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지금 행복할까?


"그런 일이 실제로 있어요?"


<긴급출동 SOS 24>라는 프로그램에 발을 담근 이후 가장 흔하게 들었던 질문이다. 법치국가를 자처하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폭력에 대한 충격의 표현일 수도 있겠고, OECD에 가입했다는 나라의 사회적 시스템이 이것밖에 안 되느냐는 황당함도 함유하고 있으며, 그런 사건들이 내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믿기 어렵다는 고백이기도 한 질문이리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하게, 그러나 황망하게도 예스다. 이렇듯 황당한 사례의 피해자 가운데 장애인을 빼놓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커녕, 인간에 대한 개념조차 차리지 못한 이들로부터 말도 안 되는 학대를 당하기도 했고 가난과 무지 탓에 마땅히 받아야 할 보호로부터 차단되어 방치되었던 장애인의 예는 일일이 들기조차 어렵다.


2006년 뜨거운 여름의 어느 날 제보가 들어왔다. "몇년 동안이나 장애여성 00역 주변에 나와 구걸을 하는데 한 남자가 그 장사를 시키는 것 같다. 그는 소문난 알콜 중독자이며 주변에 험악한 욕설은 기본이고, 폭력까지 행사한다."는 것이다. 직접 현장에 가 보니 상황은 처참했다. 소나기가 솓아지던 날, 장애여성은 축축한 역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여름임에도 새파래진 그녀는 이빨이 딱딱 부딧쳤고 껌을 쥔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 주위를 배회한다는 흉포한 남자가 눈에 띄지 않음을 확인한 후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왜 이 일을 하시냐고',그러자 그녀는 불명확한 발음으로 그러나 명확하게 의사 전달을 해 왔다. '돈 벌려고','그럼 여기 데려다 주고 돈 가져가는 아저씨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불안감을 비추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더는 묻지 말고 가라는 몸짓을 했다.


밤 9시가 넘어서야 비틀거리면서 문제의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그다지 부드럽지 않은 태도로 장애여성을 휠체어에 태웠다. 아니 태웠다기보다 휠체어만 잡아 주었다. 다음날도 그녀는 남자에게 이끌려 역으로 왔고 담요 한 장 깐 시멘트 바닥에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껌을 내밀었다. 여자 후배가 그녀에게 '언니,언니'하며 곰살맞게 굴기를 두어 시간, 마침내 그녀가 남자의 정체를 밝혔다. 그녀를 도우려는 사람에게 뺨 한 방을 서슴치 않던 안하무인의 알콜 중독자는 바로 그녀의 친오빠였다. 뜻밖의 대답에 아연실색한 우리는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갔다. 그녀의 증언은 사실이었다. 동사무소에서도, 장애인복지관에서도 남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몇 번 개입하여 구걸을 제지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장애여성이 자발적으로 그 '장사'를 하고 있고 강제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기에 법적으로도 제재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남매 모두 생활 수급자로서 그 장사를 거둔다고 생활 형편이 내려앉는 것도 아니었지만 목 아래로 양팔의 일부만 사용할 수 있고 검게 멍든 팔꿈치로 체중을 지탱해야 했던 그녀는 3,4년 춘하추동 내내 역 바닥을 온몸으로 닦아 내리고 있었다.


자발서의 이유란 너무나 당연했지만 동시에 황당했다. 그것은 그녀의 용어로 '콧바람'이었다. 휠체어에 편안히 앉을 수조차 없을 만큼 장애의 정도가 심했던 그녀에게 바깥공기를 쐬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었고 여행이었으며 해방이었다. 그리고 유감스겁게도 구걸은 그녀 생애 처음으로 가져 본 '직업'이었다. 창문으로만 세상을 열던 그녀에게 분주하한 사람들의 발걸음과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냄새를 가까이에서 느낄 유일한 기회였던 것이다. 술에 찌들어가는 오빠가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 자유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구걸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세상으로 나설 수단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판단에 우리는 제대로 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중증장애인이 갈구했던 '콧바람'의 자유가 오빠의 술값을 위해 남용되고, 다시 오빠의 그릇된 행동이 장애인의 자유로 무마되는 아이러니 앞에서 무슨 할 말이 남아나겠는가.


우여곡절 끝에 오빠의 알콜 치료를 주선해서 입원시켰다. 그리고 고마운 한 휠체어 업체가 그녀의 체형에 맞게 엎드려 탈 수 있는 전동 휠체어를 장만해 주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휠체어조차 그녀가 운전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그녀의 외출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의 낭패감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도움이라는 표현을 쎴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선의를 담보로 한 '시혜'(施惠,은혜를 베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낭패감 뒤로 스며들었던 기억이 난다.


수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온 그녀의 '장사'는 끝났다. 그녀가 일그러진 자유의 대가로 바꿔야 했던 '장사'가 이제 끝났다고 애써 위로 했다. 하지만 그 어설픈 위로가 납덩이로 변해 가슴에 쌓이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렵다. 과연 그녀는 지금, 그때보다 행복할까?


장애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라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며 결국 그 도움을 체계화하고 그 시스템의 권역을 넓히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깨달음과, 지금까지 그리 못해 왔다는 자책이 동시에 들게 한 사건이었다.


김형민 PD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부산에서 자랐다. 88년에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고 94년도에 졸업장을 받았다. 그 다음 해 SBS프로덕션에 입사한 이후 카메라를 들고 나돌아다니며 매일 새로운 사람과 사건과 풍경을 만나는 것을 낙으로 아는 역마살이 그득한 교양 PD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추적 사건과 사람들>, <리얼코리아>, <특명 아빠의 도전>, <스타 도네이션 꿈은 이루어진다> 등의 프로그램을 연출했고 지금은 <긴급출동 SOS24>란 프로그램 PD로 일상을 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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