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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세상이 다가왔다

 

대학 시절, 강의 시간에 40대 교수 한 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 젊은 날 미국에서 유학할 때 60세인 하숙집 여주인이 피아노를 시작하는 걸 보고 놀라서 물었단다.

“할머니, 이제 피아노를 배워서 뭐하시게요?”
노인이 대답했다.
“65세 생일에 베토벤 소나타를 치려고. 날 위해 치는 거야!”

그때의 질문이 부끄러웠다는 교수의 말에 나를 포함한 학생들의 반응은 미국 할머니라 그런가, 하며 꽤 시큰둥했다.
대개의 젋은이가 그렇듯 나 역시 60세가 넘으면 삶을 다 산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60세에도 삶이 있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솟기도 했다. 40세에 등단한 한 주부 작가의 출현에 놀란 적도 있으니, 나이에 꽤 심한 편견을 가졌던 것이다.

20대 초반에 작가로 나선 나는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은 뒤 일상의 소용동이에 좌충우돌 부딪쳐 글쓰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글쓰기에 몸부림치다 여러 번 쓰러지기도 하고 눈앞이 안 보이는 지경까지 갔다. ‘이러다 죽으면 글이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인가?’ 자문자답하며 나를 괴롭혔다.

그 가운데 어느 날 “인생은 60세부터… 60세에 한글을 깨치다.”라고 적힌 신문 기사를 보았다.

그때 베토벤 소나타를 치고 있을 하숙집 여주인이 생각났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숙연히 피아노를 치는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 사람됨의 여유와 존귀함이 다가왔다. 어쩌면 그 무렵부터 나는 느긋하게 60세부터의 삶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조바심을 내려놓은 것이다.

이렇게 전업주부로 살다가 아이들이 다 성장하면 그때부터 글을 써야지, 하고 자신을 달랬다. 글 쓰는 친구에게서 “너는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넓게 쌓는거 같아. 여유가 있어 보여.”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과연 60세가 될때까지 가슴 한구석에 글을 쓰겠다는 갈망이 남아 있을까? 그 무렵 내가 생각한 60세는 경계 밖의 세상이었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뿔뿔이 집을 떠나고 남편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60세에 나 홀로 남았다. 평생 가슴속에 눌러 온 갈망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데 어떤 장애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나는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리고, 친구와 함께 ‘독립영화협의회’ 영화 제작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20대 젊은이들 속에서 그 힘든 과정을 수료했다. 독립영화와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리고 예술가들을 찾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둑이 터진 것 같은 갈망의 범람을 체험했다. 이제 나이의 기준이 변해 60세는 더 이상 내게 노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60세는 내가 젊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넘기 힘든 경계 밖의 세상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 두려워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의지와 지혜를 다해 세상의 편견과 팽팽히 맞서려면 어떤 굴욕도 견딜 수 있는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리고 젊은 날 세상에 나갈 발판을 딛기 위해 암울하게 겼어야 했던 고통보다 그 굴욕감이 더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60세를 일컬어 제 2의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째서 전과 다르게 내 삶이 실감 나지 않고 멀리 내려다보이는 것인지… 내가 살아온 세상이 깊은 바갓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듯하고, 내가 내 삶에서조차 튕겨져 나와 있음을 순간마다 느낀다. 이제 매일 긴장한 채 거대하고 투명한 그물을 던져 세상에서 내 삶을 새로이 건져 올려야 한다. 전혀 예상 못한, 낯선 세상이 내게 다가왔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세상 한쪽에서 백발이 된 하숙집 여주인이 아직도 피아노를 치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내가 숨을 쉬는 한 기억 속 그 노인은 계속 피아노를 치고 있을 것이다.

글/ 김청조님 (극작가)

* <좋은생각>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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