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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열정을 그리다

[열정무대] 박정 작가

 

“사람들이 제 그림을 3초 이상 바라볼 때 가장 행복합니다.”

캔버스에 그려진 인물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정면이나 옆을 응시하거나 등진 채 서 있는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시선들. 인물들은 손으로 만지면 따스한 체온이 느껴질 것만 같이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어떤 작품을 봐도 3초 이상 머물게 되니 작가의 바람은 늘 이뤄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을 창조해내는 구필화가 박정 작가가 궁금했습니다.


▲ 구필화가 박정 작가가 작품 ‘또 다른 시선’ 앞에서 미소짓고 있다.

축구선수에서 구필화가로

충남 당진에 위치한 박정 작가의 화실을 찾았습니다. 집들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한적한 마을에 노란 해바라기가 그려져 유독 눈에 띄는 빨간 지붕이 박정 작가의 화실 겸 자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의 매서운 눈빛에 사로잡힙니다. “독수리는 환골탈태하기 위해 150일 동안 부리를 바위에 쳐서 뽑아내고 새로운 부리로 발톱을 뽑고 털을 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극복하죠.”라고 말하는 박정 작가. 작가의 모습과 어딘가 묘하게 닮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하던 박정 작가는 수영 사고로 목 아래가 마비되는 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키워온 월드컵의 꿈이 한 순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집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 지내야 하자 누나가 24시간 동생을 간호했습니다. 박정 작가는 옆에서 그림을 그리던 누나를 보고 입에 연필을 문 채 그려봤습니다. 사고 나서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가족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림에 재미를 붙여 미대 다니는 자원봉사자로부터 그림을 배웠습니다.


▲ 토슈즈를 걸치고 있는 뒷모습을 그린 ‘시선’ 91x65cm Oil on canvas

1995년 장애인 공모전 입선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고 권위의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포함해 다수의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더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장애인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대구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했습니다. 학교의 배려로 4년 동안 휠체어로 이동이 편리하게 설계된 교직원 아파트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욕창에 걸릴 정도로 작업에 열심인 작가 곁에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아내 임선숙 씨는 손과 발이 되어주었습니다. 박정 작가는 “손으로 그리는 동기들을 따라가야 하니까 시간 나면 그리고 또 그렸어요.”라며 대학생활을 회상했습니다.

인물의 시선을 그리고 전하다    

전시를 하면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곤 했습니다. 길이가 3m를 훌쩍 넘는 대작을 직접 그린 게 맞느냐고 말입니다. 입으로는 붓이 닿는 부분이 제한적이라 캔버스를 돌려가며 힘들게 작업해야 했던 현실을 사람들은 잘 몰랐을 것입니다. 지금은 리모콘으로 캔버스를 상하좌우로 작동시키는 장치를 개발해 설치한 끝에 이전보다는 작업이 수월합니다. 박정 작가는 자신의 작업 환경이 많이 알려져 장애‧비장애 작가 누구나 편하게 작업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 새롭게 태어난 독수리의 날개짓을 입으로 표현하고 있는 박정 작가의 모습.

장애를 입고 집에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사람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눈으로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자연히 시선처리에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뒤돌아 있는 인물에게서도 애틋함이 전해집니다. 작품명도 ‘시선’, ‘또 다른 시선’이라고 붙였습니다.

국내외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호응이 좋습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을 그린 작품은 영국인이 사갔고, 뒷모습의 여인을 그린 작품은 이탈리아인이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동료 작가와 선배 작가들이 초상화를 주문하기도 합니다.

구필화가로 새로운 삶을 그리면서부터 쉴 틈 없이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박정 작가. 2007년 예술의전당 ‘아트서울전’에 초대받은 후 매년 초대작가로 선정돼 작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국내의 내로라하는 작가 94명 중의 한 명으로서 당당히 자신의 전시 부스를 책임지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작가로 선정되면 1년 동안 관람객들에게 선보일 작품 활동에 매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트페어인 ‘마니프(MANIF) 서울 국제아트페어’에는 2012년에 이어 올해도 참가할 예정입니다. 전시회 전 날에는 긴장 탓인지 잠을 못 이룬다고 합니다. 대중에게 작품을 선보일 때의 떨림은 그림을 그리게 하는 힘이어서 입에서 붓을 떼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 같습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을 그린 ‘시선’ 33.3x53cm Oil on canvas ▲

받은 만큼 나누다… 전 세계를 누비는 초대작가 꿈 꿔

박정 작가는 1996년 세계구족화가협회의 회원이 되면서부터 매해 빠짐없이 장학금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고 한 단계씩 나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쉽게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3년 동안 작업한 성과물을 보내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림으로 자활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 작가 부부는 많은 도움을 받아 사회에 빚을 졌다는 생각으로 나눔에도 적극적입니다. 어려운 환경의 어린이들도 후원하고 주변에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일찍 단념하는 장애인들을 볼 때 안타까워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죠. 한 단계 나아가면 더 나은 다음 단계가 나오니까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지적장애인들을 위해 조만간 미술 수업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 ‘비상’ 162×130.3cm Oil on canvas

200회 이상의 개인전과 단체전 이력을 쓰는 지금, 다음 작품이 궁금해집니다. “목 아래로는 감각이 없어서 머리만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사람은 날고 싶다는 꿈을 꾸곤 하는데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그리면 재밌을 것 같아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죠.”


▲ 박정 작가의 화실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들. 영화배우 안성기와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의 초상화가 보인다.

이루고 싶은 꿈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가 되어 작품을 알리고 판매해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죽고 난 이후가 아닌 살아있을 때 작품이 의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느끼며 사물을 인지해가며 그림을 그릴 수 있어 감사합니다.” 무엇을 하든 매순간을 감사의 연속에서 살아간다는 박정 작가의 입이 붓은 오늘도 열정적으로 움직입니다.

*글, 사진= 정담빈 간사 (커뮤니케이션팀)
*작품 사진= 박정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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