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백의 길] 차(茶)안에 녹아있는 부처의 진리를 마시다 (4)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강진기행 (4편)

차(茶)안에 녹아있는 부처의 진리를 마시다


▲ 백련사 (출처 : blog.daum.net/dolpak0415/11762229)
▲ 백련사 (출처 : blog.daum.net/dolpak0415/11762229)

'마음을 나눌 벗이 있다면 저승길도 외롭지 않다.' 다산이 긴 귀양살이에서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이 있었고, 곁에는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제자들이 있었다. 세 번째로, 학문을 사이에 두고 담백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문우(文友, 염수지교 淡水之交)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친구들이 있었으니 바로 종교와 나이를 뛰어넘어 서로 그리워했던 당대 고승과의 만남(忘年之交)이다.


다산초당이 자리 잡고 있는 백련산(白蓮山, 일명 萬德山)안에는 통일신라시대(839년) 창건된 천년고찰 백련사(白蓮寺)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절의 본사(本寺)가 30킬로미터 떨어져있는 해남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이다.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창건된 학승 배출의 요람이요, 품격 높은 불교문화의 본산이다.


다산이 귀양살이하던 시기, 백련사와 대흥사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두 명의 걸출한 스님이 기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백련사에 머무르고 있던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이다. 전남 무안사람으로 열다섯에 나주 운흥사(雲興寺)에 출가한 뒤 19세 대흥사(大興寺)의 완호(玩虎) 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와 초의라는 법호를 받았다. 속명은 장의순(張意恂).


▲ 초의선사의 초상화
▲ 초의선사의 초상화

▲ 초의선사의 동상
▲ 초의선사의 동상

초의는 우리나라 차문화를 만든 성인(茶聖)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차관련 서적이자 중국의 육우가 쓴 ‘다경(茶經)’에 견줄 만한 ‘동다송(東茶頌)’을 썼다. 당대 조선을 대표하는 13대 대종사(大宗師)로 이름이 높았으며, 시서화(詩書畵)에도 능해 당대의 시승(詩僧)으로, 탱화도 잘 그려 당대 최고의 금어(金魚, 그림 그리는 승려)로 불리웠다.


24살의 청년 초의가 우연한 기회에 자신보다 24살위의 대학자 다산을 만나면서 '심청이 목소리에 놀라 심봉사 눈뜨듯' 새로운 학문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다. 다산의 학식과 인품에 감복한 그는 ‘죄를 자복하듯’ 다산에게 발아래 무릎을 꿇은 뒤 제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다산은 남긴 글에서 초의를 평하길 ‘남루한 옷을 입고 민둥머리를 가진 중의 껍데기를 벗기니 유생의 뼈가 드러났다'고 하여 초의의 높은 학식을 칭송했다.


다산 또한 초의를 만나면서 인위적인 형식에 매여 있는 유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불교철학의  깊이를 이해하면서 빠르게 불교에 귀의해 갔다고 전해진다. 천주교를 믿은 결과 명예와 권력과 가족을 잃은 다산이 얼마 만큼 불교에 심취했는가 가늠할 수 없지만 초의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눈이 뜨리고 귀가 열렸다는 것은 산이 남겨놓은 글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이 초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조선후기 무인이며 외교관이었던 신헌(申櫶, 1811~1884)이 다산과 초의의 교류를 기록한 책인 ‘금당기주(琴堂記珠)’에 잘 나타나 있다.


다산은 사랑하는 제자 초의에게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당부한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혜(慧)와 근(勤)과 적(寂) 세 가지를 갖춰야 성취할 수 있다. 지혜롭지 못하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한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가 없고 고요하지 않으면 오로지 정밀하게 못하게 된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하는 요체이다.”


▲ 초의선사의 다산초당도. 스승 다산이 묵고 있는 초당을 그린 그림으로 초의의 구도와 필치를 엿볼 수 있다.
▲ 초의선사의 다산초당도. 스승 다산이 묵고 있는 초당을 그린 그림으로 초의의 구도와 필치를 엿볼 수 있다.

다산은 초의로부터 불교와 차문화를 배우고, 초의는 다산으로부터 유교경전과 실학정신, 시의 세계를 배웠다. 제자는  스승을 모시고 전라도 여러 곳을 여행했다. 특히 1812년 명승지 월출산을 유람한 뒤 인근 백운동(강진군 월하리)에서 하룻밤 묵으며 다산이 글을 쓰고, 제자 초의가 그림을 그린 13수의 시집 백운첩(白雲帖)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초의는 다산을 만난 15년이 되는 해에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을 세운다. 이곳에서 40년 동안 기거하면서 다도(茶道)의 교과서이자 우리 차를 칭송하는 글인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하는 등 차에 관한 수많은 저서와 시를 남기게 된다.


다산의 실사구시 정신에 크게 감화된 초의는 1815년 한양에 올라가는 길에 마재 다산의 집에 들러 정학연(丁學淵), 정학유(丁學游)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전한다. 초의가 아버지의 수제자임을 한눈에 알아 챈 형제는 초의를 흉허물없이 대했고, 초의 또한 존경하는 스승의 두 아들이 학문적으로 범상치 않음을 간파해 우정을 나누었다. 비록 한양으로 가는 초행길이었지만 학연 형제와 헤어져 동갑내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자하(紫霞) 신위(申緯) 등 지식인을 만난 초의는 유·불·선(禪)을 논하며 사상적 기반을 넓혔다.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 소치(小癡) 허련(許鍊)과도 예술적인 교류를 시작하는 등 세속과 종교를 넘나들며 사상의 폭을 넓혔다.


추사가 초의선사를 친구로 노래한 증게송(贈偈頌)을 보면 초의선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짐작할 수 있다.


 


두륜산 마루턱에 주먹을 불끈 세우고

푸름 바다 비탈에 코를 비비네

홀로 무외(無畏)의 광명을 크게 베풀며

달을 가리켜 모든 어둠을 깨뜨리는구나


▲ 대흥사 무량수각에 걸려있는 추사 현판.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려면 완도를 통해야 했다. 추사는 전주와 남원을 거쳐, 초의가 있는 해남 대흥사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아미타불(本尊佛)을 모신 전각에 붙일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을 써주고 떠났다.
▲ 대흥사 무량수각에 걸려있는 추사 현판.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려면 완도를 통해야 했다. 추사는 전주와 남원을 거쳐, 초의가 있는 해남 대흥사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아미타불(本尊佛)을 모신 전각에 붙일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을 써주고 떠났다.

초의가 다산의 학문에 반해 제자가 된 반면 추사 김정희는 직접 다산으로부터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다산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는 추사와 친구사이였다고 한다. 추사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관리로부터 받은 귀한 수선화를 귀양살이를 마치고 마재 고향집으로 돌아온 다산에게 보낼 정도로 그를 흠모하고 존경했다고 한다.


추사는 권문세족인 안동 김씨를 비판한 것이 빌미가 되어 1840년부터 8년 3개월 동안 제주도 서남쪽에 있는 대정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보통 유배가 아니라 머무르는 집 주위에 탱자나무를 두르고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형이었다.


추사가 중형을 받자 평소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발길을 뚝 끊었지만 초의는 개의치 않고 바다 건너 추사를 찾아갔다.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6개월간 함께 생활하며 추사를 위로한 뒤 해남 대흥사로 돌아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어려움 없이 유복하게 자란 추사는 초의에게 ‘왜 빨리 좋은 차를 보내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리곤 했지만 초의는 웃으며 해마다 봄이 되면 제일 먼저 나온 찻잎을 정성스럽게 닦아 추사에게 보냈다고 한다.


▲ 대흥사 전경.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된 이후 병풍처럼 둘러싼 웅장한 두륜산의 보호를 받으며 1500년의 세월을 지내왔다. (출처 : daeheungsa.kr/photo/main.asp?bseq=2&mode=view&cat=-1&aseq=1367&page=3&sk=&sv=)
▲ 대흥사 전경. 대흥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된 이후 병풍처럼 둘러싼 웅장한 두륜산의 보호를 받으며 1500년의 세월을 지내왔다. (출처 : daeheungsa.kr/photo/main.asp?bseq=2&mode=view&cat=-1&aseq=1367&page=3&sk=&sv=)

초의의 사상은 ‘차와 선이 한 가지 맛’이라는 뜻의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이다. 차안에 부처의 진리가 녹아있다는 것이다. 부처는 출가 후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라 해탈을 통해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부처에게 차를 바치는 것이 곧 선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사상이다. 고려시대 불교 연등행사인 팔관회에 차를 공급하는 다방(茶房)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조상께 제사지내는 것을 차례(茶禮)라고 부른 것도 차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좋은 예이다.(5편에 계속)


*글, 사진=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