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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길 위에 있고, 역사는 사람 속으로 흐른다.

[박형규/ 목사]

가난한 농부의 절망 섞인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요사이 우박까지 뿌리며 낯설게 굴던 날씨가 따뜻한 봄기운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늘까지 세상을 닮아 언제 거칠어질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박형규 목사님을 만나게 된다는 설렘으로 서둘러 길을 나섰습니다. 박 목사님은 지난해 푸르메재활병원 건립위원 요청을 선뜻 수락한 이후 정기후원까지 해주고 계십니다. 그는 푸르메재단의 후원자이기 전 한국 민주주의의 산 증인으로 시대의 양심을 떠받치고 있는 버팀목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남대문시장 건너편 북창동의 작은 음식점에서 꼬막을 앞에 놓고 박형규 목사님과 마주 앉았습니다. 올해 88살, 미수이신 박 목사님은 평온하고 활기찬 얼굴이십니다.

6번의 구속과 독재시대의 긴 터널을 견뎌오신 박 목사님은 “나는 지금도 여전히 길 위에서 서있습니다. ‘영적 구원’과 ‘사회적 구원’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라고 말문을 여셨습니다.

한평생 실천하는 삶을 보여주신 박형규 목사님은 최근 출판된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처럼 오늘도 당신의 길 위에 서계십니다. 살아온 세월만 따져도 당신 절반에 못 미칠 저를 기꺼이 친구로 대해 주시는 목사님과 대화를 나눌수록 그의 길은 낮은 곳으로 임하는 신에 대한 믿음과 정의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춤사위로 유명하신 박목사님
목사님께 가장 어려웠을 때를 물었습니다. “목회활동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이에 비하면 오히려 감옥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일에만 전념하면 되었으니까요. 젊은 시절 신념을 위해 열정을 바치는 일은 행복한 일입니다.””1960년 4월 피 흘리며 쓰러진 어린 학생부터 수많은 노동자와 빈민들 그리고 제가 대공분실에 붙잡혀 있을 때 대화를 나누다 저에게 감화되어 교수가 된 어느 고문경찰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길위에 서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존재하고 불의가 남아 있는 한 그 길 위에서 내려올 수 없습니다.

십오 년 전 그가 남양주로 거처를 옮긴 것은 평생을 해오고도 어렵기만 한 목회를 그만두고 자연 속 생명들과 어울려 살고자 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믿음과 신념에 합당치 못한 세상이 또 나를 불렀습니다. 내 나이 이제 88살, 미수(米壽)가 되었지요. 오늘도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다시 전철을 갈아타고 시끄러운 세상에 나왔습니다. 길 위에서 목자가 아닌 시민의 이름으로 목회 아닌 목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뭍 생명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평등한 소중함을 사람들이 알아야 합니다.”

▲ 박 목사님과 백경학 이사

점심과 커피를 마시는 한시간 반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1960년 4월부터 2010년 4월까지 50년의 세월을 그와 같이 걸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켰습니다. 노(老) 목사님은 그저 자신의 길 위의 믿음과 삶을 얘기했지만 그를 통해 한국역사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역사는 사람을 통해 사람 속으로 흐르나 봅니다. 그는 밥 한 그릇 가운데 반은 밥 그대로 나머지 반은 국에 말고 그릇에 붙은 밥알은 물을 부어 비웠습니다. 밥 한 그릇을 비워내는 그의 손은 마치 어떤 의식행위를 행하는 듯 조심스러웠습니다. 밥 한 끼 나오기까지 수고한 자연과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습니다. 삶이란 이렇게 매 순간이 가벼울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 박목사님과 부인 조정하님

새로운 노상목회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박형규 목사님을 길 위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맑게 갠 4월의 봄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완벽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입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마음을 졸였습니다. 나이 들면 걱정만 많아진다더니 요즘 들어 이렇게 맘 졸일 것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저마다 나름의 소중한 것들이 오만한 사람들에 의해 수몰될까봐서요.

글= 김신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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