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덕, 천의 소리 하모니카 연주자

 


그 곁에서 우리 같이 울 수 있다면


박연신 / 열린지평 편집인, 시인


“전제덕 씨 혹시 저시력인가요?”

“무시력입니다.”

“명랑 쾌할 하셔서….”

“저요. 기분 좋을 땐 그래요.”

“지금 기분 좋으세요?”

“네, 좋아요.”

“애인이 오셨나요?”

“음. 그게 아니고요. 어느 일본 음악가가 제 음악성을 되게 칭찬하고 만나보고 싶다고 했대요.”

“저도 아까 관중석에서 들을 때 독특한 음색이라고 감탄했어요. 꽉 끼는 검정색 바지와 티셔츠가 온몸을 출렁거릴 때 파도치는 것 같았어요. 음색도 굉장히 격정적이구요.”

“감사합니다. 하여튼 이제 시작이니 도전해 볼 겁니다.”

“큰 무대에서 활동하셔야지요. 기대가 큽니다.”


그는 꼭 음악으로 성공하리라는 믿음이 컸다. 그에게는 슬픔의 빛이 없다. 걸음은 경쾌하고 또박또박 끊는 말투는 분명했다.





전제덕(29)씨는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다. 생후 보름 만에 열병을 앓고 시력을 잃었다.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만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있다. 하모니카를 불면 세상이 보인다. 홀로 고독에 빠져 앉아 있을 때도 세상은 보인다. 하모니카를 불 때면 그 자리가 어둠이 짙은 강변일지라도 세상은 보인다. 하모니카를 부는 지상의 별, 스물아홉 살의 전제덕. 그를 두고 음악 평론가들은 ‘천재’라고 최상의 찬사를 보낸다. 그는 하모니카를 불면서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실제의 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아들을 등에 업고 소문난 병원이나 한의원 등을 수 십리 길도 마다않고 한 걸음에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매번 치료 불가능이라는 말만 듣고 되돌아와야 했다. 막노동과 식당일로 어렵사리 살림을 꾸리면서도 아들 치료라면 자다가도 일어났다. 하지만 모든 것은 헛수고였다. 가는 곳 마다 의사들은 시신경은 이미 죽었다고 했다.


취학연령이 되어 그는 특수학교인 인천 혜광학교에 입학했다. 일곱 살 때부터 교내 브라스 밴드부에서 음악활동을 했다. 북채를 들고 북을 두드렸다. 그러나 얼마 후 재정난으로 브라스 밴드부가 해체되어 사물놀이를 하게 되었다. 격렬한 장구리듬을 듣는 재미에 빠져 부모를 원망하던 아픔도 달랠 수 있었다. 중1학년의 감수성 많은 아이였던 자신에게는 내면의 화를 폭발할 상대가 부모님밖에 없었다고, 지금은 후회한다고 말한다.


고교시절에도 전씨의 사물놀이 활동은 활발했다. 동창생 셋이 한 조를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학교생활과 예술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며 늘 자기발전과 성취를 생각했다. 어디에, 어느 길에, 자기의 길이 있는 지를 생각하며 앞날을 기대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고등학교 졸업 이듬해에는 50여 개 팀에 끼어 세계사물놀이대회에도 출전해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비록 세상을 볼 수는 없지만 음악세계를 향하여 힘찬 도전을 했다. 시각장애라는 치명적 장애도 솟구치는 음악적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마땅히 일할 곳을 못 찾아 안마사 일자리를 구했다. 생활을 위해서였다. 장남으로서,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기본적인 생활을 외면 할 수 없었다. 생활을 위해 음악을 접어두고 밤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안마시술소에서 7개월 동안 일하고 그 곳을 떠났다. 스무 살 청년의 가슴에서 솟구치는 음악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무작정 다시 장구채를 잡았다. 그는 음악가로 이 사회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리라고 다짐하며 자신과 싸웠다. 그 무렵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하모니카는 그 무렵에 만난 운명의 동반자인 셈이다. 재즈에 관심이 많아 그것을 해보고 싶었다. 그 자유로운 음에 매료되어서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거장의 음반을 들으며 독학으로 주법을 익혔다. 자신의 음악적 열정을 오직 하모니카에 걸었다.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소리, 하모니카의 애잔한 울림은 그의 고독을 달래주었다.


 




97년 김덕수패와 재즈그룹 ‘레드선’의 공연에서 하모니카 연주자로서 처음 연주를 했다. 그때 관중들은 ‘하모니카 천재가 나타났다’며 열화같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삽시간에 전제덕은 혜성과 같은 존재로서 소문에 소문이 나, 마침내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존재 의미는 국내 유일하다는 데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최근 출시된 유명 재즈 가수의 음반에 그의 하모니카가 반주악기로 쓰여,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평론가들은 세계적인 하모니카 연주자 ‘루즈 틸레망’에 비견하는 찬사를 보냈다.


29세의 전제덕 씨는 국내 유일의 재즈 하모니카 연주자가 되었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렵다. 그의 곁에 계시는 어머니 안재순(52)씨는 아직도 수원 잠업시험장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아들과 함께 산다. 방송국이든 스튜디오든 아들과 함께 오가며 살고 있다. 이제는 어머니와의 외출이 행복의 의미로 새겨져, 비 내리는 날의 외출도 서럽지 않다. 일하러 나가는 외출이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함께하는 잡지 열린지평 2003년도 겨울호(41호)에 실린 글입니다.

(사진 열린지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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