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메재단 이사장 김성수 총장

 


푸르메재단 이사장인 김성수 성공회대 총장은 교내에서 할아버지로 통한다. “야, 이 녀석! 언제 군대 갔어? 얘기나 좀 하고 가지.” “총장님 죄송해요. 요즘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허허, 그 녀석, 기특한 말을 하네!” 영락없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다. 휴가 나온 손자를 맞이하는 김 총장님의 표정에는 애정이 묻어난다.



김성수 총장님은 연세대 신학과를 거쳐 성공회 성미카엘 신학원을 졸업한 1964년 사제 서품을 받으셨으니 신부가 되신 것이 올해 42년째다. 이후 장애인을 위해 외길 인생을 살아오셨다. 때로는 장애인들에게 허물없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장애 환자에게 인자한 할아버지가 됐다가, 때로는 엄한 아버지 역할을 했다. 김 총장님은 1973년 국내 최초의 정신지체장애 어린이 기숙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세우셨다. 이들이 졸업한 뒤 오갈 곳이 없게 되자 유산으로 받으신 강화도 온수리 선영을 기부해 정신지체장애인 직업생활공동체인 <우리마을>을 만드셨다.


김 총장님은 2005년부터 <푸르메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장애 환자의 새로운 터전인 민간 재활전문병원을 건립하는 데 온 힘을 쏟고 계시다. 이제 내일 모레면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 누구보다 젊으시다.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김성수 총장님을 대하면 삶의 의욕이 솟아나고, 마음에는 평화가 생기고, 무언가 주위사람과 나누고 싶어진다고 한다. 왜 그럴까. 한평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나누는 삶을 실천해 오고 계시기 때문이다. 김성수 총장님께 가장 아끼는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낡은 중절모를 보여주신다. 색이 바래고 여기저기 꿰맨 자국이 선명하다. “10여 년 전 동생이 선물로 사준 겁니다. 애정이 담긴 선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가을이 깊어가는 11월 8일 해가 이미 기울어가는 오후 2시 시흥에 있는 성공회대 총장실에서 김성수 이사장님을 만났다. 오랜만에 뵙는데 혈색이 좋으셨다.



 


 


 


 


 


 


 


 


 


 


 


조금 힘들어 보이세요.

지난주 심장 혈관 수술을 받았어요. 갑자기 숨이 가쁘고 힘들어서 병원에 갔더니 심장혈관이 좁아졌다고 해서 철사를 집어넣어서 넓히는 수술을 받은 거지요. 이제는 숨쉬기도 편하고 무엇보다 얼굴색이 붉어져서 다시 사춘기가 시작되려나 봐요.(모두 웃음) 그런데 아직은 조금 피곤해요.


총장으로 취임하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올해로 6년째입니다. 1988년부터 1995년까지 7년간 성공회대 이사장을 지낸 뒤 강화도온수리에 있는 장애인 직업공동체 <우리마을>을 만들었어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2000년 총장에 취임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공회대 규모가 얼마나 되나요?

학부생 2000명과 대학원생 500명을 합해 모두 2500명입니다. 다른 종합대학과 비교하면 너무 작지요. 그래서 교수와 학생이 누군지 서로 압니다. 교정은 1만 3000평이니 아담한 학교이지요.


<성베드로학교>와 <우리마을>이야기를 해주시지요.

교정을 들어오시면서 오른쪽 입구에 건물을 보셨지요. 그것이 <성베드로학교>였습니다. 이제는 학교 안쪽으로 이사해 크게 다시 지었습니다. 1995년 은퇴를 하면서 <성베드로학교>의 명예교장이 되었습니다. 정신지체 어린이들이 공부할 곳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졸업하자 생활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화도 온수리에 직업생활을 할 수 있는 <우리마을>을 만든 거지요. 경기도에서 30억원을 지원해줘서 설립이 가능했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지요. 현재는 이곳에서 정신지체장애인 30여 명이 생활하고 있고 바로 옆에는 수녀원이 생겨서 나이든 노인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제의 길을 걷게 되셨나요?

젊은 시절 폐병을 앓았는데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오히려 몸을 혹사해서 지금쯤 죽었을 지 몰라요. 병에 걸린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담배와 술을 안하고 항상 조심해왔으니 이렇게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지요. 어려서 서울 관수동으로 이사를 왔다가 가회동에서 자랐어요. 배재중학을 다녔어요. 공부는 안하고 매일 아이스하키를 열심히 했어요. 내가 배재중학 아이스하키 선수였거든요. 한번은 대회에 출전해 열심히 시합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각혈이 나오더라고요. 폐결핵이었어요. 과로 탓이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 6.25전쟁이 터진 거지요. 그때 폐결핵에 필요한 마이신 한 알을 사먹으려면 쌀 한 가마니 값이었는데 내 약값을 대느라 집 재산이 많이 축났습니다. 아무튼 10년 동안 병치레를 했어요. 우리 집에 폐병환자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인민군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내가 아이들을 워낙 좋아해서 병이 조금 낫자 인근 고아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자연스럽게 성공회와 인연을 맺은 거지요. 사제가 돼야겠다고 결심하고 길을 걷게 된 겁니다. 아픈 동안 하느님의 은혜를 받았고 현재도 갚고 있는데 살아생전에 갚을지 걱정이 돼요.
















사모님이 영국분이시지요? 어떻게 만나셨어요?

집사람은 영국 성공회 선교사로 일본에 파견돼 일하고 있었어요. 일본 사람들이 키가 작아서 모두 눈 아래 보였대요. 그런데 처음으로 자기 눈보다 키가 큰 사람이 나타난 겁니다. 바로 나예요. 일이 있어서 일본에 갔다가 집사람을 만난 거지요. 첫눈에 나에게 반한 거지요. 한번 한국에 놀러오라고 농담을 했더니 정말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결혼까지 하게 된 거지요.



사시면서 어려움이 많으셨지요?


큰 문제는 없었지만 자식 교육문제로 많이 부딪혔지요. 저는 자식들에게 기회 있을 때 마다 공부하라고 말했고, 집사람은 ‘왜 강요하느냐’고 반대했어요. 집사람은 공부하는 것은 자기의 자유의사에 달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옳은 말이지요.


아이들이 어릴 때 조금 여유가 있었다면 영국이나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을 텐데. 돈이 없어서 모두 국내에서 공부를 시켰어요. 둘 다 혼혈이니 학교생활이 쉽지 않았지요. 딸은 그래도 큰 문제가 없었는데 아들은 달랐어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들과 많이 싸웠습니다. 여의도에서 아무개하면 주먹으로 유명하지요. 그때마다 “네 조국은 한국이고, 넌 한국놈이니까, 꼭 군대에 가야한다”고 강조했어요. 그런데 막상 아들이 군대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받으니까 혼혈이라서 갈 수 없다는 거지요. 제가 “넌 한국인이고 군대에 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아들이 “왜 나는 군대에 갈 수 없느냐”고 대들더군요. 그 때 처음으로 “아빠가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이 녀석은 연세대 체육학과를 나온 뒤 남들이 군대에 간 동안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종합예술대학 무용전공 교수가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는 학교 취향이 아니라고 사표를 냈습니다. 현재 체육시설에서 매니저를 하고 있어요.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다나요.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요를 했지만 집사람은 아이들의 뜻을 존중해 스스로 느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갈등을 겪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의 교육철학이 옳았던 것 같아요.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다면?

어려운 상황에 있는 장애인들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푸르메재단>이 꿈꾸는 아름다운 재활병원이 하루빨리 지어졌으면 해요. 이러려면 지금까지는 일반 시민들이 많이 지원을 해주셨는데 앞으로는 시민은 물론 대기업과 정치인들이 정말 내 일처럼 나서고 도와줘야 합니다. <우리마을>도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생산한 콩나물을 사가던 기업에서 거래를 갑자기 중단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좋은 해결책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남은 임기가 끝나면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살고 있는 <우리마을>에 가서 여생을 보내려고 합니다.



김성수 총장님은 인터뷰를 마친 뒤 새로 신축된 <성베드로학교>로 안내하셨다. 혼자 돌아볼 수 있다고 극구사양해도 손사레를 치시며 앞장 서섰다. 여기저기서 “총장님, 안녕하세요!” “이 녀석들, 어디 갔다 왔어”하는 인사가 오간다. 멀리서 영문과 진영종 교수가 축구공 2개를 안고 걸어오다, 총장님 모습을 발견하자 달려왔다. “총장님~요. 조금 있시문 교수들이 학생들과 축구경기를 가심니더. 관전해 주십시오.” “알겠어요. 이번에는 뭐 내기해요.”

영락 없는 가족간 대화같다. 한 평생을 사제로서 청빈한 삶을, 어려운 장애인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오신 푸르메재단 이사장 김성수 총장님. 그가 있기에 우리는 행복하다.


<만난사람/ 글 = 백경학 상임이사>


아래 글은 파라다이스 사외보 2006.11.12 Vol.20 2006 파라다이스상 수상자 3인에 실린 글 입니다.


“부끄러울 뿐이죠. 나는 한 게 없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잘해줬기 때문인데… 어휴, 내가 상을 타게 되다니 부끄러워요. 정말.” 2006년도 파라다이스상 사회복지 부문 수상자인 푸르메재단 김성수 이사장의 수상 소감이다. 그는 현재 성공회대학 총장과 성공회대학 내에 있는 성베드로학교 명예교장을 역임하고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여러 가지 상들의 후보자로 올려놓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의 마음이 고마워서 뿌리칠 수도 없고, 그냥 그러마고 했죠. 하지만 매번 수상자에서는 탈락됐었지요.(웃음) 그래서 이번에도 당연히 안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수상자가 됐다고 하니까, 어쩔 줄을 모르겠네요. 좋은 사람들이 이거 해보자고 하면, 그러자고 하고, 저거 해보자고 하면 또 그러자고 했을 뿐이에요. 항상 좋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따라 하기만 했지, 먼저 나서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는 못했어요.”


파라다이스 그룹 설립자 故전락원 회장의 뜻에 따라 문화, 예술발전 및 인류복지 증진에 공헌한 인사를 선발하여 매년 포상하고 있는 파라다이스상 수상자 김성수 이사장. 그는 성직자로서의 한평생은 물론, 정신지체아, 신체장애자, 불우이웃 외에도 우리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고달픈 삶은 살아가는 사람들의 친구로, 아버지로, 인생의 스승으로, 지도자로 따뜻한 사랑을 가득 나눠준 아름다운 사람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최고의 자리에서도항상 겸손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상을 탄다고 해서 그게 다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다 남이 잘해줘서 내가 있는 건데,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좀 안타까워요.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었으면 좋겠는데, 어째 각각 사는 것 같아요. 항상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열고 대화를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봐요. 더불어 사는 거, 정말 보기좋잖아요?”


수상 소감에서 자연스럽게 인생철학이 담긴 삶의 향기가 배어난다. 오랜 세월 베풀고 살아온 우리 사회의 큰 어른답게 말끝 하나하나에서 깊은 배려와 사랑을 배운다. 오랜 세월 베풀고 살아온 우리 사회의 큰 어른 김성수 이사장은 1930년생으로 강화 출신이다. 강화는 1889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성공회 선교사가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김 총장의 조부는 당시 성공회에 귀의했는데, 이후 대한성공회를 이끄는 토대가 된 집안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김 총장이 성공회에 몸담은 것은 아니다. 한참 혈기왕성했던 청년시절에 폐결핵으로 젊은 시절을 무익하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폐결핵은 그를 성직자의 길에 들어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투병생활하는 와중에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우한 사람들이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결국 사제가 되고, 성공회를 이끄는 주교가 되고, 이제는 성공회대학교 총장으로 후학들에게는 아버지로 또 친근한 할아버지로 함께하고 있다.


“최근에 수술을 했어요. 아니 참, 동맥경화 수술은 시술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혈압도 좀 높고, 괜히 기분이 좋지 않고 그래요. 그래도 의사선생님이 ‘오늘 혈압이 좋으시네요’ 라고 한 마디만 해주면 그날 하루는 또 기분이 좋고… 내가 원래 얼굴이 백지장 같아서 핏기가 없었는데, 시술하고 나서는 피가 잘 통해서 그런지 얼굴이 붉어졌어요. 그래서 혈색이 좋아졌다고들 하지.”


김 총장은 19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는 물론이거니와 21세기 들어서도 어려웠던 때, 젊은이들에게 우상이었고 피난처였다. 또 불우한 이웃들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늘 왕성한 활동의 김 총장이었으나 최근 들어 건강에 이상이 왔다. 그런데도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있고, 즐거운 대화가 있다. 젊은 학생들의 젊은 기운(?)을 받아 젊게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더라도 세상 어느 대학의 총장이 마주치는 학생들 모두에게 일일이 말을 건넬 수 있을까? 너 오늘 아주 멋지다. 그래 잘했다, 내가 점심 사마. 그래 영화 같이 보러 가자꾸나. 너 그 담배 오늘만 피워라, 많이 피우면 아기낳을 때 안 좋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친근한 총장 할아버지로 통한다.


더불어, 함께, 처음처럼, 모두 함께 칭찬하는 세상, 세상은 혼자살아가는 게 아니라 서로 인정하고 같이 살아가는 것, 권력도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이 맞는 세상… 이런 생각들이 김성수총장을 저 높이 계신 총장님이 아니라, 우리 이웃의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학생들 속에 함께하고, 불우한 이웃에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게 만든 원동력일 터이다. 문득 십년 후에 김 총장의 모습이 그려진다. 여전히 웃음 가득한 얼굴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늘 참 높고 푸르다”, 한마디 하지 않을까? “아이고, 십년 후에도 여기 있으라고? 그땐 강화 온수리에 있을 거야.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정신지체아)하고… 거기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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