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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월드 지하광장 아저씨

김영현 (방송 작가)

벌써 12년이나 된 얘깁니다.

그 시절 저는 대학은 나왔으나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백수로 2년을 아무데나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다가는 경제잡지사를 들어갔으나 그 또한 적응하질 못하고 1년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MBC방송문화원이라는 학원을 등록했고, 그 곳에서 덜컥 새로 생기는 퀴즈프로그램의 아이디어맨으로 뽑혔습니다. 그렇게 방송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뽑힐 때까지는 좋았습니다. 아니 처음 방송국을 들어간 날도 좋았습니다. 들어간 날 김혜자씨를 보았습니다. 장동건씨도 보았구요. 인사를 했습니다. 제 인사까지 받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새 세상이 열리나보다 생각했습니다.

어려웠던 사회 적응

그런데 착각이었습니다. 아이디어 맨이 아무런 아이디어도 낼 수가 없었으니까요. 정확하게는 아이디어를 낼 수 없다기보다는 입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우선은 제가 방송이라는 것을 너무 모르고 들어왔던 터라 이 아이디어가 방송이 가능한 것인지 불가능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의 아마추어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이디어 회의란 것이 그런 사람들을 보듬어 함께 가는 놀이터가 아니고 당장 다음주의 내용을 결정해야 하는 전쟁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쟁터에서 저는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과장하여 입을 떼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은 아니고 같이 들어온 동료도 저와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저희들은 윗선배들과 연출자들로부터 ‘묵묵이’ ‘부답이’라는 핀잔까지 듣게 됐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두 달이 지나갔습니다. 저는 한계에 다다랐고 ‘내 갈 길이 아닌가 보다’ 라는 생각과 ‘여기서도 나가면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정말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날도 역시 그런 날이었습니다. 회의시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일을 마치고, 나와 내 동료는 30번 좌석버스를 타고 집엘 가고 있었습니다. 흑석동부터 막히기 시작한 길은 흑석동에서 압구정동까지 가는데 두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렇잖아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두사람은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신경질을 부리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그래도 길은 뚫리지 않고 더욱 더 막혀 압구정역에서 한 정거장 가는데도 30분이 걸렸습니다. 거기서부터 울기 시작한 듯합니다. 누가 먼저인지도 알 수 없으나 둘은 울기 시작했고, 우리가 내려야 할 역인 롯데월드정류소까지 사람들이 보든 말든 울면서 갔습니다. 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포기의 눈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는 저는 롯데월드 지하차도를 터덜터덜 걸어 내려와 복받친 감정을 추스르려 지하차도의 의자에 잠시 걸터앉았습니다.

지하광장 아저씨

 

그때였습니다. 정말 개미보다도 작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장갑이 천원” “장갑이 천원” “공장이 망했습니다” 저는 두리번거리며 어디서 나는 소린가 찾아 보았습니다. 원래 그곳은 잡상인들이 많은 곳이고, 모두들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곳이라 그런 작은 소리가 더 이상하게 들렸던가 봅니다. 아무튼 저는 울던 나도 잊은 채 찾기 시작했습니다. 없었습니다. ‘아닌가?’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때 보았습니다. 눈에는 눈물이 고인 채 털장갑 몇 개를 들고 개미만한 소리를 내고 있는 아저씨를요. 잠시 쉬었다가는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외쳐보려 하나 외쳐지지 않는 아저씨를요. 그 아저씨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그렇게 해보려고,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멍하니 아저씨가 떠날때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아마도 그 아저씨는 망했거나 회사에서 잘린 사람일 겁니다. 생전 해보지 않던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사람일겁니다. 또 자신의 천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저씨는 아무도 들리지 않을 소리로 계속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정작 바뀐 것은 나였습니다. 그날 밤 난 우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느닷없이 밤을 새며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노트에 적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회의시간에 ‘노트’를 보여줬습니다. 선배가 몇 개는 비웃고 몇 개는 칭찬했습니다. 다음 날도 전 노트에 적어 갔습니다. 그렇게 점점 칭찬의 횟수가 늘자 드디어 내 입이 터졌습니다. “선배님 그거 재미없어요.”

그 때 그 아저씨의 모습에서 제가 무엇을 느꼈던 것인지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모름지기 “골라요. 골라요. 일천. 삼천” 하고 경쾌히 호객을 하는 프로 세일즈맨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썩어가는 쓰레기 더미 사이나 흙냄새 하나 없는 콘크리트 길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연약한 새 싹의 숨소리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찌보면 저는 그 당시 저 스스로를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의 상황에 처했던 것입니다. 단지 손 발과 생체적인 신경을 통제할 수 없는 것만이 장애가 아니라 한계상황에 압도되어 굴복하고 싶은 절망이 장애인지도 모릅니다. 그 아저씨의 모습에서 그러한 저 자신을 보고 불현듯 죽어가는 생명력을 되찾은 것인지 모릅니다.

이제 방송작가의 길로 들어선지도 10여년이 됐고, 방송국에서 주는 상도 받아본 작가가 됐지만 아직도 자주 그 아저씨를 떠올립니다. 그 아저씨는 내가 작가생활을 계속 하게 한 일등공신일뿐더러, 참으로 괴로웠을 시점에 그 아저씨가 보여준 노력과 눈물은 내게는 평생 감동이며, 변화의 힘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대장금」의 산고 이뤄 낸 김영현 작가

방송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현씨. 2004년 3월 텔레비젼 드라마 사상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막을 내린「대장금」의 극본을 쓴 주인공입니다. 푸르메재단에 기고한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녀는 2년간 방황의 세월을 보낸 끝에 정착한 방송작가로서 일이 매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녀도 사회 생활에 부대끼며 사는 것이 녹록하지 않았나 봅니다. 보통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남을 미워하거나 자신에 대한 방어본능으로 여러가지 논리와 이념 등 무거운 껍데기를 입다가 오히려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설령 악인(惡人)일지라도 뚜렷한 원칙이 있는 악인은 상관 없다.” “권력을 탐해 스스로를 괴롭히며 애꿎은 이들의 피와 눈물을 그러쥐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연민을 느낀다” 고 말하는 김영현씨는 복잡한 논리보다는 명쾌한 직관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 어머니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해 ‘어머니’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대장금」의 핵심 주제”라고 말하는 그녀는 분명 생명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음식을 만드는 이, 의술을 행하는 이의 마음은 어머니의 것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긍휼(矜恤)히 여기는 것이 곧 모성(母性)” 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푸르메재단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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