나를 적극 추천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첫 주연을 맡게 되었는데 그것이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다. 그때가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줄곧 배우로서 길을 걸어왔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그다지 큰 부침이랄 것 없이 그럭저럭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 배우 생활을 해오면서 큰 어려움 없이 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처음부터 너무 목표를 크게 잡고 욕심을 부렸거나, 배우의 본질이 아닌 다른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면 무척 힘든 길을 가야만 했을 것이다.


"일 자체를 즐기고 가정에 충실해야"나는 운좋게도 미리 정답을 알고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숱한 배우들이 어떻게 데뷔하고 어떻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어떻게 전성기를 누리다가 어떻게 쇠락해가는지를 수도 없이 지켜봤다.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는 것을 알고 시작했기 때문에 한번 궤도에 오른 뒤에는 시행착오 없이 줄곧 그 궤도를 타고 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하면서 중요한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일을 오랫동안 계속 할 수가 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다보면 인기나 명예, 부는 그 뒤를 따라오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거꾸로 돼서 인기나 돈을 쫓아가다 보면 결국 원치 않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많은 선배들의 경험을 보아왔고, 또 배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가정은 사람의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 안성기 님 가족의 화목한 사진들

‘국민배우’라는 호칭이라든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 때문에 배우로서 부담스럽겠다고 걱정해주는 분들도 있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 다 한번씩 쉽게 하는 사소한 실수조차도 나는 절대로 해서는 안될 것 같은 부담감이 있기는 하다.그 다음으로는 그때그때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연극배우나 가수는 직접 관객을 만나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지만 영화배우에게는 카메라에 찍히는 그 순간이 관객과 만나는 순간이 된다. 다시 말해서 과정이 곧 결과라는 것이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얘기는 영화배우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런 원칙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고 옆에서 부추기는 요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난 집중해야 할 기본적인 원칙에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매사에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조심해야 한다. 배역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다. 내 이미지와 영 맞지 않는 배역을 맡을 경우 영화의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내가 영화에 손해를 끼치는 꼴이 된다.


다른 여러 가지 이미지를 갖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고통이 되겠지만 내 경우에는 별로 그렇지는 않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추구하려고 애쓰기보다는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의 깊이를 더하려고 애쓰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되 안 되면 차선을 택하고, 거기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내 방법이다.


돌이켜 보면 나중에 뭐가 되리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했다면 쉽게 흔들렸을 것이다. 그때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왔고, 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소중히 여겨왔다.


목표로 삼고 있는 미래의 어떤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것, 지금 한 순간 한 순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 2010년 개봉작 <페어러브>에서 남자주인공 '형만'역의 안성기 님

1992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소말리아를 비롯한 여덟 개 나라를 방문했다. 해마다, 혹은 격년으로라도 갈 기회가 있었다. 그런 나라들을 방문해서 그곳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과연 내가 이 사람들처럼 이렇게 절대적인 고통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과연 그래도 지금처럼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편안히 좋은 얘기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말이다.누가 내 인생의 좌우명이 뭐냐고 물어보면 우스갯소리처럼 “착하게 살자”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매사에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인생을 대하면서 살기란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넓은 것 같아도 ‘친구의 사돈의 팔촌’ 하는 식으로 줄을 그어보면 대한민국 4천8백만이 다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 모든 일이 나와 완벽하게 상관없는 일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내 일처럼 관심을 가지고 고통을 나누려고 할 때 진정으로 나 자신도 행복해지는 길이라 생각한다.



안성기 님은 1957년 다섯 살의 나이로

‘황혼 열차’로 데뷔하여 1980년 ‘바람 불어 좋은 날’에 출연, 대종상 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스타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이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만다라’, ‘고래사냥’, ‘겨울나그네’, ‘하얀전쟁’, ‘태백산맥’ 등 서정성과 이념성 짙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강한 연기력과 관객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로 국민 배우라는 칭호를 얻고 있습니다.

그의 미소는 우리를 편하게 만들고 그 미소만큼이나 마음도 따뜻한 분입니다. 2006년 푸르메재단을 알게되면서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그는 푸르메나눔치과에 1천만원을 기부했습니다. 그가 기부 해준 기부금으로 푸르메나눔치과에 유닛체어가 설치되어 장애인들이 더욱 편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책소개] 푸르메재단에서 엮은 '네가 있어 다행이야'에 실린 글입니다. 안성기, 김창완, 홍세화, 정호승, 장영희 외 여러 저자분이 우리나라에 턱없이 부족한 재활전문병원을 짓기 위해 인세 전액을 좋은 뜻으로 기부하여 만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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