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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형

“밥 다 먹으면 집에 가자. 내 뒷머리칼 잔털 좀 깎아줘.”

고깃집에서 만난 형이 내게 말했다. 프랑스에서 귀국한지 열흘이 훨씬 지나 만난 형의 첫 부탁이었다. 우리 집의 형제는 본래 우리 둘뿐이다. 그러니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부탁했던 것이다.

손잡고 걸어가고 있는 형과 동생

형은 지오피(GOP)에서 군복무를 했다. 내가 장애인이라서 동생의 면제를 다 안고 가라고 배치 받은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논산 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열 명이 안 되는 군인이 지오피로 차출되어 갔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 형이었다. 그는 그 곳에서 아주 힘든 2년의 시간을 보냈다.

군대에서 전역한 뒤로는 곧장 학교를 잘 다녔다. 복학하고 나서는 매일 오전 6시면 잠에서 깨어 근처 학교 도서관으로 가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그의 취미는 매일 한 장씩 받아오는 도서관 번호표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책상 사물함 안에는 몇 칸을 차지할 만큼, 하얀 종이 영수증 그러니까 도서관 번호표가 뭉텅이로 모였다.

펼쳐져 있는 책

형은 현재 일 년 차 취업 준비생이다. 내일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었다. 어제 어느 기업 행정보조직 인턴 서류에 합격했고, 머지않아 당장 면접을 가야 한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에게 건넨 첫 마디가 고작 인턴 면접을 보러 가야 하니 머리를 깎아달라는 형의 명령조 부탁을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고 화가 났다. 고작 뒷머리칼 잔털을 깎아달라는 부탁은 유난히 싫었다.

“왜. 집 앞에 미용실 생겼다며. 거기서 깎고 가지?” 나는 성가신 듯 말했다. “아니. 내가 머리 수술했잖아. 그래서 지금은 미용실 가면 안 돼.” 그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정확했다. 할 수 없이 나는 같은 핏덩이라는 이유로 청와대 면접에 가는 사람의 뒷머리칼을 깎아줘야만 했다.

우리가 얘기를 나누는 내내, 한돈고기집의 3만 9천원 600그람짜리 모둠 고기를 땀 뻘뻘 흘리며 우리 옆에서 고기를 굽는 종업원은 불판만 바라봤다. 사장에게 지시라도 받은 듯, 절대 손님의 얘기를 엿듣고 있지 않다는 표정을 억지로 쥐어짜야 한다는 듯, 시종일관 고기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고기를 집게로 꾹 짓눌렀다. 자신의 처지만큼 조이도록 말이다. 육즙이 팡하고 불판 옆으로 튈 때마다 반팔 차림의 나는 화상을 입은 듯, 고깃기름을 몇 차례고 맞아야만 했다. 그렇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마 싫은 소리를 하거나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의 처지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아르바이트라지만, 하루 여덟 시간씩 남의 고기 불판만 바라보며 뒤집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불판 위의 고기

머리칼을 깎아준다고 약속한 뒤에는 순조로운 대화가 진행되었다. ‘외국은 어땠느냐’, ‘결혼을 하고서는 뭐할 것이냐’ 하는 그런 형식적인 대화 말이다. 아르바이트생이 고기를 열심히 구워주는 바람에 음식점에서의 대화는 길게 지속될 수 없었다. 이윽고 가게를 나와 그의 집으로 향했다. 어느 골목길을 거쳐, 4명의 여대생이 둥글게 담배를 피며 떠드는 자리를 지나, 자메이카의 향수를 억지로 담은 듯한 카페를 거쳐, 집으로 왔다. 천 맡기고 오십 더 내는 그의 집에.

실내는 깨끗했다. 그나마 지저분하게 펼쳐진 것이라고는 인적성검사 문제집 정도였다. 내가 방을 둘러보는 사이, 형은 침대에 앉아 뒷머리칼을 들어 올렸다. 두부 뚜껑을 들어냈다가 다시 닫은 벌겋게 꿰맨 자국 전체가 머리띠를 이루고 있었다. 징그럽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는 “아니 전혀. 예쁘게 잘 됐네.” 하고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뒷머리칼을 들어 올리니 야수 같은 잔털들이 보였다. 그의 두부 너머 창문을 통해서는 인근 대학교의 축제 음향 소리로 유명 팝송이 저질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덜그럭거리는 필립스 면도기 전원을 켰다. 출신이 후져 다른 필립스들처럼 ‘윙윙’하지 못하고 시원찮게 ‘잉잉’거리는 싸구려 전동면도기를 잡고, 무릎을 꿇은 채로 그의 뒤 머리통을 연신 밀어댔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에.

머리 밀고 있는 남자

머리를 미는 동안에는 양손 가득 낯설고 다소 불쾌한 진동이 느껴졌다. 왼손에는 쥐고 있는 면도기 진동이, 오른손에는 면도기 진동이 두피를 타고 올라오는 또 다른 진동이. 행여나 머리 수술 자국을 면도기로 스쳐지나갈까 두려워했었다. 우리 형제는 오랜만에 만나면 반가워하는 사이는 맞지만, 동화 속에 나올 만큼 타인의 귀감이 되는 의좋은 형제는 결코 아니었다. 특히 서로의 머리를 깎아줄 만큼 늘 가까운 사이는 더욱 아니다. 형과 나는 같은 뱃속에서 출생했다는 공통의 추억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랐다. 당연히 형제간의 성격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다른 환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둘의 과거사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 때문이었다.

내가 의료사고를 겪은 이후로 부모님은 나를 신경 써야만 했다. 처음에는 나를 죽음으로부터 살려야만 했고, 그 후에는 나를 먹여 살려야만 했다. 나는 늘 엄마 품에 안겨 서울에 있는 병원을 자주 통원했다. 나의 유년기 많은 시간 동안 형은 이모 집에 머물며 길러졌다. 나보다 고작 두 살 많은 형은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릴 재간도, 여유도 보장받지 못했다. 식구 모두가 장애인 동생만을 챙겼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무관심함 속에서 어른스러워지기를 강요받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스스로 과묵하고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어머니가 출근하시면 유치원생 아이는 제 동생을 돌보며 TV를 보다가 저녁 6시가 될 때쯤 경양식집이나 한식집에 전화해 항상 동생 몫까지 두 그릇씩 주문했다. 그에게 있어 오늘 저녁에 설렁탕을 먹던지, 함박스테이크를 먹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제 먹지 않은 음식을 새로이 찾아 주문해 동생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퇴근길의 엄마와 아빠를 얌전히 기다리는 것만이 그의 임무였다.

눈물방울

나는 형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어른스러운 노릇을 흉내 내며 면도를 시작하기까지도 그 과거가 생각나지 않았다. 시커먼 머리숱 사이에서 벌겋게 익어버린 수술 자국 일부를 보며, ‘아, 그간 형이 너무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동시에, 지난 10년, 20년 전의 생각들이 무수히 되살아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프다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면도 좀 시켜달라는 과묵한 형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그러니까 나의 장애는 얼마나 그의 솔직한 감정들을 억압했을까. 그의 성숙함을 강요했을까.

면도가 끝난 뒤, 능숙하게 기계를 턱턱 털어 먼지를 제거하고 그는 다시 집 밖을 나섰다. “잠깐 집 앞 카페에서 면접 준비하고 올게. 늦을 테니 먼저 자고 있어.” 끝까지 나를 먼저 챙기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가 현관문을 닫고 나간 뒤로, 나는 한동안 의자에 기대어 울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형이 미워서. 내가 미워서.

*글= 변재원 작가

변재원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했고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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