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을 열어야 장애인이 보인다.

 




김 경 림 (기획사업부장)


사람의 눈은 참 신기하다. 여태껏 살면서 보아왔던 장애인을 다 더한 것보다 푸르메재단에 몸담은 지난 1년 동안 마주친 장애인 숫자가 몇 배나 더 많다. 일에 관련돼 만난 경우를 제외하고 공공장소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장애인만 해도 몇 배나 많아졌다. 지난 1년 사이 갑자기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환경이 좋아져서 장애인들이 많이 거리로 나오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왜 갑자기 눈에 많이 보이는 것일까.




길을 건너려고 서 있는데, 승용차 한 대가 무리하게 신호를 받으려다 그만 횡단보도 중간에서 급정거했다. 보행자 신호로 바뀌고, 시각장애인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길을 건너기 시작하다가 지팡이가 횡단보도 중간에 멈춘 승용차에 부딪치자 당황해 방향을 바꾼다. 180도를 돌아 건넌 곳으로 나오면 다행일 텐데 엉뚱한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횡단보도 위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과 계속 부딪친다. 얼른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 “길 건너실 거죠?” 하고는 손을 잡아 내 팔에 얹고 서둘러 길을 건넌다.


예전 같으면 능숙하게 장애인을 도왔다는 사실에 뿌듯할 텐데, 화가 나서 마음이 편치 않다. 횡단보도 한가운데 서 있는 자기 차에 시각장애인이 부딪쳤으면 차에서 얼른 내려 사과를 한 뒤 도와줘야 도리가 아닌가. 차 안에서 무심히 내다보던 그 승용차 운전자에게 말할 수 없이 화가 난다. 아마도 잠시 후 맹인의 지팡이가 차를 긁지 않았는지 확인할 것이 분명하다.  길을 건넌 후 시각장애인은 서둘러 내 팔을 놓아준다.  이 사람은 어디서 출발했으며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렇게 수십 번을 부딪치고 수백번을 당황해 하면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는데, 내가 5분, 다른 사람이 5분, 그 다음 사람이 5분. 어차피 걷는 길이면 이 사람과 동행해 주면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유학중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장애를 가진 김용우 씨의 스포츠댄스를 처음으로 보았다. 사진과 신문기사로 보다가 실제로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을 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댄스를 한다’는 사실 하나가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두 명의 댄서가 만들어내는 실루엣과 동작 하나하나가 말 그대로 아름답다. 뜻이 아름다워서 모습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미학적으로 너무 아름답다.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된 뒤 역경을 이기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감동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 내는 동작 하나하나를 보며 아름다움에 전율이 느껴진다.


이지선 씨는 사고 전의 얼굴보다 지금의 얼굴이 더 예쁘게 보인다고 말한다. 예전 얼굴에서는 자기 자신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의 얼굴에서는 마치 껍데기를 벗어던진 것과 같이 자유로운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그래서 예뻐보인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지선 씨가 정말로 예뻐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무엇이든 가슴에 담은 만큼 눈에 보이게 마련이고, 그렇게 보이는 것은 이미 망막과 시신경 외에 또 다른 그 무엇을 통해 뇌에 전달되는 것이 분명하다.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은 인생의 표어로 삼을 만하다. 가까운 주변에 장애인이 있지 않다면 처음부터 장애인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알기부터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장애인이 얼마나 많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눈에 띄지 않은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생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지 그것부터 우선 알아야 한다.


좋든 싫든 자꾸 보고 들어서 관심을 갖게 되면 장애인들이 겪는 문제에 대해 알게 될 것이고, 알고 나면 그때부터는 눈이 아닌 가슴으로 장애인과 그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장애인들은 지금도 손짓하고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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