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7세 때에 깨달은 것들

소설가 이근미



살다보면 누구든 원치 않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고 싶었다.

당시 울산에서 가장 좋은 학교는 상업고등학교였다.

그때 우리의 부모들은 소박하게도 여상을 나와 은행에 들어가는 것을 최고 엘리트 코스로 생각했다.

나는 외지로 나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친 뒤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외지 고등학교의 원서를 썼지만, 남동생을 줄줄 거느리고 있던 나는 여상 원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몇 년 만에 신기루처럼 나타난 외삼촌이 꿈같은 얘기를 했다.

여상에 다니고 있으면 내년에 서울로 전근 갈 때 데리고 가겠다는.

나는 시험당일, 학교에 다니고 있으면 외삼촌이 안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엄마 몰래 시험장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고등학교에 가지 않았고, 그 해 8월 한 대기업에 취업하게 되었다.

키가 작아 떨어질 뻔했으나 필기시험 1등에 힘입어 고졸들이 들어가는 실험실로 배정되었다.

그때 1년여 기간동안 어른들의 삶을 지켜본 체험에 살을 붙여 <17세>라는 소설을 썼고, 2006년 여성동아 장편공모에 당선되었다.

17세 소녀의 철없는 선택이 30년 후 선물처럼 내게 날아든 것이다.

꿈 많던 10대를 울산에서 보낸 나는 ‘험한 꼴’을 많이 보고 자랐다.


1970년대, 대한민국 최고의 공업도시 울산은 매일 매일 얼굴을 바꾸었다.

갑자기 뒷산이 다이너마이트에 펑펑 무너져 내리더니 평지로 탈바꿈했다. 그 위에 공장이 우뚝우뚝 서는가 했더니 밤에 가스를 뿜어내 온 동네 사람을 비실거리게 했다. 갑자기 학교 인근 공장의 기름탱크가 터져 선생님의 지휘 아래 산으로 피신한 적도 있다.



이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어제까지 우리와 웃고 떠들던 사람이 갑자기 장애인이 되거나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눈 깜짝할 새 아스팔트가 깔리는가 했더니 아래동네 아저씨가 씽씽 달리던 화물트럭에 치어 도로변 가마니에 덮여있었다.

허리까지밖에 안찼던 바다가 부두로 탈바꿈하여 깊어졌건만, 그걸 깨닫지 못한 아이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다가 익사하기도 했다.

돌산에 일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아저씨가 한 달만에 돌무더기 사이에서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누가 질소탱크에 잘못 들어가서 죽었네, 기계에 끼어서 죽었네, 공단에서는 끊임없이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사고 소식을 많이 접했다고 하여 마음이 단련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17세에 다녔던 회사에서도 큰 사고가 있었다.

우리 실험실로 시료를 갖고 오던 잘생긴 공고 실습생 오빠는 무척이나 쾌활한 성격이었다. 어느 날 기계에 팔이 끼어 으스러지는 바람에 오른팔을 잘라야 했다.

잘 아는 오빠가 사고를 당하자 며칠간 밥을 못 먹었을 정도로 충격받았다. 멀쩡하던 팔이 잘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렵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에 안간 대신 회사 도서실에서 외국 명작소설을 빌려 읽었다.

어느 날 멋쟁이 사서 언니의 왼손이 의수라는 사실을 알고 또 한번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언니도 현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손이 끼는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실습생 오빠는 치료를 받고 다시 출근하여 의무실에서 편하게 일하다가 곧 자리를 옮겼다. 회사 식당에서 나오는 잔반으로 돼지 치는 일을 자원하여 맡았던 것이다. 자립할 것에 대비해 스스로를 단련하고자 선택한 일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엄청난 충격에 영혼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

누구나 계획을 잔뜩 세우고 인생이 잘 풀려나가길 기대하지만, 기대대로 안될 때가 더 많다. 그런가하면 전혀 예상치 못한 좋은 일이 선물처럼 우리에게 날아들기도 한다.


내가 17세 때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을 통해 깨달은 이런 교훈이 내 첫 소설 <17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보낸 10대 후반, 그때 깨달은 것이 인생의 귀한 자양분이 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좌절하지 않는 자에게 절망은 기웃거리지 못한다.’


 


이근미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동대학원 재학 중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낯설게 하기> 당선됐습니다.

2006년 여성동아 공모 장편소설 <17세> 당선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면서 <큰교회 큰목사 이야기>, 동화<김장환 목사 이야기> 등 10여권의 책을 발간했습니다.

홈페이지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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