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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되는 사람들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참 적응하기 힘든 일이다.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 말이다. 주변에서는 다 괜찮다 그래도 정작 나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나는 다리가 불편하여 목발을 짚고 다닌다. 목발을 짚은 채로는 손에 무언가 짐을 들고 걸을 수가 없다. 그래서 무언가를 옮기거나 할 때 상대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소풍을 가곤 했다. 모두들 너무도 착해서 먼저 나의 휠체어를 끌어주는 것에 대해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성공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는 단짝 친구의 도움을 받고는 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그 친구의 부모님이 화가 나셔서 우리 집에 전화한 적이 있는데, 화가 나신 이유는 친구가 수학여행 중 나의 휠체어만 미느라 정작 자신은 제대로 수학여행을 즐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물론 휠체어를 밀면서 나와 함께 즐기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자기가 따로 구경하고 싶었던 장소가 몇 군데가 있었음에도 나로 인해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친구에게 나를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번 하지 않았다. 그때는 잘 몰랐다. 타인의 배려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끼기에는 몸도 마음도 어렸다. 어려서 몰랐을 뿐이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나는 여러모로 어렸다. 장애인을 배려해주고 보조해주는 이들에게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당연한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이기적이었던 그 시간이 가장 부끄럽고 후회된다.

친구와 그러한 갈등이 있고 난 뒤, 지독히 이기적이었던 어린 나는 그때부터 타인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선의로 나를 보조해주는 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말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입학한 고등학교는 적응하지 못했다. 선생님도, 학우들도 모두 나를 우선하여 배려해주었지만, 내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장애인이 스스로 사춘기를 맞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부정이 가득 찼던 시기였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가, 왜 남들과 같지 않은가’와 같은 물음이 끊임이 없었고 항상 그 물음의 끝은 부정으로 치달았다. 친구도, 선생님도, 부모님도 모두 다 싫었다. 고등학교를 입학한지 두어 달도 안 되어 자퇴하였다.

자퇴하고 난 뒤 주변의 그 누구도 만나기 싫었다. 오직 온라인 게임이 전부였고 행복했다. 게임에서 나는 배려받지 않아도 됐다. 나는 다른 캐릭터들처럼 뛰어다니고, 공격하고, 적을 무찌르는 데 아무런 제약을 갖지 않았다. 그렇게 한 2년 정도 게임을 했다. 가정의 평화는 이미 산산조각 나있었고, 부모님은 매일 소주를 마시며 눈물을 흘리기를 반복하셨다. 고등학교를 같이 입학했던 동료들은 그새 고3이 되었고, 수능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게임밖에 없었다. 친구도 게임 세상에서의 친구가 전부였다.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데도 유일하게 나에게 연락을 주던 친구가 문득 생각났다. 그 친구에게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고 학교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친구를 만나고는 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주로 그 친구와 어울려 다녔다. 우리는 함께 밴드를 만들었고 그 친구는 기타를, 나는 베이스를 연주했다. 어딘가로 연주를 다닐 때면 보통 그 친구가 내 악기를 들어주고는 했다. 반대로 나는 마땅히 무얼 해줄 것이 없어, 그저 부모님께 용돈을 넉넉히 받아서 택시비를 내거나 혹은 분식집에 데려가 맛있는 것을 사주었다. 그것이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고마움의 표현 전부였다. 우리는 그렇게 오랜 시간 밴드를 함께 꾸렸고, 후에 서로 진학하는 대학이 달라져 헤어지게 되었지만 아직도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아 있다.

서울로 상경해 대학에 들어와서는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교수님과 동기들의 도움은 말할 것 없으며 학교 안팎의 사람들도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너무 고마우면서도 또 미안했다. 성인이라면 모름지기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들을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 대학교에서 팀 과제를 하거나 단체로 무언가를 기획하여 공연할 때면 많은 체력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나는 굉장히 허약했고 또 신체적으로도 일을 분담해 해내지 못했다. 대학교 전공으로 주로 공연기획을 배우는데, 어느 극단 혹은 프로덕션에 들어가도 나는 기획자로서 훌륭하지 못했다. 공연 포스터를 붙이는 것도 못하고, 공연에 필요한 소품을 사오지도 못하고, 배우와 스태프들을 위한 먹을거리조차 제대로 들고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 4년 중 그 절반인 2년 동안 4차례 공연 기획을 하면서 나의 자존감은 말할 것 없이 소극적이었다. 매사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공연기획이 좋아 대학에 왔음에도 과연 현실적으로 공연기획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지금도 그 물음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처럼 장애인은 생애에 걸쳐 배려와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은 주변 사람에게도, 당사자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도움을 주는 것에 익숙해지고 받는 것에 익숙해질지, 그리고 우리 장애인은 어떠한 다른 방법으로 도움에 보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들을 저마다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름대로 찾은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말을 내가 대신 하자는 것이었다. 예컨대 어느 항공사에서의 장애인 차별 문건, 혹은 대학에서의 장애인 접근권과 관련한 문제, 행정적 문제들과 같은 사안들에 대하여 먼저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의 생활이 그랬듯이, 본래 나서는 것보다 집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조용히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나서기를 좋아한다며 나에 대해 판단을 할 때면 기분이 매우 불쾌하지만, 따로 해명 같은 것을 해야 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오롯이 나를 해명하기 위해 글을 쓰고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내가 받았던 배려와 도움에 함께 화답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설픈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며칠 전에는 여자친구와 함께 홍콩 여행을 다녀왔다. 홍콩에 가기 전날 밤, 인천의 여자친구 집에서 하루 밤을 머무는데 여자친구 아버지와 술을 마시게 되었다. 사실 여자친구 부모님께 말하지 못할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 장애인 남성인 나와 연애하는 것이 보편적인 연애보다는 다소 힘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남성의 일, 여성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신체적으로 보다 건장한 남성이 했을 때 수월한 일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지 못해, 여자친구가 대부분의 신체적 일을 하고는 한다. 그것이 가사가 될 수도 있고 무언가의 짐을 운반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그녀에게도 미안하고 고맙지만, 그녀의 부모님에게도 미안할 따름이다. 따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여자친구의 아버지와 술을 한잔 하면서 홍콩 여행을 앞둔 얘기들을 나누었다. 홍콩의 국민 배우였던 장국영과 그가 출연한 영화에 대한 얘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한참을 얘기를 나누다가 밤이 늦어 취침을 하러 들어가려는데 아버지께서 문득 말을 걸었다. “목발, 아프지 않니?” 여름에는 사실 더 아프다. 겨드랑이 주변에 땀이 차서 아무래도 아프고, 또 날이 더워 얇은 옷만 입다 보니 두꺼운 옷을 입었던 것에 비해 피부와의 마찰이 더욱 심하다. 사실 목발을 짚는 내 겨드랑이 주변에는 멍이 가득하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여행 마치고 오면 목발 먼저 사러 가자.” 그가 말했다. 별 말도 아닌데 나는 그 순간 너무도 고마웠고, 또 울컥했다. 목발을 사준다는 그의 호의보다도, 그 한마디 안에 내가 장애인임을 알고 있고 또 인정하고 있음을, 그럼에도 나를 여전히 사랑해주시고 배려해주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되겠다. 네가 그 안 좋은 목발을 짚는걸 보면 내 마음이 더 아프다.” 여자친구 아버지의 덤덤한 말을 듣고는 또 다시 너무 미안해졌고 또 너무 고마웠다. 지난 시간동안 배려 받았던 시간들이 떠올랐고 나에게 힘을 주던 이들과의 만남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문득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는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장애인으로서 청춘을 보내는 것은 수월하지 않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그리고 지금 성인이 되어서도 말이다. 아마 나는 평생 이 미안함과 고마움의 숙명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내가 땅을 짚고 걸을 수 있는 이유는 역시 내게 힘이 되는 사람들 덕분이다.

*글=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하고 있으며,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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