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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백의 길] 동백꽃 떨어지는 곳에 매화가 피었더라 (1)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강진기행 (1편)
동백꽃 떨어지는 곳에 매화가 피었더라

남녘의 끝자락인 전남 강진(康津)과 해남(海南). 그 곳을 찾아가는 길은 늘 마음이 설렌다. 마을 어귀를 지날 때마다 누가 대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다. 사위 왔단 소식 듣고 버선발로 뛰어나온 장모가 “아이구 여보게, 이 추위에 천리 길을 어떻게 왔당가. 싸게 싸게 들어와서 몸 좀 녹이소!” 하고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몸을 칭칭 감는 정겨움이 서린 곳이 강진과 해남이다.

▲ 다산 정약용

유홍준 선생은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반도의 오지로 어쩌다 나 같은 답사객의 발길이나 닿은 이 조용한 시골은 그 옛날 은둔자의 낙향지이거나 유배격의 귀양지였을 따름이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이곳에 다산초당과 백련사, 고산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 월출산, 해남대흥사와 일지암, 달마산 미황사와 땅끝마을의 아름다움이 알려지면서 남도여행의 시작이자, 국토답사의 일번지가 되고 있다.”고 자랑한다.

서울내기인 내게도 이곳은 마음속의 고향 같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할 때는 겨울 햇살이 겁나게 좋았지만 충남 서천을 지나 전라도 접경인 군산에 이르자 징하게도 날이 흐물거리기 시작한다. 가는 길에 오랜만에 전남 영광(靈光) 법성포(法聖浦)를 들렀다. 스무 가지 넘는 반찬이 곁들여진 굴비 정식으로 남부럽지 않은 점심식사를 하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고개를 든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이렇게 호사를 누려도 될까. 차를 달려 40여분이 지났을까 깍아지른 기암 절벽이 떡하니 나타난다. 월출산(月出山)이다. 방랑시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이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하고 월출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드디어 강진 땅에 들어선 것이다.

강진이 보석처럼 빛날 수 있는 것은 손에 꼽을 수 없는 많은 유적과 절경이 있기도 하지만 한국 최고의 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얼마전만 해도 찾지 못해 몇 번 지나쳤을 다산초당(茶山草堂) 입구를 네비게이션의 도움으로 단박에 도착했다. 새삼 문명의 편리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오래 전 왔을 때는 분명 좁은 소로였는데 그동안 답사객이 늘었는지 입구는 차가 여유있게 비껴갈 대로가 되어 강진읍에서 출발한 시외버스가 다니고 있다. 세상이 점점 어떻게 펼쳐질 지 궁금해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노학자의 말처럼 문명은 어디까지 발전할까. 상념속에 다산초당으로 이르는 길에 접어드니 노인의 머리 처럼 여기저기 잔설이 남아있다.

▲ 다산초당

정약용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6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저술가였을 뿐 아니라 유불선 및 서학에 조예 깊은 사상가, 시인,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자이자 낡은 제도를 타파하려던 개혁가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일 것이다. 봉건체제가 붕괴되던 18세기 8대째 고위 관료를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다산. 정조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지만 조정은 당리당략을 추구하는 당쟁으로 얼룩지고 부패한 탐관오리가 백성을 들볶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개혁을 꿈꾸게 된다.

 

다산이 굶주린 백성을 보고 지은 시(飢民詩) 한편을 소개한다.

 

春風引好雨  봄바람이 단비를 몰고 오니
草木發榮滋  온갖 초목이 꽃피고 잎이 돋아나는구나
生意藹天地  생기가 온 천지에 충만해지니
脤貸此其時  지금이 바로 빈민을 구제할 때로구나

 

 

다산은 천재였지만 늘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진주 목사(牧使)를 지낸 정재원(丁裁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은 4살 때 천자문을 외웠고 10살 때 한시로 문집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22살 때 소과(小科)에 합격해 진사가 됐다. 성균관에 입학한 다산은 경전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리면서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오던 배 안에서 형 정약현(丁若鉉)의 처남 이벽(李檗)을 통해 처음으로 서양 종교인 천주교 교리와 서양 학문을 접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관심이 나중에 그의 운명을 가르는 계기가 됐다.

28살 대과(大科)를 차석으로 합격한 그는 현재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중종 계비(繼妃) 윤씨의 희릉(禧陵)을 지키는 종7품 직장(直長)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그후 지평(持平: 사헌부 정5품 관직), 부승지(副承旨: 대통령비서실 차장에 해당하는 정3품 관직)로 거침없이 승진하게 된다. 다산은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 행정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해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설계, 기중기를 이용한 수원 화성 축조,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서인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시찰에 나섰다가 피폐한 민중의 실상을 눈으로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친필 서한

1795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밀입국사건과 조카 사위였던 황사영(黃嗣永)백서사건이 터지고 만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순교가 이어졌다. 다산 역시 서학을 공부하고 천주교와 연루됐다는 상소와 밀고로 탄핵과 좌천을 당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유배라는 험난한 길을 걷게 된다. 1800년 정조의 급작스러운 서거와 겨우 12살 된 순조의 즉위로 당쟁은 더 격화됐다.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천주교인을 역적죄로 모두 죽이라는 가혹한 법령이 선포되고 신유사옥(辛酉史獄)이 일어나자 그의 형 정약종은 목을 잘리우는 순교를 당한다. 다행히 다산과 중형 약전은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 채 강진과 흑산도에 유배되고 정씨 집안은 한순간에 풍비박산이 났다.

1801년 삭풍부는 11월말 강진에 도착한 다산. 유배지에서 처음 쓴 시가 마음을 울린다. 남도 천리 유배길은 그래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임금이 있고 돌아올 기약이 있다면 이처럼 고통스럽지 않겠지만 총애해주던 정조는 죽고, 집안은 몰락하고, 자신이 역적죄인이 되어 이역 땅에 도착했다.

북풍 바람 눈 휘몰듯이 나를 몰아붙여
머나먼 남쩍 강진의 밥 파는 집에 나를 던졌구려.

                                            다산의 시 「客中書懷」중에서

당시 백성들은 유배객 중 중죄인에 대해서는 밤중에 문과 담장을 부수기가 일쑤였다. 길에서 만나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유령 취급을 했다고 한다. 관아에서는 중죄인의 경우 담장대신 탱자나무 등으로 가시울타리를 쳐서 한 발자욱도 집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지금의 법무부 차관보에 해당하는 형조 참의(參議)를 지낸 다산이 40살의 나이로 역적죄인이라는 죄명으로, 그것도 천주교도라는 중죄인으로 유배를 왔으니 지방수령은 물론 마을사람들까지도 접촉하기를 꺼렸을 것이다.

보통 귀양 온 사람이 거처를 관아에서 지정해 주는 것이 상례였지만 이 마저도 거절당해 참 다산은 난감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강진 읍내 동문 밖에서 주막을 하는 노파가 그를 불쌍히 여겨 뒷방 한칸을 내주게 된다. 밥걱정, 얼어죽을 걱정이 없는 더부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생존을 위한 밥 한 그릇, 글을 쓸 종이 한 장 조차 남의 도움이 없으면 마련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 초의선사가 그린 다산초당

다산은 4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의식주를 해결했고 비로소 아전의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저술활동에 조금씩 전념할 수 있게 된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게 생활하면서 바른 저서를 남기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의 인품 및 학식이 인근에 알려지게 되면서 아전의 자제에서 지방유지의 자제로 제자들이 바뀌고 당시 지방유지였던 해남 윤씨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유배 7년째인 1808년 다산은 동서(東庵과 西庵)로 집을 짓고 다산초당으로 옮겨오면서 비로소 정신적인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당은 말 그대로 볏단을 지붕에 올린 초당(草堂)이었는데 시간이 지나 무너져 폐가가 된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팔각기와 지붕을 올려 지금과 같은 번듯한 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집이 그에겐 온 세상이었다.

다산은 그윽한 곳 귤동마을 서쪽인데
천 그루 소나무 사이로 시냇물 한 줄기
시냇물 시작하는 바로 그곳에
돌 사이 소쇄하여 조용한 집 서 있어라

                                          「茶山花史」중에서

비록 解配는 되지 않았지만 마음의 안식을 찾은 다산. 그는 이때부터 아침 동틀 때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붓과 벼루를 벗 삼아 저술에 온 힘을 쏟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왼쪽 어깨가 마비되기도 하고 시력이 크게 바빠져 안경을 늘 끼고 살았다. 다산이 이렇게 저술에 몰두하게 된 것은 글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알리고 유배 온 죄인의 누명을 벗으려고 했던 것일까. 비록 정조도 죽고 땅끝 마을에 갇힌 유배객의 몸이지만 학문을 통해 후세에 평가를 받고 조선 사회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해야겠다는 마음에 앞섰을 것이다. 이때 쓴 대표적인 저서가 국가기관 전반의 개혁 청사진을 제시한 경세유표(經世遺表),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기위해 지방행정관이 지켜야 할 항목을 적은 행정지침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그리고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德治를 규정한 형법 연구서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500여 권이다.

조선시대의 책은 2~4권을 합해야 요즘 300~400페이지 책 한 권에 해당한다고 하니 18년 유배기간 동안 다산은 요즘으로 치면 전분야를 망라하는 책을 매년 저술한 셈이다.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치민(胡志明)도 다산이 지은 목민심서를 머리맡에 두고 탐독했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베트남 독립을 위해 헌신한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는 성서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다산은 자신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했다. 새로 결혼한 제자가 신혼재미에 빠져 학문을 게을리하자 신혼부부가 앞으로 각방을 사용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에게 뿐 아니라 남에게도 완벽을 요구했던 다산은 사회전분야를 막라한 방대한 저술을 통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게 됐다.

다산초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다산유물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그가 생전에 가족 및 제자들과 주고받았던 편지와 저술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방문객의 눈길을 끄는 작품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산 부인 홍씨가 유배지에 보내온 붉은 치마에 매화와 새 두 마리를 그리고 시를 써넣은 족자이다.

l  매조도(梅鳥圖)에 쓴 시

훨훨 나는 새가 날아와
내 뜨락 매화나무 가지에서 앉아 쉬네.
매화꽃 향기 짙게 풍기자
꽃향기 그리워 날아왔네.
이제 여기에 깃들여 지내며
내 집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꽃이 이제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달리겠네.

 

翩翩飛鳥    편편비조        息我庭梅    식아정매
有烈其芳    유렬기방        惠然其來    혜연기래
爰止爰棲    원지원서        樂爾家實    락이가실
華之旣榮    화지기영        有賁其實    유분기실

 

다산은 자신의 심경을 담은 글도 써 넣었다.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 먼 길 애틋한 정을 담았네
흘러간 세월에 붉은 빛 다 바래서
만년의 서글픔을 가눌 수 없구나

 

부인 홍씨가 결혼 30주년을 맞아 집안 장롱에 보관하던 빛바랜 치맛자락 6폭을 보내왔다. 이것은 결혼할 때 만들어온 것이다. 이것을 보자 다산은 가위로 잘라 두 아들에게는 교훈을 담은 족자 만들어 주고 갓 시집간 딸에게는 시를 쓰고 매화와 새를 그려 넣은 그림을 주었다. 딸에 대한 애뜻한 부정(父情)이 느껴진다.

다산초당에서 내려오자 조금씩 굵어진 빗방울이 진눈깨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계속)

*글=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