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춘추] 불행에서 기적과 푸른 희망을 끌어올리다

불행에서 기적과 푸른 희망을 끌어올리다

푸르메 재단 상임이사 백경학 동문을 만나다

2014-06-02

우리는 흔히 제2의 인생을 큰 도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되찾거나 이어가기 위해 이 도전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백경학 동문(사학·83)은 자신의 행복이 아닌 우리 사회의 행복을 위해 제2의 인생을 선택했다.

기자생활 이후 2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가족들과 떠났던 영국여행에서 백씨의 아내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게 돼 한순간에 장애인으로 살게 된 아내, 갑자기 닥쳐온 이 불행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 불행은 대한민국 장애인들을 위한 새로운 희망이 됐다. 기자에서 사업가로, 사업가에서 사회복지재단 상임이사까지, 새로운 삶에 대한 용기 있는 도전을 이어온 장애인 전문지원 단체 ‘푸르메 재단’의 백경학 상임이사를 만나 그의 인생 2막 3장 이야기를 들어봤다.

역사에 대한 애정이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지난 1983년 백씨는 서울 영동고등학교를 졸업 후 우리대학교 사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백씨는 “일단 역사 공부가 굉장히 재밌었다”며 “역사책을 많이 읽으면서 시대의 문화적 배경이나 역사적 상황 등을 알게 됐고 80년대 초 그 당시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백씨가 대학을 진학한 80년대 초는 정권교체가 급격히 이뤄지며 신군부 정권의 장악으로 격동의 사회였다. 이에 그는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역사를 이해하고 잘 아는 것이 더 밝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큰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사회의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꿈꿔오면서 사학과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 진학을 결심하게 됐다”고 사학과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다양한 학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백씨는 “학회가 활성화돼 과 단위로 신군부에 저항하는 써클을 조직했다”며 “매주 청송대에서 과 친구들과 정권에 저항하는 시위, 합숙활동 등을 진행하며 학회 활동에 매진했다”고 말했다. 학회활동을 시작으로 백씨가 지녔던 사회정의감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모든 진실을 파헤치고자 들어선 기자의 길

‘사회정의감을 궁극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은 그 진실을 파헤치고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백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에 대해 그는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를 파헤치고자 한 열정은 강했다”며 “이 열정을 토대로 기자로서 우리 사회에서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백씨는 지난 1987년 대학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CBS 방송국 사회부 기자로 입사해 본격적인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사회부 수습기자를 마치고 정치부 기자로 옮겨 가면서 정부기관과 정당에 출입하며 정계 인사들을 자주 만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해왔던 기자생활과 달리 현실은 쉽지 않았다. 그는 “모든 정보의 90%를 정부기관이나 당의 고위당직자들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 보니 그 사람들의 말을 빌려서 기사를 내는 것이 많았다”며 “기사를 위해 매일 정부기관을 출입하며 느낀 점은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대변인 같았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기자로서 국민들이 모르는 진실을 알리고자 시작했지만 실질적으로 시민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보다는 그저 기관의 입장만을 기사로 작성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기자라는 직업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안을 바라보고 본인의 생각을 글 속에 표현하지 않아야 함에도 어느 순간부터 기사에 내 주장이 강하게 실려 있었다”며 변해가는 자신의 기사에 대해 반성하게 됐다. 그가 꿈꿔왔던 기자 생활은 CBS 입사 후 한겨레, 동아일보로 이직하면서도 늘 일에 대한 회의감으로 가득 찼다.

독일 유학생활, 그리고 교통사고

기자로서 기사에 대한 반성과 자괴감으로 고민하면서 백씨에게는 휴식기가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그는 독일 통일 이후 동독과 서독의 사회통합과정에 나타난 문제점을 연구하기 위해 독일 뮌헨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그는 “정치부 기자로 외무부를 출입할 때 통일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늘 듣고 보도하면서 자연스럽게 통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며 “독일의 통일과정을 바라보며 우리나라는 어떻게 준비해 나가야 할 지를 직접 공부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유학 동기를 설명했다. 서울 언론재단에서 지원해준 학비를 받아 그는 지난 1996년부터 2년 동안 독일 뮌헨 정치학 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수학했다. 미리 배워놓은 독일어로 언어에 대한 불편함은 많이 없었지만 독일 문화에 대한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그는 “역사를 통해 알았던 독일 사람들은 굉장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는데 실제로 그 당시 독일은 인종주의적 성향이 강했다”며 유학생활의 어려움을 회상했다. 하지만 이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학업에 매진해 유학이 마무리되는 시점에「독일통일백서」를 직접 번역했고 관련 논문도 작성해 공부를 마쳤다.

그리고 귀국 직전 영국 스코틀랜드의 축제를 보기 위해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게 됐고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그의 인생을 바꿀 만한 교통사고를 겪게 됐다. 백씨는 “아이의 변이 속옷에 묻어 차를 갓 길로 세운 다음에 아내가 트렁크에 있는 속옷을 꺼내는 도중 뒤따라오던 차가 아내의 다리를 받아버렸다”며 “피가 청바지에 철철 흐르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아내는 병원에 후송됐지만 100일 동안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갈 길을 잃은 돛단배 마냥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림 속에 선택한 새로운 인생

더 이상 가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아내는 다리를 절단하는 두 차례의 큰 수술 끝에 기적처럼 살아났다. 백씨는 “귀국을 미루고 영국에서 다시 독일로 오면서 아내가 호전되길 기다렸고 아내가 기적처럼 일어나게 되면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족들과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나라의 장애인 재활센터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한 종합병원에 아내의 입원을 신청했지만 3~4개월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답뿐이었다”며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센터가 장사가 안 되고 매년 적자를 기록해 병원에서도 환자의 입원을 꺼린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크게 실망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의 사고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열악한 장애인 의료복지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백씨는 “장애인들도 하나의 인격체인데 왜 우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할까라는 생각을 했다”며 “돈을 모아 장애인들을 위한 병원을 반드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기적처럼 살아난 아내, 장애인으로 살게 된 아내를 통해 그는 장애인들이 부딪히는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됐다.

희망의 씨앗이 된 맥주가게, 옥토버훼스트

굳은 결심 후 백씨는 기자를 그만두고 지난 2002년 ‘옥토버훼스트’라는 맥주가게를 운영하게 됐다. 그리고 그 사업은 독일 유학시절 알게 된 방호권 동문(식품공학·93), CBS 방송국 후배기자였던 이원식 동문(경영·85)과 함께 하면서 날개를 달게 됐다. 백씨는 “재단설립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도중 독일에서 즐겨 마셨던 하우스 맥주를 떠올렸다”며 “경영학과 출신인 이씨와 독일 뮌헨 공과대학에서 맥주 양조학을 공부한 방씨의 도움으로 맥주가게를 운영했고 다행히 큰 성공을 거두게 됐다”고 말했다.

맥주집이 크게 번창하면서 백씨는 사업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팔고 아내의 교통사고 피해보상비의 절반을 가져와 마침내 2005년, 푸르메 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이 재단의 첫발은 장애인 치과에서 시작했다. 그는 “한 장애인의 입을 통해 민간 치과에서 장애인들의 치과 진료를 꺼리는 것은 물론 저소득층 장애인들이 치과 진료비는 큰 부담이 돼 쉽게 병원을 가지 못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며 “장애인 환자들이 치통으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고 장애인 치과 설립배경을 설명했다. 결국 장애인들의 고통을 직접 듣고 백씨는 2007년 저소득층 장애인들을 위한 민간 최초의 장애인 치과인 ‘푸르메 나눔치과’를 설립했다. 진료비 또한 저소득층 장애인분들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최대 50~70%를 감면해주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무상으로 진료를 제공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어린이 재활병원

장애인 치과로 의료지원의 꿈을 실현한 백씨는 궁극적으로 이 재단의 목표였던 통합형 장애인 어린이 재활병원 건립을 결심했다. 그는 “우리가 흔히 3대 사회적 약자라고 말하면 어린이와 장애인, 저소득층을 말한다”며 “집의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장애 어린이의 경우는 누구보다도 사회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고 그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애인 어린이 통합형 재활병원을 만들기 위해선 많은 후원이 필요했다. 물론 이미 많은 사람들이 푸르메 재단에 기부를 해주고 있었지만 재단을 운영하는 동시에 병원을 설립하기에는 재원이 여러모로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는 “대기업과 정치인 등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우리 재단이 하는 역할과 함께 설립취지에 대해 설명을 했지만 후원을 해주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재정난을 토로했다.

그렇게 병원 설립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시점에 기적이 찾아왔다. 오랫동안 푸르메 재단에 매달 50만 원씩 기부했던 쿼드디매션스 이철재 대표가 재단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알고 10억을 기부한 것이다. 이 대표의 기부를 알게 된 넥슨의 김정주 사장도 200억을 기부하면서 기적처럼 병원 건립이 실현됐다. 병원 건립의 성공에 대해 그는 “좋은 인연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의 넉넉한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백 이사가 만든 인간적인 신뢰로 결국 국내 최초의 장애인 어린이 재활병원 설립이라는 기적을 일궈냈으며 서울시 마포구에 병원 설립허가를 받아 오는 2015년에 완공 예정이다.

백씨는 “대한민국의 10%가 장애인인데 우리가 그들을 등한시하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우리 재단이 다른 기업과 지자체의 귀감이 돼 장애인들을 위한 의료지원이 더욱 많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백씨는 대학생들에게 “직업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우리 역사가 진보한다”며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성공에 대한 기준은 직업상의 지위와 재력만을 바라보며 판단하게 되는데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 대학생들이 사회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 사회를 직접 바꿔나가는 일원이 돼주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평탄한 길에서 한순간에 내리막길로 바뀌었지만 그 기로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간 백경학 이사, 그는 장애인들을 위한 큰 기적을 만들기 위해 지금도 쉼 없이 그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글 김민섭 기자 minseob2580@yonsei.ac.kr
사진 이원재 기자 e.xodus@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