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속의 다카야마 도서관

[일본 나고야·다카야마 장애인 천국을 가다] 5편 다카야마 도서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 康成)의 소설 <雪國>의 첫 문장이다. 야스나리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해 일본 문학의 자존심을 세웠다. 그의 소설은 눈이 많이 오는 고장 <니가타현(新潟縣)>이 배경이다. 그런데 니가타뿐 아니라 니카타 서남부에 위치한 <기후현(岐阜縣)>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울 설국이다.



일본의 중경(中京)으로 불리우는 나고야(名古屋)를 출발해 우리를 태운 버스가 1시간 남짓 달리자 지대가 높아지면서 높은 산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3000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하얀 눈을 이고 서있다. 전라남도 넓이의 기후현에는 3,000미터가 넘는 고봉 21개 중 11개가 있다니 말 그대로 일본 북알프스이다. 그런데 안나푸르나와 마테호른 같이 범접할 수 없는 깍아 지른 절벽과 위압적인 모습의 돌산이 아니라 저녁 먹고 마실가는 마을뒷산처럼 동글동글하고 포근하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비가 눈으로 변했다. 눈발은 산악 풍경을 후기인상파가 그린 한 폭의 점묘화로 만들었다. 버스를 타고 갯가에 내리면 갑자기 비린내가 왈칵 밀려오듯이 차창을 여니 숲으로부터 축축한 나무 내음이 쏟아져 들어온다. 자작나무와 편백나무 숲에서 오는 피톤치트 인가보다. 1시간 반을 더 달려 도착한 곳은 북쪽 작은 분지 속의 도시 다카야마시(高山市). 대낮인데 도로와 집들이 눈 속에 파묻혀 있다. 설산(雪山) 속 설국(雪國)이다.



다카야마시에는 300년 전부터 막부 정권으로부터 무사계급이 파견돼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세운 직할관청 진야(陣屋)를 중심으로 지금도 2층으로 된 일본 전통목조 거리가 아름답게 보전돼 있다. 옛날 거리에 들어서자 200년이 넘은 집들이 나타난다. 이곳이 일본 천년의 수도인 교토(京都)를 본 따 작은 교토라고 불리우는 이유다. 갈색과 흑색이 칠해진 전통가옥이 빼곡히 들어선 골목 양옆에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작은 도랑에 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다.


눈과 비가 많이 오는 고장인 만큼 도시를 설계할 때 건물 처마 끝에서 직각으로 빗물이 떨어지도록 배수로를 설계했다고 한다. 일본인의 정밀함이 묻어난다. 이 도시의 오래된 집과 좁은 골목, 빨간 난간을 가진 <니카바시>다리가 배경이 되어 인기 TV 만화영화 <빙과>가 탄생했다고 한다. 이런 유명세 때문일까. 다카야마 거리에는 우리의 전주 한옥마을처럼 일본인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이 넘쳐난다.



카페와 초밥집, 주점으로 변한 전통거리를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니 지금까지 보아온 일본 전통가옥과 다른 근대 서양건축물이 나타났다. 초록색 너와 지붕과 흰색 벽체로 이루어진 웅장한 건물이다. 정문에는 환장관(煥章館)이라고 쓰여 있다. 바로 다카야마 시립 도서관이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시직원 다카히로 꾸츠이(葛井 孝弘) 씨는 “도서관 이름이 ‘학문을 밝힌다’라는 뜻으로 논어에서 따왔다.”고 소개한다. 남송시대 역대 중국 황제들의 도서관이 환장각(換章閣)이니 책과 학문을 소중히 여기는 다카야마 사람들의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도서관 주위에는 눈을 맞아 축축 처진 소나무의 모양을 바로 잡기 위해 높은 지주기둥을 세우고 새끼줄로 가지를 매달았다. 도서관 주위에 촛불을 밝혀 놓은 것 같다.



안내를 맡은 나카시마 마유미(中島 麻由美) 씨에 따르면 이 건물은 메이지(明治) 39년(1906년) 다카야마 여자초등학교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뒤 1969년 시민회관과 1990년 시민평생학습원으로 바뀌었다가 2004년 리모델링을 거쳐 도서관으로 개관하게 됐다.


다카야마 도서관의 특징은 외장과 내부가 나무결을 살린 목재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단풍나무 바닥과 자작나무의 아름다운 단면이 드러난 벽면, 나무로만 이루어진 안내데스크가 따뜻한 느낌을 준다. 나무의 온기가 살아있는 도서관이다.



단풍나무로 된 바닥에는 스테인레스 조각이 촘촘히 박혀있다. 점자블록이다. 점자는 도서관 입구부터 안내데스크와 서가로 이어져있다. 투박한 시멘트 블록이 아니라 스테인레스 점자라서 유난이 빛이 난다. 전혀 안보이는 전맹(全盲)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빛을 볼 수 있는 장애인이라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도서관 곳곳에 묻어난다. 우산꽂이에도 점자가 붙어있고 장애인과 어린이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책을 뽑아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꼬마 카터와 유모차도 도서관 입구에 나란히 놓여있다.



1층은 어린이 도서관이다. 이름도 <나무의 나라, 어린이도서관>이다. 좌석에는 아주머니와 노인의 모습도 보인다.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이면 장애인이나 노인이 사용하기는 더 편할 것이다. 다카나야 도서관은 32만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고 이중 4만 권이 동화책이라고 한다.


직원 다이몬(大門) 씨를 따라 나섰다. 어린이도서관 중앙에는 무성한 잎을 가진 느티나무가 헤라크레스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나무 뿌리에는 아이들이 앉을 수 있는 10여 개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꼬마들이 이곳에 앉아 책을 읽으면 시골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느티나무에 앉아 책을 읽는 것 같다. 그러다 스르륵 잠이 들면 느티나무가 살포시 안아줄 것 같다.


나무 주변에는 서가가 놓여 있다. 그런데 서가의 모양이 재미있다. 울긋불긋한 기관차로 연결된 10량의 객차 서가이다. 객차 지붕은 최신 동화책 전시대이다. 아이디어가 번뜩인다.



유리로 된 방에서는 털모자를 뒤집어쓴 어린이 4명이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 열심히 듣고 있다. 자원봉사자인 동네 아주머니가 들려주는 동화구연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책을 정리하고 청소를 해주는 것뿐 아니라 시각장애인이 원하는 책 내용을 녹음하고 동화책을 실감나게 읽어주는 재능기부가 이곳 도서관의 자랑이라고 한다. 지난해 동안 9만 건의 자원봉사가 이 도서관에서 이루어졌다니 다카야마 전시민이 한 번씩 자원봉사활동을 한 셈이다.


집 가까운 곳에 도서관이 있고 그곳에 친절하고 멋진 목소리를 가진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매일 동화책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유년시절이 행복할 것 같다. 매일이 힘들다면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부모님과 도서관을 찾아 원하는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다면 자라나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이몬 씨를 따라 어린이도서관 뒤편으로 가봤다.



작은 활자를 크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든 독서대를 비롯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을 만드는 스튜디오, 장애인이 책을 신청하면 원하는 날짜에 자원봉사자가 책을 읽어주는 대면 낭독실 등 어린이도서관 뒤에는 장애인 편의시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이 작은 도서관에 장애인이 원하는 책을 가져오면 자원봉사자가 책을 읽어주거나 점자책을 만드는 작업이 활성화되어 있다니 놀랍다.


이 도서관이 보유한 큰 활자로 된 책자는 2,545권, 점자도서는 601권이라고 한다. 노인 독자층을 겨냥해 큰 활자체 도서 출간이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시작됐는데 일본에서는 10여 년전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점자도서의 숫자가 의외로 적어 그 이유를 물어보니 장애인들이 원하는 책을 이 도서관에서 직접 점자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시골도서관에서 대단한 일이다.



다이몬 씨는 “점차 노년인구가 늘어나면서 현재 보유한 큰 활자도서가 크게 부족하지만 점차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한다. 다카야마의 인구 중 65세 이상의 노인인구는 29.2%로 2050년이 되면 50% 이상이 노인인구를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도서관에서도 이에 대비해 어린이나 장애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고령화 사회에 대비한 노인층의 수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도서관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연중무휴 문을 연다는 점이다. 지난해 개관 일수는 344일. 매월 1회와 크리스마스부터 새해 1월 1일까지 휴관하는 것을 제외하면 도서관 문은 늘 열려있다. 월요일이면 늘 문이 닫혀있고 연휴 때 책을 읽으려고 동네 도서관을 찾았다가 낭패를 본 기억이 선명하다. 불편하겠지만 우리나라도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쉬면 연중 도서관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도서관 운영관리를 전문 회사에 맡기는 점도 특이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를 안내하는 다이몬씨는 TRC라는 로고가 선명한 유니폼을 입고 있다. 다이몬 씨는 “일본 도서관유통서비스회사가 시로부터 다카야마 도서관을 위탁받아 모두 41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으며 다른 9개 분관에도 직원들이 파견돼 책 정리와 배송, 프로그램 운영 등 모든 행정업무를 맡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공무원이 운영하는 것보다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훨씬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기 때문에 비용도 적게 들고 시민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말한다. 일본 도서관 중 TRC가 위탁해 운영하는 도서관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하루 800명의 이용객을 위해 매년 2만 권의 책을 구입하고 41명의 직원이 거의 연중무휴로 일한다니 대단한 투자가 아닐 수 없다. 도서관을 직접 방문하지 않더라도 집으로 배달하는 서비스를 통해 연간 54만 권의 책을 대출하고 있다고 한다. 시민 한 사람이 연간 5권의 책을 읽고 있는 셈이다.



2층 일반 열람실로 가는 계단에는 노란색 조명이 밝게 빛난다. 해바라기를 표현한 스테인그라스 그림이다. 다카야마시가 배출한 유명 화가 히카게 케이(日影 圭) 씨의 작품이란다.


2층 인문학 코너에는 훨체어를 탄 장애인이 열심히 서가를 정리를 하고 있다. TRC직원이라고 한다.



창문에는 초록색 커튼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고, 서가에는 장애인 직원이 꼼꼼하게 책 정리를 하고 있고 1층에서는 동네 아주머니가 꼬마들을 모아놓고 동화책을 열심히 읽어주는 광경을 보면서 다카야마시가 몹시 좋아졌다.


*글=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

*사진= 다카야마 도서관 홈페이지, 정담빈 간사 (커뮤니케이션팀)


<다카야마 도서관(換章館)>

· 주      소 : 高山市 馬場町2 丁目 115番地

· 전      화 : 81-(0)577-32-3096

· 팩      스 : 81-(0)577-32-3098

· 홈페이지 : http://www.library.takayama.gifu.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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