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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백의 길] 다산에게 길 없는 길을 묻다 (2)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강진기행 (2편)
다산에게 길 없는 길을 묻다

대나무보다 곳곳했던 다산 정약용이지만 눈물이 많고 섬세했다고 한다. 8년의 유배생활 중 11년 동안 머물렀던 다산초당 마당에 있는 평평한 돌과 초당 뒤 샘물, 뒤편에 정석(丁石)이란 글을 새긴 바위, 초당 옆 땅을 파고 나무홈통으로 물이 떨어지게 만든 작은 연못을 사경(四景)이라 이름 붙이고 시를 지어 사랑할 만큼 다감했다. 특히 그는 거처하는 집마다 당호(堂號), 즉 집의 이름을 지었는데 특이하게 집 이름을 자신의 이름(號)으로도 사용했다.

 

 

▲ 다산 정약용의 생가

1801년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즉 고향인 마재를 떠난 다산은 11월 말 찬바람이 부는 초겨울 유배지 당진에 도착했다. 오라줄에 묶인채 한양서 천리길을 끌려온 다산은 강진읍 동구밖 당산나무 아래 도착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구경을 했을것이다. 밤이 되자 다산이 갇힌 옥문을 발로 차고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귀양객들은 대부분 권문세족으로 일반 백성들이 호랑이보다 무서워하던 양반계급이었다. 평소에는 양반을 무서워했지만 중죄인이 되어 귀양 온 양반을 보면 적개심 때문에 사람들은 문을 부수거나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는 파문괴장(破門壞墻)을 벌이곤 했다. 정약용도 한양에서 고위관직을 지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금기시하는 서양종교를 믿은 대역 죄인이니 주민들로부터의 집단따돌림과 봉변은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부모도, 임금도 몰라보는 천주쟁이’ 혐의를 받은 죄인을 감시하기 위해 강진현감으로 노론벽파의 골수 이안묵이 부임하고 있었으니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다행히 다산이 처음 도착한 동구밖 당산나무 옆에 있에서 주막집을 하는 노파와 딸이 다산을 거두어줬다. 옥에서 풀려난 다산은 그들의 배려로 주막 사랑채에 머무른다. 당호도 ‘마땅히 지켜야할 네 가지’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齎)로 지었다. 비록 험난한 귀양생활을 하고 있지만 늘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를 유지하고, 과묵한 말씨와 신중한 행동을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이곳에서 4년을 지낸 다산은 인근 보은산방(報恩山房)과 제자 이청의 집에 잠깐 머물렀다가 1808년 해남윤씨의 도움으로 차가 난다는 뜻의 茶山으로 거처를 옮겨 11년 동안 이곳에 머무르게 된다.

▲ 강진읍 동문 밖의 주막(왼쪽), 다산을 도와준 주모와 딸의 동상(오른쪽)
(출처 : blog.daum.net/sunny38/11776524,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N_CD=A0001363160)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물을 끌어다 작은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산의 동서로 작은 두 개의 집을 지었다. 당시 책은 쌀보다 귀중한 재산이었는데 지역 유지인 윤씨 가문에서 책을 보내주곤 했다. 다산은 천 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읽으며 귀양살이의 시름을 달랬다. 다산초당 옆 석벽에 정석(丁石)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는데 곧고 매끈한 글씨가 흐트러짐 없는 다산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 다산의 친서

왕뿐 아니라 조정에서는 다산이 귀양을 갔다는 사실 조차 잊혀 질 수 있었지만 다산은 다행히 1819년 이태순의 상소로 귀양살이가 해배된다. 강진으로 유배된 지 18년 만이다. 집으로 돌아온 다산은 비록 정치적으로 복권되지 못해 자유롭게 멀리 나다니진 못했지만 풍광이 뛰어난 고향 북한강가를 거닐었을 것이다. 능수버들 아래 앉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봉건제의 조선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걱정했을 지도 모른다.

 

 

▲ 등소평

(출처 : blog.joins.com/media/index.asp?uid=fragile433&folder=11)

중국을 개방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해 오늘의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끈 등소평(鄧小平)도 길지 않은 시간을 다산처럼 유배지에서 보냈다. 1966년 중국문화혁명 당시 그는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수정주의자인 주자파(主資派)로 몰려 하방조치(上山下鄕) 당하게 됐다. 등소평은 4년 동안 강서성 벽촌의 주물공장에서 묵묵히 일했다. 그런데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그가 중앙정치무대에서 활약했던 중요 정치인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게 재기할 기회가 온다면 누구를 등용해 어떻게 혁명을 완수할 것인지 생각을 다듬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 틈만 나면 마을길을 걸었다고 한다. 지금도 ‘등소평의 길‘이라고 불리는 길이 움푹 파인 채 마을에 남아있다.

 

 

▲ 다산의 생가 여유당 (출처 : blog.daum.net/segon53/14935112)

 

다산도 고향 마재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성군을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이루지 못한 개혁의 꿈을 누군가 이뤄주길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죽을 때까지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곳곳하게 살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이틀 후 부인 홍 씨도 남편의 뒤를 이어 숨을 거뒀다. 그들은 합장되어 살던 집인 여유당(與猶堂)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묻혀있다.(3편에 계속)

▲ 경기도 남양주 마재에 있는 다산의 묘

*글=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