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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백의 길] 남도 유배지에서 꽃피운 다산학 (3)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강진기행 (3편)
남도 유배지에서 꽃피운 다산학

 

▲ 다산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자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로 유네스코에 의해 2012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됐다.
같이 선정된 프랑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 독일 소설가 헤르만 헤세,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기념동판

감옥에 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이재현 CJ그룹 회장 등 구속된 기업총수들이 당뇨, 우울증, 섬망증, 협심증 등 다양한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 옛날 같으면 지존(至尊)의 위엄이 당연히 임금이겠지만 현대사회 대기업 총수의 위치는 수만 명, 혹은 수십만 명에 이르는 자사그룹 임직원들에게 옛날 임금 아래 영의정 못지않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력을 누리는 존재다. 이런 분들이 비리혐의로 감옥에만 가면 지존의 못지않은 위엄은 간 곳 없고 너나없이 갑자기 지병이 도진다. 일부는 당장 수술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는 중병에 걸려 일어날 기력조차 잃은 채 병원에 실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중병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겠지만 분명 마음의 병이 깊이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산 정약용은 어떠했을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다산(1762~1836)은 유배지에서 18년을 갇혀 지냈으

니 그 또한 마음과 몸의 병을 얻었을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젊은 시절 테러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 외딴 섬에 갇혀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래도 짧은 기간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지만 다산은 다행히 마음과 몸을 온전히 보존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 후기 개혁방안을 제시한 다산학(茶山學)을 완성시키는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 본인을 위해서나 우리 민족을 위해서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 경기도 남양주 능내 생가 앞에 있는 다산 정약용 동상

다산이 머물렀던 강진 주막은 너무 인공적으로 복원됐지만 그래도 우리민족의 최대 학자인 다산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있다. 사교(邪敎)인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참소당한 다산은 가혹한 국문과 고문으로 마음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지고 몸은 성한 데가 없었다고 한다. 몸을 겨우 추슬러 유배지에 도착한 다산은 아들에게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내 병은 다행히 약을 먹으면서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공포증으로 몸을 바로 세울 수 없던 증세도 나아졌다. 다만 왼쪽 어깨의 통증이 심상치 않구나….”

–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올곧은 사람은 어디 가든 빛을 발한다. 1801년 유배지 강진 주막에 정착한 다산이 뛰어난 학자라는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먼저 아전과 중인의 자식들이 가르침을 달라고 찾아왔다. 비록 양반은 아니지만 뛰어난 시문을 지어 다산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황상(黃裳)과 그의 동생 황지초(黃之楚), 이청(李晴), 손병조(孫秉藻) 등이 제1세대 제자들이다.

황상과 얽힌 재밌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 소년가장이던 15살 황상이 다산을 찾아와 “저와 같이 융통성 없고 앞뒤가 꽉 막힌 아둔한 사람도 글을 배울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다산은 이렇게 답한다. “외우는 것을 잘하면 자기 머리만 믿고 학문에 소홀하게 되고, 글을 잘 지으면 진중하지 못하게 되며, 깨달음이 빠르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데 너는 그 세 가지가 없으니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 이어 “항상 부지런하고, 더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세 번 부지런할 것을 역설한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이다.

▲ 다산과 제자 황상 (개암나무 제공)

다산의 말에 감복한 황상은 그날부터 열심히 공부해 《설부 雪賦》라는 시를 지어 다산을 놀라게 했고 ‘치원유고’, ‘임술기 壬戌記’ 같은 책을 써서 추사 김정희에게도 크게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평생 스승을 존경한 그는 다산이 죽은 후 한겨울에 전라도 강진을 떠나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스승의 묘를 여러 번 참배했다. 황상이 전한 다산의 모습은 이렇다. “스승이 이곳에 오셔서 18년 머무는 동안 앉아서 저술에 몰두하느라 방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늘 부지런하라고 삼근의 가르침을 내려주셨으니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하다.”

다산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교재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1804년 천자문을 대체할 목적으로 지은 ‘아학편(兒學篇)’이다. 효경, 소학 등 아동이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담은 윤리교과서인 ‘제경(弟經)’을 편찬했으며 불쌍한 농민들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의학지식을 담은 ‘촌병흑치(村病或治)’라는 책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 다산이 손을 안 댄 분야가 없을 정도이다.

 

▲ 다산의 친필 편지

이렇듯 백성의 고통을 늘 안타까워했지만 다산의 마음은 늘 외로웠다. 유배지에서 외로움을 담은 시가 전해진다.

 

 

하늘이 나를 보내 이 동산에 살게 하니
봄 잠 자고 술에 취해 사립문을 닫았노라
산속 뜨락에는 두루 덮인 푸른 이끼만이
때때로 사슴이 다녀간 흔적을 남기는 구나

– ‘茶山花史’ 중에서

다산은 유배 초기에는 인근 고을은 물론이고 집밖에도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주목받는 정치사상범으로 유배객으로 조금이도 어긋난 행동을 하면 제재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집 밖 외출조차 못한다면 그건 지옥이나 다름없다. 귀양살이가 얼마나 고달팠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다산은 그 고통을 다른 길을 통해 극복한다. 촌각을 다퉈 치열하게 생활하며 후학 양성과 저술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2~3년간 묵묵히 방에 앉아 먼저 마음을 다듬고 학문을 다듬으며 세월을 보냈다. 다산의 인품과 학문이 강진읍내를 넘어 인근지역으로 전해지면서 뛰어난 제자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유배 초기 다산을 향한 따가운 시선도 많이 누그러졌다. 이때 다산에게 중요한 사건이 생긴다. 귤동 마을에 살던 지역유지 윤단(尹慱)이 세 아들을 가르쳐달라고 다산을 초빙한 것이다. 이 것은 다산이 초기 유형지를 떠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에 학문적인 터전을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산은 이곳에 동서로 집을 짓고 지역유지인 해남윤씨 집안의 윤종문(尹鍾文), 윤종영(尹鍾英), 윤자동(尹玆東), 이유회(李維會) 등을 제2세 제자로 받아들였다.

다산은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 건물을 새로 짓고 장서 천여 권을 갖추면서 낮에는 제자를 가르치고 밤에는 저술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다. 고독속에서 자신이 꿈꾸던 머리속 이상사회의 모습을 하나둘 글로서 풀어낸다.

당시 책 한 권은 작은 오두막 한 채를 살 수 있을 만큼 귀한 재산으로 여겨졌는데 스승이 책을 귀히 여기고 애지중지하는 것을 본 제자들은 아버지를 졸라 그가 필요한 책을 선물했고 다산 또한 귀한 책이 있으면 이를 빌려 밤새 필사했다고 한다.

 

 

▲ 다산이 28살 때 한강에 놓은 배다리가 그의 집 앞에 재현되어 있다. 정조 13년(1789년) 양주에 있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길 때 다산이 한강에 만들었던 배다리. 강의 가운데 큰 배를 배치하고 점점 작은 배를
교차시켜 배열한 뒤 바닥에 널빤지를 깔고 홍살문을 세웠다. 젊은 시절 다산의 추진력과 실학정신을 엿볼 수 있다.

애제자 중 한 사람인 윤종문에게 독서와 개혁을 강조한 다산의 편지가 남아 있다. 윤종문은 고산(孤山) 유선도(尹善道)의 후손이자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고손자로 18제자 중 한 사람.

“번쩍번쩍 빛내는 좋은 의복을 입을 수 있고 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겨울에는 갖옷을, 여름에는 갈포 옷을 입고 넉넉하게 지낼 수도 있고 진수성찬을 조석으로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독서를 통해 위로는 성현을 뒤따르고 아래로는 수많은 백성들을 길이 깨우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인 것이다.”

 

다산은 자신에게 학문을 배우는 제자들에게는 “글공부를 하는 것이 자신의 입신양명이 아니라 백성을 편하게 살기 위함이니 이를 위해 과거를 보고 세상에 나가 현실개혁을 위해 노력할 것”을 신신당부한다.

다산에게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다산의 저술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가 스승이 주장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의 개혁정신을 내용으로 하는 다산학(茶山學)의 계승자라고 자부했다. 제자들의 이런 정신은 오히려 다산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 다산이 그린 담묵산수도. 말년 고향근처 한강을 유람하며 그린 것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다산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33cm X 26cm

다산은 동암(東庵)에 머무르며 14년 동안 조선후기 전 분야를 아우르는 500여 권의 저서와 2500여 개의 시를 남겼다. 그가 이렇듯 저술에 몰두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저술에 마음을 오롯하게 하고 있음은 당장의 근심을 잊고자 함이 아니라, 사람의 부형(父兄)이 되어 욕됨을 끼쳤으니 저술로라도 허물을 벗고자 함이니 그 뜻이 깊지 않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유배지에서 해가 거듭될수록 다산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고 다산의 학문이 결실을 맺게 되자 지역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역에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그를 찾아오고 비록 종교는 다르지만 불교 고승들과의 교류에 새로운 물꼬가 트면서 다산의 유배생활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4편에 계속)

*글, 사진=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
*참조= <도서> 다산기행,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절을 찾아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목민심서, 한국근대사 등
<자료집> 편지 다산의 마음을 읽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찾아서, 다산 250(천명, 다산의 하늘), 다산 시화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