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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푸르메 동산을 꿈꾸는 박원순 이사

1990년대가 ‘민주화 시대’라면 2000년대는 ‘분배와 나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소외된 이웃 중 특히 장애 환자에게 재활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푸르메재단이 탄생한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아름다운재단에서의 경험을 살려 <푸르메재단>에 새롭게 둥지를 튼 박원순 변호사. 그는 민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그리고, 이제는 재활병원 설립에 앞장서는 사회복지운동가로 탈바꿈하고 있다.

아래는 까사리빙(Casa Living) 2월호 박원순 이사 인터뷰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사실 80년대 박원순 상임이사는 돈 잘 버는 잘나가는 변호사 중 하나였다. 미문화원 사건이나 성고문사건 등 당시 시대상을 반영해온 많은 인권관련 사건 변호사로 활동했지만 그는 제법 큰 단독주택도 갖고 있었고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탔으며 다른 사람들이 삐삐를 부러워할 때 휴대폰을 사용했다. 거기에 경치 좋은 곳을 만날 때마다 일상적으로 ‘풍광 좋은 그곳’에 별장 갖기를 꿈꿀 만큼 그는 ‘상당한 부자’였다. 아주 큰 돈은 아니었지만 또래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그랬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여러 단체에 물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었고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게도 좋은 얼굴로, 기꺼이 도움을 주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는 탐욕의 열차’에 올라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그는 평소 존경에 마지않던 선배 조영래 변호사의 죽음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욕심내는 것이, 99개가 채워지면 나머지 1개를 채우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인지상정. 은근슬쩍 부자를 꿈꿔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는 불쑥 자신의 모습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는 점점 가속도가 날 텐데….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유학길에 올랐다. 그게 91년의 일이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 이가 되어 돌아왔다. 고급 주택은 전세 아파트로, 기사 딸린 승용차는 지하철과 버스로 바뀌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사는 재미가 넘친다는 평범한 시민운동가로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돈쓰기’

몇 년 간의 미국유학 생활 중 그가 가장 오랫동안 기억하는 건 다름 아닌 기부문화였다. 돈이 많은 재벌이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이들이든 모든 이들에게 돈은 귀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돈은 천사도 되고 악마도 될 수 있다는 것. 미국에서 생활하며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할 때만이 돈이 천사가 되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돈 있는 사람만이 기부를 하고, 기금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기금을 적립하는 재단이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고 ‘캠프에 보내주기 기금’이나 ‘소원 이뤄주는 재단’ 등 지역별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테마별 기금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았죠.”

단순하게 좋은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의 기부가 아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당연하고도 즐거운 의무로 받아들여지는 기부문화.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세금 한 푼 안내고 자식들에게 어떻게든 고스란히 되물림하려 애쓰던 우리나라와 비교해보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00년도 살기 힘든 세상. 그 속에서 아무리 어렵게 모은 돈이라도 죽는 순간 단 1원조차 가져갈 수 없는 게 절대불변의 진리이다. 하지만 밥을 굶는 아이들을 위해 10억의 돈을 재단금으로 만들어둔다면 이 돈은 평생 없어지지 않고, 최소한 지구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그 이자만으로도 수많은 아이들에게 밥을 제공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해본 뒤 그는 재단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신선한 경험을 간직하고 돌아온 그는 시민운동을 시작한 뒤에도 늘 시민운동과 기부문화를 접목시킬 아이디어를 찾았다. 그러던 2000년 8월. 1년여의 준비 끝에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목숨보다 사랑했던 참여연대에서의 생활을 접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2년 여 동안 두 가지 일을 병행하던 그는 결국 일요일 오전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아름다운 재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떠나야 될 시점이라고 느껴 내린 결정이지만 한동안 참여연대 건물 근처는 지나치지도 않았을 만큼, 정 떼는 일은 어렵고 힘들었다. 지금껏 해오던 모든 활동을 접는 게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참여연대에서의 활동은 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찾아 고쳐 나가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재단의 활동은 확실히 다릅니다. 이름 그대로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사람들의 작은 힘을 모아 아름다운 사람들을 지원하는 곳이 바로 여기서 하는 일이거든요. 적은 돈이 모여 가장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곳도 우리가 하는 일이고요.”

자발적으로 선택한 가난

90년대 초 유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은연중에 ‘나 역시 부자가 되길 꿈꾼 건 아닌가’ 반성하지 않았더라면, 브레이크가 고장나든 말든 현실이라는 열차위에서 만족하고 살았더라면, 아니면 모든 것을 알고도 한쪽 눈을 질끈 감았더라면 그의 현재 모습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꿈꾸던 별장이 현실화되어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그곳을 향해 온 가족이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승용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원순 상임이사는 그런 생활을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일수록 하나같이 제 얼굴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낄 수 있잖아요. 그런 것 같아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같이 일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주름살이 펴지고 얼굴이 좋아지나 봐요.”

하는 일이 달라졌을 뿐 그는 요즘도 너무 바쁘다. 스케줄은 늘 꽉 차 있고 그를 찾는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사실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남들이 쓰던 용품을 모아 가게를 열고, 기부금을 모아 사회로 환원하는 일은 흔한 세상의 잣대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그것도 맘만 먹으면 개점 휴업한 상태인 본업 변호사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요즈음 심심찮게 요청이 들어오는 신문사 대표 혹은 대학 총장직을 못이기는 척 수락해, 더 늦기 전에 ‘부자’ 소리를 들으며 남부럽지 않게 잘살 수 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모습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남들 눈에 번듯해 보이는 높은 지위나 돈 따위에는 더 이상 욕심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서랍이 찌그러진 중고 책상이지만, 그만을 위한 조그만 별도의 방이나, 공간이 없어도 지금이 좋단다. 강제적으로 시키지 않아도 적은 보수에 만족해하며 자발적으로 원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바로 이 공간에서 그는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사람들 앞에 서면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여러 사람이 함께 연단에 오를 때는 가운데 보다 끝에 있어야 마음이 안정된다는, 수줍음 많은 그가 자진해서 앞장서서 사람을 조직하고 지금처럼 여러 가지 일을 벌여나가는 건 모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 때문이다.

“주머니에 돈은 없고 몸은 바쁘고 힘들지만 오히려 전 지금 행복합니다. 스스로 낮은 곳을 찾아 얻은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지금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직접 선택한 일인데다 좋은 사람들과 늘 함께 하니 정말 좋아요. 그리고 한번 돈에서 자유로웠던 경험을 하고 나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사건을 돈 받고 해결해주겠다고 나서 할 수밖에 없는 거짓말을 반복하기도 싫고요. 여기는 돈이 주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 있거든요. 이를테면 내 것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풍요로워졌다고 할까요. 아마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잘 모르실 겁니다.”

돈보다 소중한 마음의 유산

그의 말대로라면, 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할 만큼 돈도 못 벌고, 심지어 바쁘기까지 한 남편이자 아버지. 시민운동가로서 박원순이 아닌 온전한 생활인으로서의 박원순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물론 가족에게 미안할 때도 많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만 갖지 않았다면 전처럼 풍족하진 못하더라도 부족함 없이는 살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가 이 일을 통해 커다란 보람을 찾은 만큼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해주리라 믿습니다. 또 아이들에게 돈을 물려주는 것보다 지금 제가 이룬 작은 성취와 이를 가능하게 했던 바른 생각들을 물려주는 게 더 좋은 유산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다행히 제 마음을 아는지 아이들 모두 다른 집 아이들 부럽지 않게 자립심 하나는 확실하게 갖고 자라주는 것 같고요.”

아름다운 가게 초창기 시절, 말 한마디 없이 집안의 쓸만한 물건을 죄 가져와 아내를 놀라게 했던 박원순 상임이사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내에게도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유학에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전업주부였던 아내가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남편 덕에 일찌감치 자신만의 일을 다시 찾았다는 것. 모처럼 시간을 내어 가족여행을 가자고 제안해도 오히려 아내 때문에 못갈 만큼 그 못잖게 몹시 바쁘다. 변호사 아내로 누렸음직한 안온한 일상과 평안한 생활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내는 남편의 일을 묵묵히 지켜봐줌으로써 그를 후원해주는 든든한 지지자 중 한사람임에 분명하다.

 

작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나눔’

무언가를 나누는 ‘봉사’ 혹은 ‘기부’는 흔히 언젠가는, 조금 더 여유가 있을 때 시작하겠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박원순 상임이사의 생각은 다르다. 실제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를 실천한 이들도 돈 있고 시간여유가 있는 이들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나누는 것 역시 돈이 전부가 아니다. 아름다운 재단에서 강조하는 1% 나누기는 월급의 1%, 유산의 1% 등 단순히 돈에만 해당되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특별한 능력과 기술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전문성 1% 나누기, 연예인들처럼 재능과 재주가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끼 1% 나누기, 기념하고 축하해야 할 많은 날들을 함께 한 이들을 기억해주는 기념 1%나누기 등 다양하다.

사실 좋은 일을 하는 데에도 약간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무엇이든 자신의 것을 나누기로 결심한다는 건 분명히 결단이 필요한 마음이거든요. 또한 기회가 안 닿아서, 방법을 몰라서, 쑥스러워서, 나누기를 주저하기보다 직접 인터넷에 들어와 회원으로 가입하는 용기와 약간의 수고로움, 그건 바로 ‘나눔’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문을 연지 3년도 채 안된 사이 4천여명의 회원으로부터 30억원 모금에 성공한 아름다운 재단과 서울 종로구의 아름다운 가게 1호점을 성공적으로 오픈한 박원순 상임이사. 그는 짧은 동안 이 같은 성과를 볼 수 있었던 건 지치고 힘든 이들을 많은 만큼 우리 사회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픈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이들 또한 적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고 흐뭇해한다.

아직까지 무엇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그는 나눌 수 없는 가난은 없다. 인간의 관점에서 나눠라. 의심하지 말고, 지금 당장 나눠라. 생활 속에 작은 것부터 시작해 습관으로 만들어라. 좋은 일도 전염된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1% 나눔을 선물하라. 나 가진 것 하나만 주면 행복 둘이 돌아온다고 믿어라. 내 자식이 잘되길 바란다면 재산이 아닌 지혜를 물려줘라. 부자를 꿈꾼다면 나눔을 실천할 줄 아는 부자가 돼라. 돈에서 자유로워지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젊어서 의식이 명료할 때 유언장을 작성하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알게 하라 등 10가지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현재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적절한 이들에게 직접 연결시켜주는 운동. 사랑의 복덕방이자 희망의 오작교. 안타깝고 간절한 사연을 모두 적을 수 있는 커다란 화이트보드와 그들의 사연을 접한 많은 이들이 줄지어 도움을 제공할 수 있도록 중간에 다리를 놓고, 사연을 중개해주는 ‘복덕방’. ‘아름다운 재단’이 그 중개인이 될 때까지 그는 나누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