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하기! 불란서에서

내일(8월 23일)이다. 내일 점심때쯤이면 우리는 불란서로 간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아니면 더 오랜 시간이 될지, 그보다도 못 할지, 다른 대륙에서의 시간은 이제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다. 정말 하늘밖에 모를 긴 미래이다.


나는 한국 나이로 스물세 살이다. 나와 함께 떠나는 내 여자친구는 한국 나이로 스물다섯 살이다. 교제를 시작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어린 두 관계지만, 우리는 사귀기 시작한지 몇 달째부터 나가보자는 얘기를 심심찮게 했다. 스무 해 넘게 지체장애인으로 살아오며, 가방 하나 들고 걷는 것조차 벅차했던, 어릴 적에는 초등학교에서 집을 오가는 길마저 힘들어했던 내가 이만큼 자라, 새로운 인연을 만나 전혀 인연 없는 타국 땅을 밟게 되었다.


비행기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지 걱정이 되어 잠들지 못한 적도 많다. 아무리 복지국가라는 얘기를 들어도 장애인이기 이전에 외국인인 나에게도 그 복지와 관용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대부분이었다. 동양인이라 차별받지는 않을까, 서구인에 비해 조그마한 체격 때문에 무시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를 수십 번 수개월이었다.


그러나 망설일 때마다 여자친구는 나를 두려움으로부터 이끌어냈다. ‘그래. 함께 간다면 내가 장애인일지라도, 작은 체격의 사람일지라도, 동양인일지라도, 어떤 차별을 받을지라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하는 확신이 생겼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출국을 계획하게 된 것은 지난 5월부터였다. 네덜란드 로스쿨 입학을 앞두고 있던 여자친구는 누가 봐도 모든 계획이 뜻대로 되어만 가는 사람 같았지만, 정작 그녀는 로스쿨에 합격하고도 고민에 빠져있었다. 앞으로 로스쿨에서 공부할 형사정책이 정말 가장 공부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나와의 관계도 문제였다. 집도 절도 없는 내가 네덜란드로 갈 수는 없었을 뿐더러 체류 비자가 나오지도 않았다. 즉,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는 로스쿨에 진학해 혼자 학업을 이어가야 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는 이미 한국-네덜란드 장거리 연애를 하면서 오직 카카오톡 정도로만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연애를 지속해왔다. 그러한 삶을 앞으로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둘에게 있어 일종의 절망과도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애를 이유로 본인이 꿈꾸던 로스쿨을 포기하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주간 우리는 티격태격 싸웠다. 몸이 멀어지니 마음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가까워질 도리가 보이지 않으니 관계가 개선될 여지도 없었다. 이렇게 조금씩 시들거나 악화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동안 대화도 하지 않다가 그녀가 어느 날 내게 먼저 말했다. “재원아. 나 그냥 로스쿨 안 갈까봐.”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내 마음이 편해지기는커녕 더욱 불쾌했다. 나 때문에 안 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이었다. “로스쿨은 안 가지만, 불어 공부하고 싶어. 유럽에서 살면서 느낀 건데 이곳에서는 불어를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 영어만큼 말이야. 난 아직 불어를 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배우고 싶어. 우리 아무 생각 없이 불어 배우면서 1년간 고민해보자. 앞으로 어떻게 살지.” 그것이 우리가 불란서로 가게 된 첫 대화였다.


선택지


당시 그녀의 물음은 기분 좋은 제안과도 같았으나 나에게는 막막한 제안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나는 불어를 왜 배워야 하는지, 불란서가 왜 좋은지에 대해 크게 생각해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예술을 전공하며 불란서 예술작품들에 대해 배우고 감동받기는 하였지만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체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별개의 얘기였다.


두 번째로 나는 아직 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해외에 나가서 공부를 하거나 산다는 생각은 해본 적조차 없었다. 그러한 삶을 동경하거나 딱히 바란 적도 없었다. 아무리 요즘 살기 힘들고 어렵다고 하나 어찌되었던 내가 나고 자란 이 곳보다 더 편한 곳이 있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또 유럽의 물가가 비싸서 유학을 하게 되면 비용이 많이 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곧 있으면 은퇴를 앞두고 있는 아버지의 경제 사정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가 함께 다른 대륙에서 살 것이라고 상상하기 시작한 순간, 함께 어느 국가 어느 동네에서 살 것인지에 대해 농담처럼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실제 욕망은 더욱 커져갔다. 나도 여자친구도 대학을 졸업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삶과 문화를 지닌 곳에서 살아본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았다. 미래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 젊은 우리로서는 이 계획이, 이 선택이 후회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태어나 한 번도 대한민국 밖을 나가 살아본 적 없는 내가, 20살 대학 입학 전까지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섬사람인 내가 이제는 또 다른 대륙에서, 다른 것을 보고 자라며 나의 20대를 보내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수영


여자친구와 함께 타지에 살며 부모로부터 홀로서기에 도전한다면, 밖에서의 경험이 어떤 식으로든 내면의 변화를 만들 수 있다면, 또 장애인으로서 해외에 나가 살며 그 곳의 정보를 또래 장애인 친구들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긴 계획은 값진 것이라 생각했다. 불어가 우리나라에서 많이 쓰이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언어연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불란서로 가야겠다는 확신이 든 순간부터 여자친구와 나는 우리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파리가 아닌 체류비용이 적게 드는 시골 도시를 찾기 시작했다. 비가 많이 내리지 않고 날씨가 따뜻한 지역이 목발을 짚고 다니는 내가 살기 편한 환경이라는 점도 함께 고려하게 되었다.


우리의 터전을 찾아 헤맨 끝에 불란서의 국경지대 인근 도시 ‘페르피냥’을 발견했다. 수도인 파리와는 800km거리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물가가 저렴하고 지중해와 피레네 산맥을 끼고 있는 조용한 도시였다. 또 날씨가 따뜻하고 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오는 도시였다. 시골인 만큼 이곳의 물가는 내가 사는 서울보다 저렴한 수준이었다. 현실적으로 체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페르피냥을 가기로 마음을 먹은 후, 생활비 등 예산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이를 토대로 부모님께 솔직히 말씀드렸다. 2년간 월 100만원 지원을 조건으로 허락받아 갈 수 있었다. 100만 원 예산에 맞춰, 월 30만 원 정도의 어학원을 다니고, 30만 원 정도의 월세를 구하고 나머지 40만 원은 생활비로 사용하기로 약속하는 등 세부적인 계획을 여자친구와 함께 세웠다. 이렇게 지난 3개월 동안 준비한 끝에 바로 내일 출국하게 되었다.


공항


불란서에서 어떤 삶이 펼쳐질지 아직 잘 모르겠다. 복지국가라고 막연히 환상을 가지고 갔다가 인종차별 등에 시달릴지, 소매치기나 강도를 만났을 때 어쩌지도 못하다 당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한 상상이 먼저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불란서여서만이 아니다. 앞으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내게 있어 홀로서기는 어느 곳에서나 큰 도전임이 분명하다. 부모님의 도움으로부터 서서히 일어서는 것, 내 스스로 미래를 계획하고 살아가는 것은 불란서여서 어렵고, 한국에서는 쉽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성인 장애인에게 자립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의 칼럼을 통해 유럽에서의 장애인 복지 정책에 대해 전하고 또 나는 어떻게 홀로서기를 준비하고 있는지 계속해 전하겠다. 언제나 이 글을 읽어주시는 푸르메재단 독자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욱 새롭고 즐거운 글로 함께 소통할 것을 약속드린다.


*글=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하고 있으며,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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