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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의 차원을 넘어선

이우학교의 외관은 일반적이지 않다. 학교건물 치고 좀 특이하다. 철골과 유리가 적당히 버무려진 3층짜리 건물 세개동이 지형의 경사를 따라 계단식으로 배치되고, 그 곁은 같은 컨셉의 2층짜리 복합건물 한 동이 잇대어 있다. 그런 탓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학교건물의 입체적 배치에서 느껴지는 ‘텅빔’과 ‘붐빔’의 이중적 이미지에 신기한 표정을 한다. 대개가 그렇다.

방문객들은 각 건물 사이의 동선 설계나 장애학생을 위한 엘리베이터 설치를 확인하고는 더욱 놀란다. 그런 그들에게 학교는(나는) 부연한다.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실천하는 차원에서 특별전형을 통해 장애학생을 선발한다. 그리고 그들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세심하게 배려한다. 엘리베이터는 그런 맥락에서 운행한다.” 방문객들은 학교(나)의 이러한 수사를 통해 이우학교 교육이념의 차별성을 확인하고는 감탄한다

문제는 나의 발언에 모종의 ‘잘못된 이해’와 ‘승인의 욕구’가 반영돼 있다는 점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그렇다. 즉 장애학생을 ‘특별하게 보호해야 할 존재’로 대상화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장애학생을 위한 배려의 장치’를 자랑삼고 있다는 점이다(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미세한 문턱들이 여전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통합교육 실상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인식과 태도가 얼마나 부박(浮薄)한 것인지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지난 5월 일본 오사카부(大阪府) 북서쪽 효고현(兵庫縣)에 인접한 이케다시(池田市)의 池田北高等學校를 방문하였다. 방문 목적은 호흡기장애를 앓고 있는 오리타 료의 학교생활과 장애학생을 위한 학교의 지원 시스템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학교의 풍경이나 분위기는 우리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장애학생에 대한 인식과 태도, 학교의 입장 등은 사뭇 다르다. 정확히는 우리에게 는 익숙하지 않은 사고이자 접근 방식이다.

직접 만난 오리타 료는 예상외로 중증의 호흡기 장애학생이었다. 인공호흡기를 통해서만 호흡이 가능하고, 타인과의 의사소통도 오직 살아있는 눈동자의 움직임으로만 가능하다. 이런 상태에서 비장애학생과 수업을 함께 받다니? 가능할까 싶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오리타 료의 침대 곁에는 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는 ‘도움교사’(기간제교사)가 교사의 설명을 열심히 필기한다.

학습보조 교사가 수업 내용을 필기하고 있다. 답안지에 채점하는 시간이다. (왼쪽)
료는 학습보조 교사의 필기내용을 모니터를 통해 확인한다. (오른쪽)

동시에 이 필기 내용은 침대 끝에 경사지게 설치된 모니터에 비춰져 <오리타 료>의 시야에 들어온다. 일종의 중계방식의 학습이다. 그리고 이 도움교사는 간간이 오리타 료의 곁으로가 부연 설명을 하고, 그의 눈빛을 확인한다. 인공호흡기에서는 주기적으로 ‘바꾸 바꾸’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이러한 소리와 움직임 속에서 비장애학생들은 무심한 듯(?) 혹은 익숙한 듯(?) 저마다 자기방식으로 수업에 참여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오리타 료>의 침대는 양호실(보건실)로 이동되고, 그곳에서 양호교사(보건교사)의 처치를 받으며 식사를 한다. 물론 음식물은 튜브를 이용해서 ‘투입’된다. 점심시간 후에는 다시 수업이 반복적인 형태로 진행된다.

료의 점심식사. 양호교사가 유동식을 준비해 입에 넣어주고 있다. 식사는 학생들과 교실에서 할 때도 있고 양호실에서 먹을 때도 있다.

그리고 수업이 종료되면 <오리타 료>의 등하교를 책임지는 2명의 개호인(介護人)이 그와 동행하게 된다. 학교방문 당일에는 꽤나 많은 비가 왔음에도 그 육중한 침대를 비밀 커버로 세심하게 감싼 뒤에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하교한다. 특히 버스에는 그의 침대가 놓일 공간이 별도로 마련돼 있고, 지하철역의 역무원들은 그의 승하차를 오차없이 연계한다. 집에서 학교로, 학교공간에서, 다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부모가 노심초사할 일이 없어 보인다. 일련의 과정이 ‘기계적 정교함’을 연상할 만큼 완벽하다.

학교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 료. 2명의 개호인과 버스기사가 료의 승차를 돕고있다.

<오리타 료>와 함께 생활하는 비장애학생들의 표정은 ‘특별하지’ 않다. 한국의 권위 있는 시사주간지(한겨레21) 기자의 카메라를 의식할 법도 한데,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다. ‘의도적 무관심’인가 싶을 정도로 그렇다. 그런데, 그들의 ‘특별하지 않은  표정’이 일본사회의 맥락에서는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 한 학생과의 인터뷰에서 확인된다.

“그는 좀 불편할 뿐이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호흡기 소리가 불편했지만 지금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세상은 ‘함께 사는 곳’ 이다”

학교의 입장(교장의 의견)도 인터뷰한 학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가 어떤 교육적 신념이나 철학 때문에 장애학생을 입학시킨 것이 아니다. 그가 지원했고 합격했기 때문에 다니는 것뿐이다”

“장애학생이 입학하기 전 그를 위한 시설 보완 예산을 신청하고, 교육청이 배정한 예산으로 시설을 보충한 것이다. 다른 학교에도 장애학생이 진학하면 그렇게 한다. 우리학교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장애학생의 취학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탓인가? 그 흔하게 있을 법한 ‘장애인 이해를 위한 오리엔테이션 자료’나 ‘장애학생에 대한 배려를 당부하는 지도지침’이 없다. 그런 자료의 존재여부를 묻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눈치다. 이런 눈치를 주는 데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미 장애인에 대한 사회일반의 인식 수준이 높아 초보적인 설명이나 비장애인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필요 없는 경우일 것이다. 다른 하나의 경우라면, 사회적 지원시스템이 완벽하여 개개인의 관심여부와 무관하게 장애인의 권리가 보호되는 경우일 것이다(그러나 실은 후자의 경우라 하더라도 전자의 경우를 근간으로 해야 가능한 만큼 순차의 문제이지 관점의 차이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현재 일본의 장애학생 통합교육은 어떤 단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나의 관찰 경험만을 놓고 본다면, 비장애학생들이 장애학생을 ‘특별하게 배려할 존재’로 대상화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사회일반 그리고 교육계 저변에 ‘자연스럽게, 함께 할 수 있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시스템적 정교함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장애학생이 장애학생을 타자화하지 않는 것은 서로에 대한 ‘동일시’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동일시’는 상호간에 ‘애정’이 있을 때 성립된다.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애정과 연대감이 깊어지는 단계에서는 ‘슬픔’도 그저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조건에서 ‘슬픔’에 대한 경계나 연민은 사라지고, 각자가 대등한 관계 맺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장애인 통합교육! 결국 그 목표는 ‘대등한’ 관계에서 오는 ‘동일시’의 애정을 함께 공유하는 방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료와 함께 하는 ‘평범한’ 수업시간

당분간(?) 이우학교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것이고, 나는 맡고 있는 직책상 그 손님들에게 학교를 설명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엘리베이터’의 쓰임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생각이다.

“이 엘리베이터는 누구든 이동이 불편한 사람을 위해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싶다.

“이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하게 보는 눈이 사실 ‘더 특별한’ 것이지요”.

 

이수광/분당 대안학교 <이우학교> 교감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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