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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의 인턴십

지난 하반기부터 올 1월까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인턴십을 하게 되었다. 공감은 공익변호사들이 모여 구성한 법률재단으로써 소수자와 약자를 위한 공익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비록 법학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장애인으로서 평소 사회에 잔재한 소수자 차별을 방관할 수 없었다. 작년 한 항공사로부터 비행기에 탑승하는 조건으로 서약서를 강요받았던 이후부터 차별의 피해자가 당장 내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 그때부터 장애인을 비롯한 인권 분야 특히 법률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느꼈다. 두 달 후, 공감 자원활동가(인턴) 하반기 모집 공고에 지원한 끝에 합격했다.

공감은 공익인권소송의 전 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크게 ‘성소수자’, ‘국제인권’, ‘장애인권’, ‘취약노동’, ‘여성인권’, ‘공익전반’ 등으로 나누어진다. 인턴은 약 20명 내외로 담당 변호사 혹은 실장을 도와 소송 관련 자료 수집 및 홍보, 대외행사 기획 등을 돕는다. 나는 그 중 장애인권 분야를 맡게 되었고, 담당자는 염형국 변호사님이었다.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번 인턴십이 내 첫 사회생활에서의 합격통보였다.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대부분의 인턴십 혹은 아르바이트에서 채용될 수 없었다. 그나마 내 지체장애와 무관한 피자헛 콜센터에서 텔러로 잠깐 일했었지만 그조차도 오래 일하지 못하고 나왔다. 이번 공감이 내 첫 근무지인 만큼, 장애인 인턴을 채용해준 회사인 만큼, 또 모두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을 가질 수 있는 훌륭한 직장인 만큼 더욱 성실히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애인권 파트에는 인턴 4명과 변호사 1명이 함께 팀을 이뤄 각자 맡은 파트들을 조사했다. 예컨대 유엔 장애인협약 건을 번역한다거나 소송이 진행되기 전 사전 자료를 모으고 구성하는 방식의 일들이었다. 비영리 공익재단에서의 상황은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무료로 법률 자문을 도맡고 공익소송을 동시에 몇 건씩 진행하기 때문에 구성원 분들께서는 오직 한 사람의 의뢰인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건의 사건을 맡아야만 했다.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무실의 상황도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3층에 자리하고 있어서 억울한 사연을 지닌 장애인 당사자가 정작 사무실을 직접 방문할 수 없어 보였다. 만약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상담을 요청하면, 보통 사무실 밖에서 따로 자리를 갖는 식으로 진행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나는 주 2회 일하며 자료를 수집하거나 홍보영상을 만들었는데 때론 상담 관련 의뢰 전화를 응대하기도 했다. 전화는 하루에 많게는 수십 통씩 울렸다. “안녕하세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입니다.”라고 수화기 너머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대다수의 발신자들은 다급하게 자신의 사연을 이어나갔다. 언젠가 할머니 한 분이 전화하며 “거기가 나같이 힘들고 약한 사람을 위해 도우는 그 곳 맞지요?”라고 하셨다. 통화를 하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 이 통화를 하기까지 할머니께서 어떻게 말을 이어나가야 할지 얼마나 고민하셨는지 모두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보통 스스로를 ‘힘들고 약한 사람’이라고 호칭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힘들고 약한 사람이라 호칭하는 할머니에게, 어떤 사연을 가지고 전화주신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그때 그 수화기 너머의 슬픔 그리고 허전함은 잊을 수 없다.

상담 의뢰와 관련한 통화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법률 자료 조사를 하면서도 슬픔과 답답함은 끊이질 않았다. 어떻게 이런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단지 한 사람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고통 받고 있는지 생각하고 느낄 때면 업무 중에도 숨이 턱턱 막혔다. 남 얘기가 아니라 나의 가족, 친구들과 같은 이웃의 얘기라고 생각할 때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다 담당 변호사에게 이러한 사건들을 연속해서 진행하다보면 마음이 힘들지 않은지 물어보았다. 그 분은 이러한 감정을 감수성이라고 표현하며 그러한 감수성이 오래 머물 때면 본인 또한 피해 당사자만큼 힘들고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힘든 내색을 할 수 없었다. 피해자 분들을 대신해 법률 자문을 맡은 한 사람의 변호사로서 이 사건에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담당자가 마냥 힘들고 아파하기만 하면 사건은 전에 비해 아무 것도 나아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함께 힘들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담담하게 맞서야만 했다. 그것이 변호사의 숙명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공익변호사는 인권 감수성을 갖고 누구보다 따뜻하게 의뢰인에게 다가가되, 때로는 거리를 두고 객관적 시야로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다. 중간에 지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변호하는 사람들이었다. 컵라면을 먹으며 밤을 지새우고, 사건 관련 자료 더미 속에 파묻혀 살며, 현장에서 직접 그들의 손을 함께 잡아주고, 각종 토론회 및 발표회가 열리는 날이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발표해 더 나은 정책이 입안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그들 삶의 전부였다. 어릴 적, 변호사가 되면 외제차를 끌고 다니고 휘황찬란한 아파트에 살며 남들 위에 군림하는 권위적으로 되는 줄 알았다. 아니, 변호사는 그러한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세상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이 변호사였다면, 세상 가장 아래 있는 사람 또한 변호사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에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운 3층 사무실에서 일하면서도, 인턴을 하고 있는 내게 엘리베이터가 없어 회사에 출근하기 힘들지는 않은지를 묻고, 딱딱한 의자 대신 푹신한 의자로 새로 교체하면서 본인들 이상으로 주변 사람과 이 사회를 사랑하며 그들의 일에 언제나 보람을 느끼는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음은 너무도 영광이었다.

공감은 기부후원금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후원자 분들의 기부금을 운용하고 있는 만큼 그 누구도 회사 비품을 함부로 남용할 수 없었다. 항상 최대한 아낄 수 있는 선에서 경제적으로 재사용해야 했다. 음식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대청소를 하는 일은 인턴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책임져야 할 동등한 몫이었다. 변호사님들과 함께 설거지 내기로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선풍기를 해체해 먼지를 닦을 때면 정말 훈훈한 직장이라는 자부심을 느꼈다.

나는 이곳에서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났다. 여자친구도 나와 같은 인턴이었다. 그녀는 여성인권과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았던 두 살 많은 누나였다. 사무실 출근일이 겹치지 않아 만날 틈이 없어서 종종 휴일에 따로 만나곤 했다. 대부분의 대화 내용이 사무실 얘기로 시작해 사무실 얘기로 끝났다. 요새 조사하고 있는 주제와 법률적 해석 관점에 대해 의논했고, 우리는 서로 꽤 많은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도맡은 여성인권 자료들 중에는 장애여성과 관련한 조사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턴의 대부분은 대학생이었다. 각자 담당 변호사들과 작업을 진행했지만 종종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거나 따로 만나 친목을 도모하는 등의 활동도 있었다. 공익인권 세미나를 함께 기획하기도 했다. 모두 인권과 관련한 내용에 관심이 많았다. 다수는 장래에 변호사를 지망하고 있었다. 틈틈이 로스쿨 시험을 준비하며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6개월간의 근무를 다 마칠 12월쯤이 되어서는 합격과 관련한 기분 좋은 소식들이 들리곤 했다. 아쉽게도 모두가 로스쿨 시험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다시 내년에 다가올 시험을 준비하거나 마음을 다 잡고 지금 진행 중인 일들을 마저 처리하는 데 열심이었다.

누구보다도 잘 할 것 같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성실히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멋진 나의 동료들이 불합격 소식에 낙담할 때면 괜히 속상해 내 기가 다 죽곤 했다. 하지만 공익변호사의 꿈을 저버리지 않고 다시 열심히 달려갈 것임을 확신한다. 사회를 위해 살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설령 공익변호사로 발현되지 않더라도 모두 각자의 몫에서 자리에서 해내리라 믿는다. 그렇다. 내가 일했던 공감은 크지도 않은 사무실에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근무하던 바글바글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희노애락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6개월간 공감에서 근무하며 법은 누군가를 위한 특권이 아님을 가장 크게 느꼈다. 우리 모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질서의 일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사회를 지탱하는 희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설령 자신이 법률가가 되지 않더라도 법을 알아야하고 공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기초적인 법률 상식만큼은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또 우리 사회를 지키기 위해 말이다.

이제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가 도래했다고 강하게 믿고 싶지만, 끊임없이 슬픈 뉴스를 접할 때면 아직 우리 사회는 우리의 바람만큼 완벽히 성숙하지 못한 것 같다. 비록 당장 내가 차별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회 도처의 장애인들이 아직도 빈곤에 허덕이고, 차별을 겪으면서도 말하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 현실이다.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이 땅 위에 많은 소수자들이 그렇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럼에도 타인의 고통에 마비되어 본인 삶의 안위와 행복만을 추구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이곤 한다. 스스로를 위해서도 우리는 함께 가야한다. 다함께 행복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 본인이 살고 있는 이 한정적인 시간을 더욱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함께 하기를 실천하는 것은 특정 시민단체 혹은 비영리재단만의 과업이 아니다. 우리 모두 가져야 할 도덕과 신념의 책임이다. 그러한 책임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법이다. 헌법이 무엇을 보장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우리는 어떻게 이 땅 위에서 평등을 약속받을 수 있는지, 더욱 근본적으로는 왜 사람은 평등해야 하는지 묻기 위해 우선 법을 공부해야 한다. 법에 무지한 내게 있어, 지난 6개월간 법과 함께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의 시간을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다소 산만할지언정 파편적 기억의 조각을 모두 나열하는 이유는 한가지이다. 단순히 특정 단체에 대한 격려나 칭찬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이들의 삶을 여러분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날이 갈수록 사회가 각박해진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이 사회에 온정과 희망은 남아있음을, 모두 함께 행복한 사회 만들기를 추구하고 노력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모두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일지라도 꿋꿋이 마주할 수 있는 따뜻한 인권적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끝으로 철학자인 레비나스는 그의 책 <시간과 타자>에서 이러한 말을 남겼다.

“내가 타자를 내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그를 내 손님으로 환대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윤리성이 시작되며 내 자신은 내면성, 내재성의 세계를 벗어나 진정한 초월적 주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다.”


▲ 공감 인턴들과 함께 (변재원 작가 제공)

*글=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하고 있으며,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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