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묘약

MBC 아나운서 강재형



새해가 밝았다. 낡은 해가 가고 새해가 왔다. 서기 2006년을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어떤 인사를 제일 많이 했을까. 아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였을 거다. 새해 벽두에 제일 많이 하는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福)은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국립국어원 편, 표준국어대사전>’이다. ‘복=행복’이기도 한 셈이다. 새해 ‘행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행복은 동화 ‘파랑새’에 나오듯 진짜 가까이에 있을까. 그렇다, 이렇게 시원하게 답하고 싶지만 딱히 ‘가까이 있는 행복’을 내세우자니 궁색함이 없지 않다. 그럼 이건 어떤가.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는 방법’은 뭘까? 이 MBC 아나운서 강재형 에 대한 내 답은 간명하다, 쉽다. 다른 이를 보고 ‘상그레 웃어 주는 것’이니까.



얼마 전, 내가 어딘가에 다녀오면 행복해진다는 걸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행복해진다는 걸 알았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곳과 인물은 아니다. 회사 근처의 찻집, 거기서 일하는 점원이니까. 그 찻집은 커피에 환각제를 섞는다? 아니다. 그렇다면 ‘웃음의 묘약’을 넣는다? 그것도 아니다. 찻집의 점원은 예쁘다(잘 생겼다)? 밉상은 아니지만 빼어난 미모도 아니다. 그렇다면 뭘까.


웃음이다. 그저 웃음일 뿐이다. 차 주문하려 주문대 앞에 서면 그 점원은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긴다. 아니 ‘우리’를 반긴다. 내게만 웃음 흘리며 특별히 잘 대해주는 게 아닌 걸 그 찻집에 들러본 사람은 다 알기에 ‘우리’라 했다. 그가 파는 것은 차 한 잔이 아니라 소리 없는 웃음 한 자락이란 걸 모르는 이도 그 웃음으로 ‘행복’해 진다. 소리 없이 상그레 웃음 짓는 얼굴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거다. 당연히 그 찻집은 장사 잘 된다. 내가 가진 게 없어도 나눌 수 있는 것,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입가에 힘만 조금 주면 할 수 있는 것, 돈 안들이며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는 제일 쉬운 방법인 웃음. 여러분은 지금 웃고 계신가?



얼마 전까지 나는 라디오 디제이를 했다. 음악 프로그램 디제이 노릇하며 나는 청취자 사연에 공감하고 감동한다. 사연을 읽어 내려가며 콧등 시큰거린 적이 몇 번이며 목이 메어 뒷말을 잇지 못한 건 또 몇 차례인지, 부끄럽기만 하다. 나는 ‘어른애’인지 모른다.


사소한 일로 다툰 동생의 생일 축하하며 미안하다는 뜻 꼭 전해달라는 누나, 유학간 아들 안부를 묻는 동료 청취자의 댓글을 보며 펑펑 울었다는 노부부, 실직했던 남편이 출근하는 뒷모습이 무척 멋지다는 새댁의 한마디, 어릴적 거인같았던 아빠의 어깨가 세파의 무게로 짓눌려 있음을 발견해 안타깝다는 갓 스물된 딸들의 사연, 새벽녘 신문과 우유 배달에 나서는 우리 이웃의 얘기가 나를 감동시킨다. 그 감동의 바탕엔 무엇이 있을까. 말재주, 글재주를 넘어선 진심에서 비롯한 마음일 것이다. 그 진심은 내게 ‘눈물 어린 웃음’으로 전해온다. 어렵사리 전화 연결한 ‘애틋한 사연’의 주인공도 찌푸린 얼굴 아닌 평안한 웃음의 얼굴로 다가오곤 한다. 헛웃음 아닌 진짜 웃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깨달음은 엉뚱한 곳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새 오천원권을 보고 든 생각, 세종대왕과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꿈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짐짓 ‘표정관리’하는 듯 무심한 얼굴이 아닌 지폐안의 웃는 초상화를 보면 남녀노소 모두 환한 얼굴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유치한, 그래서 웃기는 발상이라고? 그럼, 한번 웃자. 분명, 웃음은 ‘행복의 묘약’이다. 지금 여러분은 웃고 계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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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가 어딘가에 다녀오면 행복해진다는 걸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행복해진다는 걸 알았다.

뭐, 그렇다고 대단한 곳과 인물은 아니다. 회사 근처의 찻집, 거기서 일하는 점원이니까. 그 찻집은 커피에 환각제를 섞는다? 아니다. 그렇다면 ‘웃음의 묘약’을 넣는다? 그것도 아니다. 찻집의 점원은 예쁘다(잘 생겼다)? 밉상은 아니지만 빼어난 미모도 아니다. 그렇다면 뭘까.


웃음이다. 그저 웃음일 뿐이다. 차 주문하려 주문대 앞에 서면 그 점원은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긴다. 아니 ‘우리’를 반긴다. 내게만 웃음 흘리며 특별히 잘 대해주는 게 아닌 걸 그 찻집에 들러본 사람은 다 알기에 ‘우리’라 했다. 그가 파는 것은 차 한 잔이 아니라 소리 없는 웃음 한 자락이란 걸 모르는 이도 그 웃음으로 ‘행복’해 진다. 소리 없이 상그레 웃음 짓는 얼굴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거다. 당연히 그 찻집은 장사 잘 된다. 내가 가진 게 없어도 나눌 수 있는 것,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입가에 힘만 조금 주면 할 수 있는 것, 돈 안들이며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는 제일 쉬운 방법인 웃음. 여러분은 지금 웃고 계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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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나는 라디오 디제이를 했다. 음악 프로그램 디제이 노릇하며 나는 청취자 사연에 공감하고 감동한다. 사연을 읽어 내려가며 콧등 시큰거린 적이 몇 번이며 목이 메어 뒷말을 잇지 못한 건 또 몇 차례인지, 부끄럽기만 하다. 나는 ‘어른애’인지 모른다.











사소한 일로 다툰 동생의 생일 축하하며 미안하다는 뜻 꼭 전해달라는 누나, 유학간 아들 안부를 묻는 동료 청취자의 댓글을 보며 펑펑 울었다는 노부부, 실직했던 남편이 출근하는 뒷모습이 무척 멋지다는 새댁의 한마디, 어릴적 거인같았던 아빠의 어깨가 세파의 무게로 짓눌려 있음을 발견해 안타깝다는 갓 스물된 딸들의 사연, 새벽녘 신문과 우유 배달에 나서는 우리 이웃의 얘기가 나를 감동시킨다. 그 감동의 바탕엔 무엇이 있을까. 말재주, 글재주를 넘어선 진심에서 비롯한 마음일 것이다. 그 진심은 내게 ‘눈물 어린 웃음’으로 전해온다. 어렵사리 전화 연결한 ‘애틋한 사연’의 주인공도 찌푸린 얼굴 아닌 평안한 웃음의 얼굴로 다가오곤 한다. 헛웃음 아닌 진짜 웃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깨달음은 엉뚱한 곳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새 오천원권을 보고 든 생각, 세종대왕과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꿈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짐짓 ‘표정관리’하는 듯 무심한 얼굴이 아닌 지폐안의 웃는 초상화를 보면 남녀노소 모두 환한 얼굴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유치한, 그래서 웃기는 발상이라고? 그럼, 한번 웃자. 분명, 웃음은 ‘행복의 묘약’이다. 지금 여러분은 웃고 계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