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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공예작가  김윤숙

 

공예작가의 집처럼 입구부터 해학적인 장승이 사람을 반기고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도록 나무 경사로가 그녀와 나를 집 안으로 들어서게 했다. 마침 그녀의 아버지가 주말에 그녀를 보러 왔는지 집안에 와 계셨다.

“ 어제 행사 때문에 집이 엉망이에요. 정리를 못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그녀의 안식처이며 공방인 집은 아늑했다. 벽이며 한쪽 공간에는 그녀가 손끝으로 작업한 장승과 솟대, 서각 작품 100여 점은 서로를 향해 웃고 있었다.

“이곳에 앉으세요.”

죽은 나무는 살아 숨쉬는 조각이 되어 살아난다 

그녀를 본 것은 2005년 푸르메재단에서 주최한 장애인사진전 책자에서였다. 92년 2월 문예창작과 1학년이었던 그녀는 연극동아리 친구들과 6층 옥상 난간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실수로 그만 떨어져 다시는 걸을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그 동안 큰 수술을 3번이나 거쳐야 했고 자살기도로 몇 번씩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자신만의 삶의 공간이자 무소유의 공간에서 하루 온종일 자신 안에 있는 비극적인 것을 장승의 해학적인 모습으로 다듬어가며 승화시키고 있었다.

장애는 극복이 아닌 받아들임의 연속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연극을 하고 싶어서 남 앞에 서는 것을 좋아했고 즐겼다. 그래서 그녀가 장애를 입고 나서 세상에 나갈 때도 그녀는 남들의 시선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를 받아 들일 수 없는 것과 끝없이 싸워야 했다. 장애는 극복이 아니라고 그녀는 주장한다. 피치 못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라면 그것을 극복하고 수용한 것을 넘어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왜 장승공예를 시작했는가?

97년부터 그녀는 일산직업전문학교에서 목공예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 6시부터 저녁 7시까지 그녀는 자신을 휘감고 있는 장애의 틀을 벗기 위해 집중해서 공부를 했고 조각을 해서 전국 장애인기능경진대회에서 2등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목공예2급기능사자격증,귀금속가공2급기능자격증,칠기기능자격증을 각 시설에서 취득하였다.

“다른 공예품도 많은데 왜 장승공예를 시작했어요?”
“ 장승이 조각하기 가장 쉽잖아요. (웃음)”

꽤나 그럴듯한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녀의 대답은 오히려 간단했다. 사실 우리는 무시하고 지나치기 쉬운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녀는 당당히 1년 동안 양평군 가루니 장승촌에서 사부에게 장승공예를 전수받고 하산을 해서 지금의 공방을 차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민속 공예품으로 장승을 조각하는 사람으로 여자는 극히 드물고 장애인으로서는 그녀가 처음이다.

뭐만들까 공방

그녀의 홈페이지(www.muergongbang.com)를 들러본 사람이면 그녀의 공방이름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처음 공방이름을 들었을 때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독특한 이름만큼이나 그녀가 만들어내는 장승,솟대,서각 작품들은 고민과 사색, 진통의 시간을 보내고 겪어낸 창작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을 통해서도 판매가 되고 인사동과 용산 등 몇 곳에서도 판매가 되고 있다.

“ 자립생활을 한지가 꽤 되었는데 생활하기에는 어렵지 않나요?”

“ 괜찮아요. “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사실 그녀가 판매하는 작품들은 작가들이 보기에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가 된다. 그 가격으로 그녀가 한달 생활하는데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많이 모자를 수 있겠지만 그녀가 예전에 두 달 동안 강냉이와 두유로만 버텼다는 얘기를 알고부터는 그녀의 근검 절약하는 생활을 알 수 있었다.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기에 외로움을 받아들이다.

“여기 홀로 작업 하다 보면 외롭지 않으세요?”
“많이 외롭죠. 다른 것보다도 공예가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기에 외로움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녀 집에는 TV가 없다. 그녀는 의지가 약하다고 말한다. 사실 그녀가 10년 가까이 조각을 하면서 장인으로서의 삶도 단련이 될 만도 한데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담금질 하고 있다.

 

“ 좋아하는 것을 일부러 치웠어요. 연극도 지금까지 안보고 TV도 무지 좋아해서 일부러 사지도 않았어요.”

“제가 한번 선택하고 결정지은 일은 끝까지 추진하는 성격이에요. 반면 소심한 A형이어서 적극적인 활동에 제약이 따르기도 해요. (웃음)”

그녀가 말하는 가운데 힘이 느껴졌다. 왜 그녀가 일산 외딴지에 들어와 일을 하는지, 그리고 그녀가 외로움을 지나 고독감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거실과 방안에는 여전히 장승들이 웃고 있다. 나무들은 어서 그녀가 자신을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 지금 방송통신대 문화교양과 4학년이에요. 이제 졸업반이죠. 학점은 좋지 않지만 다양한 책과 교양을 쌓을 수 있어서 좋아요. 앞으로 공예관련 대학원도 진학할 생각이에요.”

그녀는 지금 한국장애인미술협회 사무차장을 맡고 있다. 목동 사무실에서 한 달에 한번 임원들과 회원들을 만난다. 조만간 잠실 쪽으로 사무실이 이전하면 더 큰 공간이 확보되어 다른 장애인들의 작품들도 전시를 한다고 한다.

낮아짐으로 세상과 만나다.

“예전에는 성격이 모나고 강했어요. 지금 예전 지인들이 보면 많이 바뀌었다고 얘기를 해요. 그것이 내가 휠체어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때론 수줍은 색시처럼 때론 강한 어투로 그녀는 사람과 만나고 세상과 만난다.

“20세기에는 장애인들이 재활을 해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맞추어지게끔 하는 재활패러다임의 시대였지만 21세기인 지금은 사회가 장애인들에게 맞추어서 편의시설 및 복지정책을 펼쳐 장애인 개개인이 최대한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고 핸디캡을 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자립패러다임이 정착되어야 해요.”

푸르메재단에서 추진중인 재활병원도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환자 중심의 병원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 저는 장애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최대한 잘 수행해내고 자아성취를 하는 모습들이 하나 둘 모여 질 때 세상을 변화, 발전시킨다고 생각해요.”

 

영원한 공예작가로서의 삶 

예전 공방에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그녀의 공방에서 조각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작년 5월 지금 이곳 일산의 일터와 안식처로 오면서 가르치는 일을 접었다고 한다.

“올해는 제 스스로 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싶어요. 대학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다양한 공예 관련 책도 읽고 전통민예품도 알아가면서요.”

그녀의 다부진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라디오는 내 친구라고 하면서 문화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10평 모자란 공간에서 그녀가 파내는 나무의 살결은 그녀의 꿈을 향해 외치고 있다. 당신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거실을 나와 집밖까지 배웅을 하는 그녀의 친절함에 사뭇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자신의 공방에서 홀로 묵묵히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장애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그녀가 조각해 가는 삶이 사뭇 궁금해진다. 그녀의 손은 그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글,사진 임상준 푸르메재단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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