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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종지기 작가

김영현 (소설가/실천문학사 대표)

쪽방 생쥐와 먹거리 나누는 종지기 작가

권정생 선생하면, 《몽실 언니》를 지은 작가로, 또 교과서에도 나오는 동화 《강아지똥》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어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이십년 전에는 그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이를 내게 처음 소개해주신 분은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이다. 이오덕 선생은 아다시피 평생 동안 어린이문학의 정립과 글쓰기에 혼신을 다하신 분이다. 이오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팔십년대 초 내가 웅진출판사 편집장을 지낼 때였으니 이십년이 훌쩍 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그때 나는 《어린이 마을》이라는 종합 교육서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 들어갈 동화를 좀 추천해 달랬더니 서슴없이 바로 권선생의 그 《강아지똥》을 추천해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 말씀이, 그이는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종지기를 하며 지내는데, 거처가 되는 작은 방에는 생쥐가 와서 함께 밥을 얻어먹고 가는가 하면 여름에는 함께 자도 유독 그이만은 모기가 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약간 반신반의 하였지만 이오덕 선생이 누군가. 그런 농담이나 실없는 소리를 하고 다니실 분이 절대로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면 그런 고지식한 어른이 아니던가.

아무튼 나는 약간 긴 《강아지똥》을 저학년 아이들이 읽기 쉽게 다소 줄이고 다듬은 다음, 그것을 작가 본인에게 허락받기 위해, 인사도 드릴 겸하여, 권선생 더러 서울 나들이라도 한번 하셨으면 했는데, 이오덕 선생의 말씀인즉슨 본인의 몸이 불편하셔서 수십년째 일체 먼길 외출을 삼가시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줄인 원고를 들고 그이가 계신 안동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추수도 끝난 지 한참 지난 어느 늦가을이었다.

나는 예의를 차린답시고 평소에 하지 않던 양복에 넥타이까지 한 정장 차림으로 버스를 타고 이오덕 선생이 막연하게 가르쳐주신 주소를 따라 권선생을 찾아 떠났다. 이오덕 선생이 가르쳐주신 주소로 말할 것 같으면, 안동에 가서 김서방을 찾아보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 말하자면 안동군 일직면에 가서 거기 교회에서 종지기를 하는 동화작가 권아무개를 찾아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그런 것을 꼬치꼬치 묻고 점검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가보면 만나겠지, 하는 심정으로 그냥 나섰던 것이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뚫려 지방 어디를 가든 횅하니,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을터지만 그때만 해도 안동을 가려면 버스를 타고 지방 도로를 따라 온종일을 달려야 했다.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국도에는 늦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고 있었다. 안동에 도착하여 다시 일직면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한참을 달려서 어딘가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니 약간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어디 가서 물어볼 마땅한 데도 없었다. 그래서 우선 다짜고짜 아무 구멍가게나 들어가서 이 부근에 동화 쓰시는 권아무개 선생이라는 분 있어요? 하고 물었더니 가게 안에 앉아있던 촌로들 몇이 고개를 외로 틀고 서로 바라보며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 종이문패를 붙인 권정생

“교선생의 흙집회에서 종을 치며 사신다고 들었는데…..”
나는 그이들의 눈빛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가만있자…. 저어기 사는 그 영감인지 몰라.”

그리고는 안노인 한분이 일어나 문 밖으로 나오며 길 끝 어딘가를 가르치셨다. 감나무가 심어진 길 따라 가면 마늘밭이 나오고 그 밭 옆으로 조금 더 가면 교회 십자가가 보일 것인즉 거기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안노인의 가르침대로 한참동안 걸어갔다. 과연 저 만치에 양철지붕 끝에 얌전히 고개를 내어 밀고 있는 십자가 하나가 보였다. 그곳으로 가보니 가꾸어진 교회라기 보다 그저 허름한 농가처럼 생긴 작은 건물과 옛날식 종루가 서있는 비좁은 마당이 나타났다. 나는 마치 초짜 도둑질이라도 나선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작은 마당에 붙은 방의 툇마루에 늙수레한 남자어른이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허름한 옷에 고무신을 신은 그이는 비쩍 말랐지만 한 눈에도 매우 기품있고 평화로운 인상을 한 사람이었다. 나는 첫눈에 그가 바로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내가 찾아왔던 바로 그 권정생 선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이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졌다.

“원고료가 왜 이리 많은게요? 배추 한포기 값이 얼만데…”

그이는 내가 서울 출판사에서 원고 허락 차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그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이의 방은 사방에 온통 책꽂이 없이 아슬아슬하게 쌓아둔 책 때문에 그나마 비좁은 방이 겨우 두 사람이 앉아있는데도 무릎이 서로 닿을 정도였다. 윗목에는 일인용 밥통 하나와 그릇 몇 개, 고무줄로 건전지를 뒤에서 묶어놓은 낡은 라디오 하나가 있었는데 얼른 보아도 살림은 그게 전부였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었더니 과연 이오덕 선생의 말씀대로 그이가 식사할 무렵이면 생쥐 한 마리가 쪼르르 달려 나와 함께 밥을 먹고 가곤 한다는 것이다. 어둑한 방에는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독특한 내음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나는 나의 양복 차림이 어쩐지 이 방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가방에서 가져온 원고를 꺼내 선생에게 보여드렸다. 그이는 돋보기를 쓰고 가만히 원고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됐다는 뜻이었다. 나는 속으로 출장(?) 온 보람을 느끼며 호주머니에서 원고료가 든 봉투를 꺼내어 그이에게 드렸다. 그때로서는 꽤 큰 원고료라 은근히 폼 내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봉투를 열어본 그이가 대뜸 하시는 말이, 원고료가 왜 이렇게 많으냐는 것이었다.

“거짓말 잘하는 어른은 보기도 싫었습니다. 나 자신이 어린이가 되어 어린이와 함께 살다 죽겠습니다. …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을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 (권정생 선생, 1973년 2월8일 이오덕 선생과의 편지에서)

“예?”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이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원고료가 적다고 불만을 표하는 필자는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원고료가 많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권 선생은 이어서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배추 한포기 값이 얼만데…..” 그러니까, 배추 한포기에 드는 농사꾼의 품에 비해 자신의 원고료는 터무니없이 높다는 뜻이 아닌가. 그리고는 봉투를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책 위에 던져 놓으셨다. 나는 본의 아니게 죄 지은 꼴이 되어 앉아 있었다. 더구나 양복쟁이의 반지르르한 나의 외모가 더욱 나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슴 안 쪽 어디메선가 어쩐지 통쾌한 웃음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느끼한 양식 종류를 먹고 나서 깍두기 김치 한 조각을 와드득 씹어 먹는 느낌이었다.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런 방에서 얼마의 세월을 흘러 보냈던가. 영점 칠(0.7)평의 어두운 감옥. 아무 장식도, 물건도 없이 단지 책 몇 권만 놓인 그 가난한 방…. 나는 그이의 그 방에서 오래간만에 그런 평화를 느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나중의 일이지만, 어느 방송국에서 ‘느낌표’라는 것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그 속에 책 추천하는 코너가 있는데 여기에 한번 선정되면 수 십 만부의 책이 순식간에 나가는 것이 관례였다. 말하자면 출판사나 저자나 갑자기 돈방석에 앉는 것이었다. 물론 그 중에 삼분의 이 이상이 벽지 도서관 건립에 희사하게 되어 있지만 그리고 나서도 남는 것이 보통 억대는 넘었다. 그런데 여기서 권선생의 아무개책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방송사 피디는 자랑스럽게, 그리고 약간은 거만한 마음으로, 그 사실을 알리려고 그이에게 전화를 넣었다. 그런데 권선생의 대답은 일언지하 왈, “하지 마세요” 였다. 당황한 것은 피디였다. 설명을 하고 사정을 하였지만 대답은 끝내 노(No)였다. 자신의 책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였다. 이것은 출판계에 적지 않는 화제가 되었던 너무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이다. 아마 그 피디 역시 내가 이십여년 전 그날 맞았던 그 당혹감을 맛보았을지 모른다.

이 시대의 은자(隱者), 영남삼현(嶺南三賢)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말없이 앉아있다 시간이 어느 정도 되어 이제 나오려고 하자 그이가 먼저 일어나시더니 선반에서 부시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었다.

“먼 길 오셨는데 대접해 드릴 것도 없고…. 가면서 입맛이나 다시세요.”

무언가 하고 보니 대꼬챙이에 곱게 꿴 곶감 꾸러미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곶감인지라 언감생심 얼른 받아서 가방에다 넣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이는 고무신을 끌고 버스가 오는 한길까지 뒤따라 마중을 나와 주셨다. 벌써 오후도 기울어 날이 저물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기다려 한길 가에 무심히 서있었는데, 마침 저녁노을이 길가 탱자나무 울타리 위로 붉게 무너지고 있었다. 권선생의 흰 머리 위에도 노을이 물들었다. 차갑지만 선선한 바람이 한길을 따라 불어왔다. 그이의 흰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나는 그 순간, 그이야말로 이 시대에 드물게 남아있는 은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이가 준 곶감 맛은 지금까지도 곶감을 먹을 때면 아련한 추억처럼 떠오른다.

 ▲ 더운 여름 날 흙집 문 앞의 권정생 선생

 나는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이랑,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를 쓰셨던 전우익 선생과 권정생 선생, 이 세분을 일컬어 영남삼현(嶺南三賢)이라 부르고 싶다. 각기 다른 삶을 사셨고, 성격도 다르지만 그분들이야말로 평생 변함없이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살아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분들을 보면 마치 이 산하의 도처에 굳건하고 자리를 지키고 아름답게 늙어가는 고목과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고집불통인 이오덕 선생은 자신의 충주 돌집 한쪽에 권정생 선생을 위해 손수 흙집을 지어놓으셨다. 불편한 몸을 감안하셔서 정말 아늑하고 편하게 지어놓으셨던 것이다. 두 분의 우정으로 말하자면 관포지교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권선생은 지금도 여전히 그 비좁은 교회 종지기 방에서 살고 계신다. 이십여년 전에 콩팥과 방광 결핵 수술을 받고 단지 석달만 살면 잘 살거라는 의사의 판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자신과 가난한 이웃, 그리고 《몽실 언니》에 나오는 것처럼 불행했던 이 나라의 역사를 사랑하며 살아오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그이의 가난과 낮은 마음이 지금까지 그이의 생명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자산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너무나 쉽게 가질 수 있지만 아무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자산이다. 다음은 권선생께서 이십여년 전 동화집 《강아지똥》의 서문에 쓰셨던 글이다.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 마당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버린 끝에 참다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됩니다. 너무도 불쌍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어머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김영현

1955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창작과비평사 ’14인 신작소설집’에 단편「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1990),「해남 가는 길」(1992),「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95)「내 마음의 망명정부」(1998), 장편「풋사랑」(1993), 시소설「짜라투 스트라의 사랑」(1996), 시집「겨울 바다」(1988),「남해 엽서」(1994)등이 있으며, 1990년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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