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어서 제 맛 나는 사람들

박혜란 (월간 샘터 기자)


▲김요섭씨(56)



▲석민호씨(50)와 아들 석동훈군 친구들



▲나주봉씨(51)와 아내 김선녀씨



▲정종련씨(66)


시간만이 옥석을 구분하는 감별사


‘생명의 전화’에서 전화 상담 봉사를 하는 손수정씨(60세)는 29년 동안 수 많은 사람의 상처에 귀기울여 왔다. 편지 최다우송 한국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정종련씨(66세)는 무려 40년간 소외된 이웃에게 따뜻한 관심을 담은 편지를 보냈으며, 김요섭씨(56세)는 사재를 털어 산 책을 20년 넘게 교도소에 보내고 있다. 경남 마산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는 석민호씨(50세)는 불우한 이웃에게 빵을 나눈 지 햇수로 20년, 올해 스무 살이 된 그의 아들 석동훈군은 직접 만든 꽈배기를 들고 소외된 이웃을 찾은 지도 10년이 넘는다. 또 나주봉씨51세)는 서울 청량리역 앞에서 15년 넘게 미아 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가끔 세상의 잣대마저도 끊임없이 변하고, 무엇하나 확실하고 절대적인 것이 없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시간’만큼은 깐깐하고 엄격한 감별사의 역할을 하리라고 믿는 편이다. 시간이 지나면 옥석은 가려지게 마련이고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간 교양지 기자인 나는 취재 대상을 찾을 때, 묵은(?) 사람을 선호한다.


한때 한 개그맨이 이런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다. “저희 연변에서는 몇 십 년 묵은 건 쳐주지도 않습네다. 한 오백 년은 묵어야 쪼끔 쳐줍네다.” 나 역시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10년 이하의 경력은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참으로 오만방자하고 주제넘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게다가 나 역시 10년 경력이 안 되므로 심지어 자격 미달이다). 다만 나는 몹시 불완전한 인간이고, 앞서 말했듯이 확실하고 절대적인 잣대를 찾기 힘든 시기이기에, 오직 내가 믿고 의지할 것은 ‘시간의 검증’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절박하게 매달릴 뿐이다.


나는 발행일이 한참 지난 간행물에서 ‘묵은 기사’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 짤막한 기사에는 어떤 이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가치 있는 선행을 하고 있으며, 그러기를 5년째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사연의 주인공은 지금쯤은 이미 10년 넘게 그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짤막한 기사만으로는 그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을 알 수 없어 궁금증은 더해만 간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아직도 그가 그 일을 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어렵게 알아낸 연락처를 눈앞에 놓고 한참을 망설이다 수화기를 든다. “선생님, 아직도 그 일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는데 혹시라도 상대방이 쑥스러운 목소리로 “아, 그거요. 제가 살다 보니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지금은 그 일을 할 형편이 못 되서…”라고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기라도 한다면 서로가 얼마나 민망한 상황인가. 사실 그 사람이 지금은 예전의 선행을 지속하지 않더라도 몇 년, 아니 단 하루라도 남을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단지 10년 넘게 그 일을 지속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죄책감이나 마음의 짐을 얻게 되고 심지어 그 발뒤꿈치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나에게 구차한 변명까지 늘어놓아야 하다니!


그런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딱 한 경우만 제외하고는 내 전화를 받은 옛 기사 속의 주인공은 모두가 변함없이 그 일을 해오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아, 네. 지금도 그냥저냥 하고 있습니다”라는 겸손한 대답이 들리는 순간, 나는 무척이나 고마운 마음이 들고 묘한 안도감마저 든다.


마을문고를 운영하는 시각장애인의 그 마음은...


올 초에 책상 정리를 하다가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책이 여러 권 나오기에 모아서 전북 김제 남포리에 사는 오윤택씨(45세)에게 부쳤다. 그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20년 넘게 마을문고를 운영해오고 있다. 그와 연락한 지 2년이 넘었지만, 나는 그가 그 고즈넉한 마을의 도서관을 여전히 지키고 있을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며칠 후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보낸 책을 잘 받았다는 전화였다. 그 역시 오래된 기사 가운데서 찾아낸 사람이다.


 


오윤택씨는 하루하루 품을 팔아서 번 돈으로 ‘남포마을문고’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4백여 권의 책으로 처음 시작된 마을문고는 이제 가장 성공적인 농촌마을문고로 꼽히게 되었다. 그곳은 마을 청소년들의 공부방이자 주민들의 사랑방이고, 정보화 교육 등을 무료로 실시하는 마을의 문화센터이다.


그런데 정작 오윤택씨 자신은 그렇게 피땀 흘려 채워놓은 마을문고의 책을 한 권도 읽을 수가 없다. 그는 선천성 각막포도염으로 시력을 잃은 1급 시각장애인으로, 오른쪽 눈으로 사물의 희미한 형체만 겨우 분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누구도 그를 장애인으로서 특별히 대우해야 한다거나 돌봐 주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크다. 마을문고 운영뿐만 아니라, 장애인협회와 김제청년연합회 관련 업무에서부터 마을 축제, 경로잔치에 이르기까지 그가 없으면 마을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유년시절 아픔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이웃 사랑


그는 특히 마을의 학생들이나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다. 자신이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열네 살 때부터 염전, 버섯공장, 미역공장, 막노동판 등을 전전하며 일을 하느라 학교에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자존심 세고 공부 욕심도 많았던 그는 패배의식과 자격지심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장학회를 만들고 청년회를 만들어 마을의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그는 대리만족 이상의 행복을 느꼈다.


 그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좋은 점도 있다고 너스레를 떤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상대가 지위가 높은 사람이건 누구건 먼저 굽실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그는 동네에서 도박을 몰아내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고, 농협 정미소의 계량 조작 횡포를 바로잡기도 했으며, 경지 정리 땐 부실 공사를 막기 위해 주민감시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또 마을에 혐오 공해 시설인 대규모 양계장이 들어서는 것에 반대하는 힘들고 지루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본인 스스로는 모두 ‘눈에 뵈는 게 없어’ 한 일이라지만, 그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의 믿음직한 ‘눈’ 역할을 해왔음을 이야기하는 데 굳이 그의 장애를 강조할 필요는 없는 듯했다.


본인이 환장을 해서 시작한 일도 얼마 가지 못할 때가 많다.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한 일도 몇 십 년씩 지속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살다 보면 나 자신의 형편도 한결같을 수 없는데, 남과 나누는 일을, 그것도 생업에 종사하면서 오랜 세월 한결같이 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 시간은 때론 남 다른 길을 간다는 외로움을 견디며, 자기 환멸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얄팍한 대가를 바랐다면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 묵어서 깊은 맛 나는 사람들을 어찌 마음속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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