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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시민들이 대신 만든 어린이재활병원 벌써 20억 적자 정부는 뭐하나

시민들이 대신 만든 어린이재활병원 벌써 20억 적자 정부는 뭐하나

[2428호]

2016-10-17

▲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가 서울 종로구 신교동 푸르메재활센터 앞 그네 위에 서 있다. 성악가 조수미씨가 기증한 이 그네는 장애를 가진 어린이가 휠체어에 앉은 채 흔들림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됐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기적의 병원’으로 불리는 병원이 있다. 지난 4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문을 연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이하 푸르메병원)이다. 푸르메병원이 ‘기적의 병원’으로 불리는 이유는 정부나 민간 기업이 출자해 만든 병원이 아니라 시민들의 후원으로 지어진 어린이 재활 전문병원이기 때문이다. 시민 1만명이 430억원을 모아 설립한 이 병원에서는 장애를 가진 어린이 수백 명이 매일 입원·진료를 받는다.

푸르메병원을 설립한 푸르메재단을 만든 사람은 백경학(53)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다. 그는 2001년 영국 여행 도중 아내가 당한 교통사고를 계기로 ‘한국에 어린이 장애인 전문 재활병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지난 10월 10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푸르메재활센터’에서 만난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의 목소리는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선진국과 후진국은 의료와 교육 분야에서 차이가 납니다. 선진국은 자국민 누구든 기본적인 의료와 교육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특히 장애인과 어린이 같은 사회적 약자를 특별히 배려하고요.”

백 이사는 기자 출신이다.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CBS, 한겨레신문, 동아일보를 거치면서 12년 동안 기자 생활을 했다. 그의 인생 항로를 바꾼 것은 2001년 영국 여행이었다. 서울언론재단의 지원을 받아 독일 뮌헨에서 2년간 연수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하는 길이었다. 갓길에 차를 대고 자동차 트렁크에서 딸의 속옷을 찾던 백 이사의 아내 황혜경씨가 느닷없이 돌진한 차에 받혔다.

중상을 당한 황씨는 생사를 넘나든 끝에 독일의 한 병원에서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이후 상태가 호전되면서 귀국했지만, 국내 병원에는 일반병동에 입원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국내 병원들은 재활병동과 재활의학과를 개설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이유는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백 이사는 당시 일을 회상하며 “하느님이 나에게 교통사고나 뇌졸중 같은 한순간의 불행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돌보라고 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백 이사는 의료법인의 전 단계로 재단법인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재산과 실적이 필요했다. 백 이사는 재산을 마련하기 위해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주위 59명으로부터 28억원을 투자받아 당시 처음으로 허가가 난 마이크로브루어리(소규모 양조장) 사업을 했다. 다행히 장사는 꽤 잘됐고 이 돈으로 재단을 설립하기 위한 종잣돈을 만들었다. 여기에 가해자와의 법적 공방에서 승리하며 가해자 측 보험회사로부터 20억 6000만 원을 받은 아내 황씨가 10억 6000만 원을 보탰다. 재단 설립허가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2005년 3월 백 이사는 푸르메재단 설립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NXC 200억 기부

백 이사는 푸르메재단의 첫 병원으로 2007년 장애인 전용 치과를 열었다. 2006년 한 모임에서 만난 장애인과의 인연이 계기였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음식이 먹고 싶은데 이가 아파서 먹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장애인은 치아가 건강한 경우가 드물다. 신체가 불편해 이를 제대로 닦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음식을 통한 영양 섭취가 어려워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날 광화문에서 청운동까지 걸어오면서 치과 32곳을 들렀는데 장애인 진료를 하는 곳이 한 곳도 없었어요. 장애인은 일반적으로 잇몸이 약해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요. 의료비 감당도 어렵고, 일반 환자들이 꺼리기도 하죠. 그래서 치과를 가장 먼저 만들었어요.”

푸르메재단의 첫 진료과목인 치과에는 백 이사의 친구인 장경수 당시 서울대 치대 교수의 도움이 컸다. 장 교수의 제자 12명이 무상으로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환자들에게 절반 가격에 치과 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푸르메센터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본격적인 후원이 시작됐다. 지금은 작고한 박완서 소설가나 장영희 교수, 이해인 수녀 등이 후원하면서 재단의 설립 취지도 널리 알려졌다. 특히 ‘딸깍발이’로 유명한 조무제 전 대법관은 현재까지도 매달 수입의 30%를 푸르메재단에 기부하고 있다.

특히 벤처기업가 이철재씨와 김정주 NXC 대표의 도움이 컸다. 미국 유학 중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이씨는 우연히 푸르메재단을 알게 된 후 매달 50만원씩 기부를 시작했다. 2012년 백 이사를 만나서 자세한 사연을 들은 이씨는 자신이 창업한 회사를 대기업에 판 자금 가운데 10억원을 재단에 쾌척했다. 이 돈으로 푸르메재단은 종로구의 푸르메재활센터를 완공할 수 있었다. 이씨의 기부는 또 다른 선행으로 이어졌다. 이씨 회사를 인수한 김정주 NXC 대표는 마침 병상에 누워 있다가 이씨의 기부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다. 백 이사의 설명을 들은 김 대표는 푸르메병원 건립 자금 430억원 가운데 부족한 200억원을 흔쾌히 기부했다.

백 이사는 푸르메병원 건립 공로로 최근 연세대 문과대 동창회로부터 ‘연문인상(延文人賞)’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모교의 명예를 빛내거나 사회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졸업생이나 전·현직 교수에게 수여되는 이 상의 올해 수상자로는 백 이사와 함께 전인초 연세대 명예교수, 한강 작가·서울예술대 교수가 선정됐다. 백 이사는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 “연문인상은 보통 연세가 있으신 분이 선정되는데 이번엔 한강 작가가 선정되다 보니 구색을 맞추기 위해 나도 선정된 것이 아닌가 한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일본은 구마다 재활병원 있어

시종일관 온화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던 백 이사는 재활병원에 대한 정부의 역할로 이야기가 넘어가자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어린이재활병원 설립은 당연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이죠. 일본은 오사카시의 25개 구마다 각각 재활병원이 있어요. 어린이 재활 병동도 갖춰져 있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어떤가요?”

재활병원은 의료수가가 낮아 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미 한 번 응급 상황을 거쳤기 때문에 병원에서 특별히 할 것이 없다. 물리치료나 작업치료 등은 의료수가가 싼 데 비해 모든 것을 비싼 인건비에 의존해야 한다. 이 때문에 다른 병동에서 거둔 수익으로 재활병원의 적자를 감당할 수 있는 상급 대학병원이 아니라면 운영이 어렵다. 백 이사는 “‘나라에서 할 일인데 당신들이 이걸 왜 하냐’는 시민들의 인식이 가장 넘기 어려웠던 산”이라고 말했다.

“4월에 문 연 푸르메병원의 적자 규모가 현재까지 20억원이 넘어요. 서울시가 7억원을 지원해줬는데, 보건복지부는 전혀 지원을 안 해주죠. 선례가 없고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게 이유예요. 아니 국내에 없는 어린이 재활 전문병원이니까 당연히 선례가 없죠. 그럼 ‘선례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해도 요지부동이에요.”

백 이사는 “현재 국내 장애아동이 30만명”이라며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인식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하루 500명이 진료받고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을 세웠으니 일차 목표는 이룬 셈”이라며 “전국 주요 거점마다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이 입원할 수 있는 어린이 재활병원을 짓는 것이 향후 목표”라고 말했다.

배용진 기자 max@chosun.com

출처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428100017&ctcd=C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