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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을 극복함에 대하여

이젠 집전화가 걸려올 때가 거의 없으니, 가끔 아침에 전화벨이 울리면 대개는 친정엄마의 전화다. “오늘 밖에서 차 조심하고 집에 빨리 들어와라”고 하는 건 밤새 엄마의 꿈자리가 사나웠다는 뜻이다. “오늘 뭔 일 있니”라는 말은 엄마 집에 들러줬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이거다.
“지금 아침마당 보고 있니? 거기 ○○ (아들 이름) 같은 아이가 나오니 봐라.”
그리고는 내 대꾸 듣기 전에 후딱 전화를 끊는다. 내가 싫은 소리로 대거리를 하기 때문이다.

장애극복담이라는 것

산 정상에 올라선 사람

세상에는 왜 그렇게 성공한 발달장애아이가 많은지, 왜 그렇게 재주 많은 자폐아이가 많은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한결같이 ‘아침마당’에 등장해서 모두를 감동시킨다. 내가 어이없는 건 이거다. 그렇게 자주 장애아이 이야기가 나와서 감동을 주는데, 주시청자층의 장애인식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훌륭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감동을 받는다. 그들의 빛나는 의지가 아름다워서이다. 하지만 발달장애의 ‘장애극복담’에 오면 얘기가 다르다.

발달장애란 그 당사자가 자신의 발달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악기연주에 소질이 있어서 연주를 즐긴다면 그건 그 자신에게 축복이다. 달리기를 좋아해서 바람을 가르며 매일 달린다면 그에게 축복이다. 즐겁게 일상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그가 악기연주를 못하는 장애, 달리기를 못하는 장애가 있었던 게 아니다. 그러니 그가 극복한 것은 그의 장애가 아닌 것이다. 그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장애가 아니라 그가 맞서고 있는 사회다. ‘장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건 그 자신의 장애 때문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놓은 사회’ 때문이지 않은가 말이다. ‘극복하라’, ‘넘어서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그래서 심사가 꼬인다.

장애라는 종족

그 말 속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잘못된 이분법이 들어있다. ‘사회는 정상이고, 너희는 비정상. 그러니 본인들이 알아서 비정상을 극복하고 정상이 되어라’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존재에는, 적어도 생명 존재에는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하는 게 있을 수 없다. 모든 생명은 ‘내추럴’인 점에서 정상, 비정상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 비정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은, 그러니까 ‘내추럴’을 벗어나는 것은 오직 인간 사회뿐이다. 그러니 장애를 가진 아이와 그 가족이 극복해야 할 대상은 장애 그 자체가 아니라 장애를 갖고 살아가기에 불편한 이 사회이다.

계단 맨 아래에 앉아 움츠리고 있는 사람

친정엄마의 말에서 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누구 같은 애’라는 말이다. 그냥 ‘장애를 가진 애’라고 하거나, ‘자폐아이’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누구 같은 애’라고 하는 게 영 마뜩찮다. 마치 엄마 자신과는 아주 다른 별난 종족이라도 있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아서다. 물론 ‘자폐’니 ‘장애’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맘에 걸려서 돌려서 말하는 거라고 이해하지만, 어쨌거나 그 속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고, 그런 구분이 불편하다.

생물학적으로 사람이 뭐 얼마나 분화된 종족이라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 구분할까. 침팬지와 사람은 유전자가 단지 1.23퍼센트 다를 뿐이고 사람은 유전적으로 모두 같은 단일 종족이니, 장애를 가진 종족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동성애종족이 따로 있는 게 아니듯이.

장애란 우리 아이의 일부이지 전체가 아니다. 우리 아이의 존재 자체가, 삶 자체가 몽땅 장애인 게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특별한 종족이 아니라 온전히 사람종족인데 다만 세상 살기에 좀 불편한, 자폐라는 특수한 성향을 일부 가졌을 뿐이다. 그 불편함이라는 것도 실은 아직 우리 사회가 자폐까지도 수용할 정도로 유연하고 염치 있고 세련된 시스템을 아직 못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엄마는 이제 ‘누구 같은 애’라고 하는 말은 이제 그만 하시라. 이렇게 구구절절 여러 말을 쏟아내야 하는 번잡스러움을 짐작하신다면 말이다. (물론 이걸 짐작하실 리는 없다. 우리 엄마는 이런 말들을 맘 상하지 않게 조곤조곤 얘기해주는 상냥한 딸을 두시지 못했으니.)

내추럴한 장애, ‘내추럴 디스오더’

위에서 ‘내추럴’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다. 올 여름 보았던 다큐를 하나 소개하려는 뜻에서다. 해마다 교육방송에서 ‘국제다큐영화제’라는 걸 한다. 좀 과장하자면 이게 열리는 일주일이 내겐 일 년 중 가장 행복한 주간이다. ‘내추럴 디스오더’(덴마크·네덜란드 작품)는 올해 대상작의 제목이다. ‘디스오더’는 장애라는 뜻인데, 거기에 ‘내추럴’이 붙었다. (선천적 장애라는 뜻이 아니다. 선천적 장애는 ‘컨저니털 디스오더 congenital disorder’다.) 자연스런 장애? 특별하지 않은 장애? 왜 ‘내추럴’이 붙었는지는 영화를 다 보고나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다큐 ‘내추럴 디스오더’ (출처 : EIDF)
▲ 다큐 ‘내추럴 디스오더’ (출처 : EIDF)

이 다큐는 야곱 노셀이라는 뇌병변 장애를 갖고 있는 청년이 그 자신의 질문을 담은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가 하는 질문은, ‘무엇이 정상인가’라는 거대한 물음이다. 그는 “내 세상에서 나는 정상이에요, 그런데 문밖에 나가면 나는 비정상이 되지요.”라고 말한다. 그의 질문의 출발점은, 사람들의 이해의 폭이 넓어질 때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하는 것의 경계가 희미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정상인가’, ‘나는 비정상인가’하고 묻는다. 그는 사회 속에 완전히 받아들여지기에는 자신이 많이 허약하지만, 그렇다고 비정상이라고 체념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평범하다(정상이다)라고 느낀다.

그는 또 이렇게 묻는다. 미래세계에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내어놓고 다른 사람들이 그 유전자를 선택해서 아이를 태어나게 한다면, 그 때에 내 유전자는 선택을 받을 것인가. 미래에 의술이 발달해서 나의 뇌병변 장애가 없어진다면, 그때는 내가 정상성의 범주에 들 것인가, 그리고 그때라면 나의 유전자는 선택될 것인가. 꼭 꼬집어 이렇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야곱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는 셈이다. 그 때 선택받지 않는다면, 지금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답은 거짓 인사치레인 것이다.

다큐 ‘내추럴 디스오더’ (출처 : EIDF)
▲ 다큐 ‘내추럴 디스오더’ (출처 : EIDF)

한 청년이 ‘나는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세상에 던지고, 편견에 저항하는 이 용감하고 아름다운 다큐를 보면서 나는 무한히 감동했다. 물론 다큐영화 자체로서의 완성도가 무척 빼어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청년의 고뇌에 찬 질문에 완전 몰입이 되어버려서였다. 나는 98분 내내 마치 내가 우리 아이이자 야곱이 되어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그 질문을 같이 끌고 갔다.

야곱은 그 자신의 장애를 넘어선 것인가? 아니다. 그는 ‘무엇이 정상인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존재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며, 언제나 질문 자체로서 가치 있고 아름다운 질문이다. 장애 당사자가 자신과 세상에 던지는 이토록 웅숭깊은 질문을 본 적이 없다.

극복은 이런 것이다.
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하지 않는 극복은 극복이 아니다.
나를 변형시켜서 경쟁사회의 틀에 맞추는 것을 극복이라 하지는 않는다.

<몇 가지 사소한 사족>
1. 그렇긴 해도 우리 아들놈 게으름은 극복해줬음 한다. 이 게으름이 장애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도.
2. 주인공 야곱은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1살 때 덴마크로 입양된 아이이다. 야곱이 우리나라에서 살았더라면 이런 거대한 질문을 담은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코. 그래서 1살 때 입양된 것을 축하하는 마음이 들었다. 조금 씁쓸했다.
3. 발달장애를 가진 열다섯 살 소녀와 세 명의 어설픈 보모는 소원하던 대로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는 그 자신의 방식대로 노래하고 몸을 흔들고 소리치고 드러눕고 하면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간을 보냈지만 ‘일반인’들은 그 자신의 편견을 ‘극복’하느라고 무척 애먹었을 것이다.

*글=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동작지회장)

김종옥 자폐성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둔 김종옥은, 가끔 철학 인문학 관련 책을 쓰지만, 가장 쓰고 싶어 하는 SF소설은 아직 쓰지 못했다. 가끔 인문학 강의도 하고 지역 내 마을사람들 일에 두루 참견하며 바쁜 척하고 지내고 있다. 쓰임과 즐김이 있는 좌파적 삶을 살고 싶어 하며, 매일같이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작> <처음 만나는 공자> <공자 지하철을 타다(공저)> <장자 사기를 당하다> <지구는 생명체가 살만한 곳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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