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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가득한 우리말

‘비정상’과 ‘다름’ 사이

“이제 많이 정상으로 되셨네요.”

 몇 년 전 별로 친하지 않은 지인이 건넨 인사였다. 못 보던 사이에 좋아진 얼굴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하는 인사였지만 나는 그리 듣기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에는 내가 비정상이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떤 모습의 사람이 정상인이고 어떤 사람이 비정상인인가. 과연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어떻게 정의돼 있는가. 눈이 두 개면 정상인이고 한쪽 눈이 찌그러져 있다면 비정상인인가.

 그 논리라면 짧은 손가락에 손톱이 두 개밖에 없는 나는 얼굴이 전보다 조금 나아졌다고 해도 계속 비정상인이지 않을까.

 물론 비정상적 ‘상태’는 있을 수 있다. 우리 인체의 비정상적 ‘활동’이나 ‘상태’를 병이나 증상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상태와 활동이 있다고해서 사람 자체가 비정상이 되거나 정상이 될 수는 없다.

1980년대부터 미국의 심리학회에서는 학술지에서부터 ‘편견 없는 언어’ 쓰기에 앞장서고 있다. 장애를 가진 누군가를 설명할 때 그 사람에 대한 개인의 관점이나 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언어쓰기이다. 불구, 절름발이, 지체부자유, 병신 등 필요 이상의 감정이 들어간 단어 대신에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통칭해서 쓰기로 독려한다.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상인’이 아닌 ‘비장애인’으로 쓰기를 유도하는 식이다.

또한 ‘사람을 앞세운 언어’ 쓰기를 권장한다. 과거 우리가 영어문법책에서 배운 ‘장애인(the disabled)’ 같은 집합체로서의 의미가 아닌 ‘장애를 가진 사람(person with disability)’으로 쓰는 것이다. 신체와 정신의 어느 부분이 손상되었을 뿐이지 장애가 사람보다 강조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와 병보다 먼저 ‘사람(person)’이란 단어를 앞세운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를 돕는 행사 때 우리는 ‘심장병 어린이 돕기 자선행사’ 같은 제목을 많이 보게 된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이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언젠가 나를 짧게 소개하는 글에 ‘화상 자매 이지선’이라는 글귀를 보고 분개했던 적이 있다. 내가 화상 흉터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 화상이 나 자신 전부가 될 수 없듯이 도움을 기다리는 그 어린이들도 지금 이 순간 심장병을 앓고 있을 뿐이지 그 사람이 심장병은 아니지 않은가. 심장병을 앓게 된 것도 힘들 텐데 그런 지긋지긋한 병이 나를 지칭하는 정체성이 되는 것은 병보다 더 싫은 일이다. ‘지체장애인’ 이모 씨라고 한다면 문맥상 필요한 그 사람의 대표적 특징을 말하는 것뿐이지 그 사람의 모든 운동 기능과 생각이 지체장애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의 편리성을 위하여 그 말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존엄성을 종종 간과하게 된다.

‘장애를 가진 사람’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다. 직업이 있고 다양한 경제적 여건과 생활 방식으로 살고 친구와 가족이 있으며 취미가 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건강하든 아프든 간에 우리의 말 안에 그들을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장애란 마치 누군가는 흰머리가 많고 얼굴색이 조금 까맣고 누군가는 키가 작은 그런 사소한 ‘다름’이 아니겠는가.

이지선 푸르메재단 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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