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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스노보드 타고 에베레스트로 날아가요

 

스노보드 타고 에베레스트로 날아가요

장애 청소년 13명의 ‘우리들의 동화’

최준호 | 제92호 | 20081214 입력 

 

“…에베레스트산 기슭에 도착한 얼큰이는 스노보드를 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온몸에 땀이 흘렀습니다. 올라가는 속도도 너무 느렸습니다. ‘아 너무 힘들다. 그냥 포기하고 내려갈까.’… 그때였습니다. 히말라야의 그 유명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휘이이이~’ 거센 바람은 스노보드를 신고 있는 얼큰이를 허공으로 붕 띄웠습니다. 그러고는 빠르게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이하늘·12·지체장애 1급)

“산산조각 난 피아노 건반에서 작은 요정이 불쑥 나타났어요.…요정은 준휘에게 피아노를 쳐 달라고 했어요.…요정은 피아노 의자 밑에 있는 뚜껑을 열고 악보 한 장을 건네주며 말했어요. ‘내가 목숨같이 아끼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마법의 악보야.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준휘는 악보를 보며 피아노를 연습했어요. 마법의 악보 때문인지 손가락마다 리듬이 실리며 좋은 연주가 나왔어요.”(박영지·17·청각장애 3급)

8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대학로 100번지. 통유리창 너머로 적벽돌빛 마로니에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아르코미술관 2층에 장애 청소년 13명이 모였다.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 등 장애는 제각각이다. 나이도 10세 초등학생부터 17세 고교생까지 다양하다. 이처럼 장애도 나이도 각양각색인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동화책을 만들기 위해서다. 10명이 넘는 장애 청소년이 직접 글을 쓰고, 삽화를 그려 가며 동화책을 펴내는 것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들은 올 9월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5시면 어김없이 미술관에 모여 동화책 작업을 해 오고 있다. 8일로 12주째다. 22일까지 총 14주 동안 진행될 이 작업의 현재 완성도는 약 90%. 이들의 동화 13편과 그림들은 내년 4월 『아름다운 별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묶여 출판될 예정이다.

‘장애 청소년 동화책 만들기’ 행사는 장애인을 위한 비영리 공익재단인 푸르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속 아르코미술관이 장애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차원에서 공동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푸르메재단 임승경 간사는 “그림과 글이 함께 들어 있는 동화책을 만드는 작업은 장애 청소년이 표현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고 개발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장애 청소년들의 동화책 만들기 작업은 쉽지 않았다. 문법에 맞는 글쓰기는 고사하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아이들을 위해 세심한 교육과정이 필요했다. 처음엔 동화와 제작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출판사와 그림 전시장, 인쇄소 등을 현장 학습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이어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얘기하고 토론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표현법을 익히게 했다. 동화책에 필요한 그림 그리기 교육도 병행했다. 아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베스트셀러 동화작가인 고정욱씨 등 작가 4명과 그림 지도 전문 미술가 3명, 자원봉사자 9명 등 총 16명의 선생님이 함께했다. 아이들은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 어엿한 작가로 변신 중이다.

동화는 대부분 평소 장애 때문에 하기 어려웠던 일들을 상상의 세계 속에서 마음껏 펼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노보드를 타고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내용을 쓴 이하늘군은 뇌성마비로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다.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스스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이군의 집인 서울 상일동 주몽재활원의 허수경 과장은 “아이들이 동화책 작업을 통해 숨겨진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도 치료를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청각장애 2급인 유강현(17) 군은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동화를 만들었다. 소설가 나론은 소음이 싫어 ‘쓸데없는 소리 없애기 백만 시민 서명운동’에 동참했다가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지자 뒤늦게 소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후 소리를 되찾기 위해 서명운동을 주도한 악당 존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유군은 4세 때 감기와 함께 온 중이염으로 청력을 잃었다.

유군의 어머니 이주희씨는 “아이가 동화책 만들기 작업에 참여한 뒤 너무 밝아졌다. 인생의 소중한 경험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에서 매주 월요일 6시간 동안 차를 타고 서울까지 와 동화책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강형옥(17) 양은 면역계통 이상으로 눈과 입이 마르는 쇼그렌증후군을 앓고 있다. 중3 때 시력을 잃기 시작했고, 최근 들어서는 류머티즘까지 앓고 있다. 현재 눈앞에 희미한 물체를 감지하는 정도의 시력만 가지고 있지만, 확대기 등을 통해 컴퓨터 작업을 하고 그림까지 그리고 있다. 강양은 ‘용감한 남매’라는 제목의 동화를 썼다. 앞을 볼 수 없는 누나와 뇌성마비로 걸을 수 없는 동생이 스케치북을 사러 문구점에 갔다가 길을 잃게 되지만 서로 도와 가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강양의 어머니 김현상씨는 “동화책 만들기는 딸아이의 유일한 기쁨”이라며 “몸이 많이 불편하지만 왕복 12시간의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만들어 낸 동화는 작은 기적

장애청소년 동화작업 지도한 고정욱 작가


최준호 | 제92호 | 20081214 입력
베스트셀러 동화 작가 고정욱(48·사진)씨는 이번 ‘장애청소년 동화책 만들기’를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장애인들에게 문화와 예술을 함께 교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는 푸르메재단에 ‘동화책 만들기’란 아이템을 제안했다. 그 자신이 소아마비에 걸린 1급 지체장애인이다. 그는 교육과정 내내 담임선생 역할을 맡았다. 지금까지 장애청소년들의 동화작업을 그는 ‘작은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장애청소년에게 동화책 만들기란 어떤 의미인가.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자신감을 심어주고 싶었다. 동화야말로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드러내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동화책 작업은 아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다. ”

-책 만들기는 비장애인도 쉽지 않은 일인데.
“솔직히 처음엔 책을 만드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장애인이라 잘 알지만, 장애아들의 특성인 끈기 부족도 염려스러웠다. 13명 중 적어도 4~5명은 포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아이들이 잘 따라와줬다. 지금까지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았다. 농담 삼아 ‘다음엔 안 와도 돼’라고 말했더니 다들 ‘안 돼요. 끝까지 할 거예요’라고 답했다.”

-같은 장애인인 선생님의 역할도 컸던 것 같다.
“내가 그들에게 롤 모델이 돼 준 것 같다. 아이들이 모두 내 책을 읽고 왔다고 했다. 나도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을 느꼈다. ‘저 아이는 안 될 거야’라고 지레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장애도, 성격도, 나이도 모두 달랐다. 게다가 글짓기 교육이 전혀 안 돼 있었다. 일부 아이는 시인 선생님이 개인 보충강의를 해서 수준을 어느 정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청각장애 청소년들은 지도교사가 수화통역까지 동원해 가며 수업을 진행했는데 토론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장애아들의 꿈은 비장애아들과 어떻게 다른가.
“꿈을 꾸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어야 한다. 장애청소년도 뭐든 할 수 있는 세상이 돼야 한다, 이들은 무언가를 할 수 없는(disabled) 사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different abled) 사람들이라고 불려야 한다.”

고 작가는 생후 11개월에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인이 됐다. 그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다녔다. 친구들의 차별과 조롱을 모두 견뎌내며 성장했다. 초·중·고 12년 동안 그를 업고 다닌 어머니의 정성 덕분에 12년간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고3 때 의대에 지원했지만 장애인이라 입학할 수 없었다. 대신 택한 것이 국문학이다. 그는 국문학 박사까지 마쳤다. 70만부가 팔린 『가방 들어주는 아이』 등 동화책을 포함, 지금까지 약 130권의 책을 썼다. 인세만도 연간 1억원이 훌쩍 넘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