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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만 줘도 상처가 치유됩니다



상담의 법칙 중 하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거기 있어주기’(Being there and saying nothing)다. 듣기만 하는 것이 무슨 상담이 될까 싶었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니 그 힘이 놀라웠다.
보스턴대 재활상담 석사과정은 학교 수업 외에도 상담기관에서 일주일에 24시간은 ‘인턴’을 해야 했다. 미국 문화도 언어도 낯선 상태에서 학생이 아닌 사회인으로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2007년 가을학기. 나는 상사와 문제가 생겨 담당 교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상사가 다그치는 바람에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변명만 늘어놓은 꼴이 되어 마음이 잔뜩 상해 있는 터인지라 발걸음이 무거웠다.

산타클로스의 수염과 넉넉한 풍채를 가진 오르토 교수는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부담스러울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시종일관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조용히 온몸으로 ‘지금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며 짧지만 강한 긍정의 대답도 돌아왔다. 마음이 편해진 나는 영어가 술술 나왔고 상사 앞에서는 못했던 말까지 다 쏟아냈다. 교수님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그저 진정한 ‘공감’이 느껴졌을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교수님이 무언가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서가 아니라 그저 내 마음을, 내 감정을 다 쏟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이해받았다는 기분은 내가 다시 도전해 볼 용기를 갖게 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상대방의 어려운 마음과 형편을 듣고 있자면 왠지 몇 마디라도 해주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생긴다. 어디선가 들은 말로 위로를 해 주어야 할 의무감이 들기도 한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는 말이 상대방의 짐을 덜어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화상을 많이 입은 나지만 화상환자들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화상을 입었어도 화상 입은 부위가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고, 치료 방법이 다르다. 어느 정도 공통점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우리네 인생은 각자 다르고 독특하고 유일하다. 그래서 ‘나도 겪어봐서 안다’는 말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상담을 받는 사람이 가장 필요한 것은 ‘네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귀와 ‘지금 나는 네 편이야’ 하는 마음이다.

한 수 가르쳐주고 싶은 욕심. 그보다 더 깊은 마음에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지’ 하는 얄팍한 교만함을 버리고 잠시라도 누군가에게 아무 말 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보자.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장애인들에게 상처보다 용기를 주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미국 뉴욕에서, 이지선 푸르메재단 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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