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섹션

두 예술가 이야기

이 이야기는 지난 1년간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대화들을 기록한 일기를 발췌하여 작성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둘 다 예술과 관련한 주제의 대화를 기록한 것인데, 전혀 예술과는 거리가 먼 장소에서 이루어진 대화라는 점이다. 이처럼 배움은 뜻밖의 장소에서 찾아오며, 삶은 언제나 우연적 필연이 연속된다.

1. 2015년 5월 26일 일기 (음식점 사장님의 이야기)

한예종 후문 옛 치킨매니아 자리에는 ‘15’라고 적힌 음식점 간판이 있다. 주인장 말에 따르면 정확한 가게의 명칭은 ‘쌀롱 15’이나, ‘쌀롱’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고, ‘15’라는 간판 옆에 물고기 그림이 덩그라니 있을 뿐이다. 물고기 그림에서 예상할 수 있듯 이곳은 피시앤칩스와 감자튀김, 그리고 맥주를 파는 음식점이다. 가게가 생긴지 6개월이 지났지만, 가보지 않은 학생들이 많으리라 예상한다. 그만큼 손님이 없다. 그냥 치킨장사 하시지 뭐 하러 생소한 피시앤칩스를 하시나 안타까울 정도이다. 그러다 몇 주 전 미술작업을 하는 누나와 새벽에 그 가게에서 술을 우연히 마시게 된 계기로, 일주일에 두 번씩은 혼자 들러 감자튀김에 하이네켄을 한 병씩은 먹고 온다. 사장님과 새벽에 나눈 파리에 대한 대화가 이 가게에 애착을 갖게 만든 계기였다.

“나는 미술작업을 해요. 국민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영상매체작업 전공으로 졸업했죠. 지금은 사진작업을 하고 있고, 햇수로는 약 10년이 되었네요.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은 너무 재밌는데 지속하기가 힘들어요. 아내의 응원이 없었으면 그만두었을 거예요. 내가 프로포즈를 했을 때 아내가 결혼을 해주는 조건으로 절대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그만두지 말 것을 제게 요구했거든요. 그래서 아내 덕분에 지금도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몇 년 전까지 미대에서 조교생활을 하며 살다가 일거리도 점점 떨어지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내를 설득한 끝에 우리는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무작정 프랑스로 갔어요. 한국은 나중에 돌아오자고. 어떻게든 일단 프랑스에서 살려고요. 그때 저희가 머물던 곳이 파리였어요. 파리는 제게 아주 신세계였어요. 특히 제가 감동받았던 것은 어느 한 살롱이었는데요. 프랑스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해서, 영국 음식인 피시앤칩스를 음식으로 평가하지 않아요. 그런데 제가 몇 번 가본 파리 15구역의 그 살롱의 주 메뉴는 피시앤칩스였어요. 구역 인근에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서 먹기에는 피시앤칩스만 한 것이 없었어요. 그들은 피시앤칩스와 술을 시켜놓고는, 밤새 살롱에 앉아 토론을 했어요. 그들의 자세는 굉장히 진지하고 심오한 내용을 얘기했어요. 그때 그 순간을 보면서 ‘아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어요. 당시에는 사업 아이템으로서 바란 것은 아니고, 단지 소망이었어요.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가 소속해있던 팀의 단체 전시를 열어준다는 것이었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리움이라니. 제 일생에 언제 리움에서 전시해보겠어요. 그 연락을 프랑스에서 받고, 주저하다가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리움에서 전시를 했어요. 그리고는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차례 전시를 더 했고요. 지금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피시앤칩스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요. 이 가게를 열 때 경리단길에 가게를 오픈할지, 한예종 근처에 오픈할 지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돈을 벌기 이전에 파리에서 봤던 그 예술가들의 자세와 토론하는 그런 장을 열고 싶어서 결국 제 동생이 운영하던 치킨매니아를 접고, 같이 피시앤칩스 가게로 바꾸자고 했어요. 새로 가게를 연지는 이제 6개월이 지났고요. 15일은 동생이, 또 15일은 제가 일하면서 개인작업과 가게 운영을 병행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음식점 이름의 15의 의미는 ‘파리 15구역’과 ‘15일씩 일한다’의 15를 뜻해요.

제가 예술가로 살아가는 길 말고, 다른 길을 선택할 기회는 없었냐고요? 몇 번 있었죠. 저도 일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찾아왔었는데, 그때마다 생각한 건 그래도 지금 작업하는 것이 재밌고, 또 내가 작업하는 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을 적당히는 할 수 있지만, 내가 작업하는 것만큼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어요. 그리고 그 일이 과연 행복할지 잘 모르겠고요. 그래서 작업을 계속 하고 있어요. 세상이 고약하지만은 않은 것이, 이러다 죽겠다 죽겠다 싶을 때면 어디선가 구원의 손짓을 한 번씩 보내주더군요. 그래서 아직 살아있어요.

그리고 아내의 말은 믿지 마세요. 아내가 제게 미술 작업을 계속하라는 결혼의 조건이 결코 가난하게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작업도 하고 돈도 많이 벌어오라는 뜻이에요. 그걸 깨닫는데 오래 걸렸어요. 아, 그래서 시작하기는 했지만, 장사가 쉽지 않아요. 평소에 제가 500cc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데, 그래도 우리 피시앤칩스와 어울리는 맥주를 찾겠다고 전국을 다 돌아서 지금 이 맥주들을 세팅하게 되었어요. 여기 있는 인디카도, 하이네켄도 다른 술집과 비교하면 저렴한 편인데, 학생들이 카스 맥주와 가격을 비교하니 아무래도 비싸다 느끼는 것 같아요. 충분히 이해가 가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나 때문에 동생도 어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가끔 걱정이 되기도 하구요. 동생은 호텔 주방장으로도 일했던, 음식을 아주 잘하는 친구에요. 그런데 치킨매니아를 운영하며 밤낮으로 혼자 오토바이 타고 치킨 배달하러 가는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결국 그만두게 하고, 지금 이 가게를 함께 차리기는 했는데 전처럼 잘되지는 않네요. 한편으로는 그래도 여유로우니까요… 아무튼 여러분도 작업은 그만두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만큼 하세요. 그렇게 하다보면 돼요.”

대화를 마친 그다음 주, 비 오는 날 다시 가게에 들러 감자튀김 하나와 하이네켄 한 병을 먹으며 가게 밖을 보는데, 비 냄새에 맥주-감자튀김 조합이 익숙한 동남아시아 풍경이었다. 내가 전에 파리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면, 그 순간이 파리다웠다고 말하겠으나, 가본 곳이 동남아시아뿐이라 동남아시아 같았다고 표현하겠다. 아무튼 이국적이라는 의미이다.

2. 2014년 9월 19일 일기

작년, 미대 다니는 친구와의 약속이 있어 서울대학교로 가는 길에 있었던 일이다.

“아저씨, 서울대학교 MoA 미술관으로 가주세요. 오늘 거기서 예술대학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어요.”

“아… 학생 예술을 전공하나 봐요? 그렇구나. 내 동생도 미술하는데… 지금은 화가에요. 이름은 최병수예요. 네이버에 검색해봐 봐. 그거 뭐라고 하더라.. 신체미술인가..(설치미술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그걸 해요. 학생처럼 서울대를 다닌 건 아니고(서울대를 다니고 있다고 오해하신 것 같았다.) 중졸이에요. 이 놈 친구들은 다 홍대 미대 출신들인데… 이놈은 열여섯 살에 가출한 거예요. 그리곤 산속에서 목수생활을 시작한 거죠.

그렇게 몇 년을 산속에서 살다가, 서울에 자취방을 얻어서는 홍대 미대생들이랑 매일 어울려 다녔어요. 하루는 성북동 달동네 담벼락에다가 저들끼리 낙서를 막 해놓았다가 경찰에 잡혀갔어요. ‘사상이 불온한 자’라는 이유로요. 아마 민주화 데모 뭐 이런 낙서를 했던 것 같은데, 저는 그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몇 년 만에 동생을 경찰서에서 만났죠. 제가 보증인 사인을 하고 구금된 동생을 데리고 나왔어요. 그때 동생이 말하더군요. “형 나 오늘부턴 관제화가야” 그게 무슨 소린고 하니, 심문조사 과정에서 네 직업이 무어냐고 묻는 경찰 질문에 “나는 목수요”라고 진술한 거죠. 당시에 그림은 화가만 그리는 거였기 때문에 “목수가 그림 그리는 게 말이 되냐. 오늘부터 네 직업은 화가인거다”라고 말하고는 신상명세기록장에 직업란을 화가라고 기록해준 거죠. 국가에서 인정한 화가가 되었다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어휴 정말 이 답답한 놈을 그냥…

그러고 한때는 자취방에서 미대 놈들이랑 같이 버스 승차권을 그림으로 잔뜩 그려다가 버스도 공짜로 막 타고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이야. 이 가짜 승차권이 아무리 그림이지만, 정말 구별하기 힘들더군요. 그때 동생이랑 같이 승차권 그리던 두 놈 중 한 명은 교수로, 한 명은 조폐공사에 갔어요.

아무튼 동생은 계속 학생 민주단체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림을 그렸어요. 옛날에 이한열, 박종철 장례식 날 상여에 매고 간 그림도 다 동생이 그린 그림들이에요.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가, 지리산에 들어가서 몇 년간 뭐 또 이상한 걸 막 만들더니 팔기 시작하더라고요. 그 작품을 전 대통령도 구매했고… 아무튼 소질은 있나 봐요.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었죠. 이놈이.

그때당시 몇 억쯤 번 것 같은데 다 환경단체에 모두 기부하고는 지금 오십 살 넘어서 여수에서 짝을 만나서 여수에 살고 있어요. 그림도 자기 작업실에서 계속 그리고 있고요. 아무튼 학생도 나중에 한번 내 동생 이름을 검색해 봐요… 그새 목적지에 다 도착했네… 여기서 세워주면 되나요? 네~ 택시 요금은 삼천 육백원입니다. 가방 놓고 가지 말고 천천히 내려요. 그래요. 잘 가요.”

*글=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하고 있으며,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기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