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성자를 그리며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2001년 2월말 불교학자 전재성씨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거지성자로 소개된 ‘독일의 한 수도자가 강원도 춘천 움막에 기거하고 있으니 만나볼 의향이 있느냐’는 거였다. 국내에 그를 소개한 글들을 읽으며 느꼈던 의문이 떠올랐다. ‘거지면 거지고, 성자면 성자지, 거지성자는 무엇이고 요즘같이 살기 어려운 세태에 성자가 있을까’하는.
하지만 궁금했다. ‘성자’라는 말이 주는 이색적인 어감에, 그것도 불교를 독학했고 수도승처럼 무소유로 살아가는 독일거지라니... 회사의 허락을 받아 광화문통을 나섰다.

잿빛 구름이 서울 도심을 뒤덮고 있었다. 2월의 서울 하늘은 왜 이리 스산한 지.

영등포에서 전재성씨의 차를 잡아타고 춘천으로 향하면서 며칠 전 시내 종합병원으로 문병갔던 기억이 났다.
아내의 옆 병실에 입원한 인연으로 가끔 찾아가 대화를 나눴던 일간지 편집국장 출신 대선배. 이 날도 나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당신 부인은 퇴원해서 잘 지내죠? 나는 사는 게 말이 아니에요. 내가 이러구 병원에 쭈그리고 있어선 안되는데...”

이 시간에 편집국을 뛰어다니며 기사의 경중을 결정하고 논조를 놓고 후배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어야 할 그였다. 원고지 10 매를 한시간 안에 쓸 정도로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술을 앞에 놓고 밤새 토론을 즐기던 그였다. 1년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부인과 간병인에게 늘 모든 것을 의지해야 하는 현실이 자신 뿐 아니라 바라보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다. 누구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에 오싹 한기가 느껴졌다.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건강한 시절은 지나간 과거고 이제 정신을 차리시고 걷는 운동을 하시라'고 강조하면서 ‘내가 과연 그가 가진 고통의 절반이나 이해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 준비없이 한 순간에 맞닥뜨려야 하는 절망은 그토록 가혹한 것인지.

거지 성자를 다시 생각했다. 물질문명의 중심에 있는 독일 쾰른 한 복판에 살면서 가진 것을 모두 버렸다고 했다. 쾰른 대학 캠퍼스 잔디밭과 대학 건물 처마밑에 잠자리를 마련하고 낮에는 도서관에서 불교서적을 공부한다고. 몰골 사나운 거지가 자유롭게 서울대 도서관을 드나들며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이 웬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를 만나러가는 춘천호는 봄이 멀지 않았는지 얼음장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돈없이 집없이 여자없이 별아래 홀로 황홀한 수행


페터 노이야르씨는…

▽1940 독일 라인란트―팔츠주 출생. 직업고교 졸업, 전문대 중퇴. 공군 하사관 복무.
▽1968 프랑스 사회변혁운동 참여. 10여년간 세계 방랑 끝 1980년 독일 쾰른 정착. 이후 20년간 무소유와 고행 실천.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연구.
▽1999 11월 첫 방한
▽2000 10월 두 번째 방한

《지난해 10월 독일을 떠나 한국으로 건너온 '거지성자' 페터 노이야르. 집없는 떠돌이 거지에게 성자란 칭호가 붙은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한 지 보름. 춘천 소양호 인근의 폐가(廢家)로 찾았을 때 그는 겨울 햇빛을 보며 명상에 잠겨 있었다.》

명상을 깨뜨린 나를 그는 환한 미소와 합장으로 맞아주었다.

"1999년 11월 실상사 도법스님의 초청으로 한국에 처음 와서 남도의 여러 사찰을 순례했을 때 아름다운 자연에 반했습니다. 독일로 돌아가서도 섬진강과 동강 등 때묻지 않은 한국의 산하가 눈에 밟혔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지리산에 계신 스님이 초청해 흔쾌히 한국행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겨울의 냉기를 머금은 바람에도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 망토 하나로 버티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런 시선을 의식했는지 "12년째 입고 있다보니 이게 옷인지 내 몸인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은 다락논 같다고 하지만 세상을 떠도는 내 삶 같아서 애착을 느낍니다"
그는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며 독백처럼 말을 이어갔다.

"아마 지리산만큼 아직 때묻지 않은 곳은 없을 겁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강산을 한국인이 왜 소중히 여기지 않는 지 모르겠습니다.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도 파괴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자연의 파괴가 모든 것의 파괴로 이어진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앞으로 한국에서의 계획을 묻자 "언제나 그렇듯 특별한 게 없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 아닙니까. 70년대에 10년간 프랑스 영국 그리스를 거쳐 인도 태국을 방랑했듯이 이번에는 한국의 하늘 아래에서 지내려 합니다. 프랑스 속담에 아름다운 별빛아래 잠을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세 인도의 성자인 카비르는 '모든 자연이 나의 생명인데 내가 어찌 나를 해치겠는가' 라는 말로 자연 속 삶의 즐거움을 노래했습니다. 독일 생활이 도심 한가운데 소나무 아래서 수행하는 것이었다면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풀먹다 굶어 죽은 사람'처럼 산나물과 열매로 수행할 계획입니다." 그가 말한 풀먹다 죽은 중국 사람은 고사에 나오는 '백이숙제(伯夷叔齊)'였다.

집은 욕망- 얽매임 상징

한겨울에도 맨발로 생활

누더기 망토 12년째 입어

노이야르가 채식과 생식으로 지낸 것은 20년이 넘는다. 부처의 가르침대로 살기로 결심한 이후 그는 지금까지 채소와 과일만을 먹고 지냈다. 그는 이를 닦지 않는다. 치석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이가 검게 변했다.

"독일은 80년대 녹색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치약이 오히려 이를 상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이닦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이가 검은 내 모습을 여성들이 좋아하지 않으니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말고 머리를 긁었다.

노숙을 하다보니 벼룩과 이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생명이 붙어 있는 것을 죽일 수도 없고 피를 공양하며 언젠가 녀석들이 떠나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4년 전에는 너무 물어대는 바람에 털이란 털을 모두 밀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덩달아 몸이 가려워지는 것 같았다. 무릎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 지 한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어느 새 해가 기울기 시작했는지 호수 위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북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그가 머물고 있는 폐가로 장소를 옮겨 이야기를 어어갔다. 그의 꿈은 원래 무엇이었을까.

"2차 세계대전으로 집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코블렌츠 근처 모젤 강가에서 태어났지만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어린시절은 너무 가난에 찌들려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직업군인이던 아버지는 지식을 불신하며 아들이 노동을 하며 소박하게 살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이 뜻대로 되는 것 입니까. 원래 내꿈은 산지기였습니다. 대자연 안에서 나무를 돌보고 싶었지요. 그러나 산지기가 되기위해서는 7년 교육과정을 마쳐야 때문에 그 꿈은 실현될 수 없었지요. 아버지처럼 직업군인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티벳 승려가 진리를 찾아 인도를 여행하는 내용인 라디야르 키플링 이란 책을 읽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됐지요."

그때 바로 출가를 했나보다.
"그건 아닙니다. 2년간 제지회사에서 직공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유럽 신좌파 학생이 중심이 된 사회변혁운동인 <68사태>가 일어났지요. 당시 히피문화에 열병을 앓고 있던 나도 무작정 파리로 달려갔습니다. 파리대학 집회에 참석하다가 한 헝가리 소녀를 만나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2년만에 그녀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생에 아무런 뜻도 없는 것 같아 유럽을 돌며 방랑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때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하는 것을 깨달았다. 돈 없이, 집 없이, 여자 없이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한국에 와 뜻밖에 집이 생겨 고민이라고 농담을 했다.

"부처께서는 집이 인간의 욕망과 얾매임을 상징하는 것이라며 모든 것을 버리고 구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슬람에도 집 없이 수행을 하는 데르비쉬의 전통이 있습니다. 집이 생긴 이후 인간은 서로 경계선을 쌓게 됐고 이 때문에 단절과 갈등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은 집 한채를 마련하기위해 평생 노예처럼 살아갑니다. 땅을 이불 삼고 하늘을 지붕 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음식을 먹기 위해 수저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수저가 있으면 그릇이 필요하고, 결국에는 식탁이 필요해집니다. 이렇듯 집은 욕망의 집합체입니다. <정신의 집>조차 거느리기 힘든데 거대한 고뇌의 덩어리인 <육신의 집>을 왜 짊어지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한겨울 눈밭을 다닐 때를 빼고는 신발을 신지 않는다.

"가톨릭의 프란치스코와 도미니크 성인도 구도를 위해 맨발로 다녔고 예수도 수행을 위해 신을 신지 않았습니다. 습관은 들이기 나름입니다. 자연을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맨발을 통해 땅의 정기를 받아들이고 교감한다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

탁발과 삭발을 하고 맨발로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도 사찰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불교는 초기불교의 엄격함과 소박함을 잃었습니다. 음식은 너무 기름지고 향이 너무 진합니다. 배 부르고 등 따스한 곳에 진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수행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데 현대의 사찰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 머무느니 차라리 별 아래 거지생활이 더 행복합니다."

한국인에게 '거지 성자'로 알려져 있다고 하자 표정이 일그러졌다.
20년 생식하며 구도의 길

배부르면 진리는 멀어져

왜 욕망갖고 서두르나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대사에게 양나라 무제가 부처의 가르침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지요. 달마는 한 마디로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늘 아래 성스러운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나를 성자라고 부르는 건 얼토당토 않습니다. 나이 60이 넘었건만 아직도 너무 많은 잘못과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요즘 와서는 거지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를 성자라 부르는 것은 진짜 성자들을 욕되게 하는것입니다. "

그가 묵고 있는 방이랄 것도 없는 폐가 안을 둘러봤다. 한 구석에 유교와 초기불교경전 등 책 세 권과 노트 한 권 그리고 가끔 그를 찾아오는 지인이 갖다준 귤과 사과를 담은 라면상자가 덩그랗게 놓여 있었다.

문을 나서는 나에게 그는 중세 인도의 성자인 카비르의 시 한 구절을 읊어 주었다.

"사자가 울부짖지 않고 새도 날지 않는 숲 속에서,
낮도 밤도 없는 숲 속에서
나는 홀로 황홀하게 지낸다네.
그대여, 욕망을 갖고 쓸모없는 일 서두르며
왜 지옥을 향해 치닫으려 하는가."

누더기 한 장만으로 20년간 부처의 깨달음을 실천해온 그가 전해준 선물이었다.

이 글은 백경학 이사가 기자로 있을 당시 2001년 3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쓴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