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 ‘여성장애인 아름다운 피부모임’



“너 피부 좋아졌다. 화장품 바꿨어?” “이 립스틱은 어디 거야? 나도 발라보자!”

화장품은 여성들의 빠질 수 없는 대화 주제입니다. 대부분 가방 속에 화장품이 가득 든 파우치 하나쯤은 갖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 복지관을 이용하는 20대 여성들을 보면 하나같이 민낯입니다. 화장에는 도통 관심이 없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지난 8월, 복지관에서 여성장애인 모임을 지원한다는 안내문을 붙이자마자 신청서 한 부가 들어왔습니다.




‘모임명 : 아름다운 피부모임 / 모임내용 : 천연화장품 만들기 / 모임목적 : 여성답고 예쁘게 가꾸기 위해’

서툴러 보이지만 또박또박 써내려간 신청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지적장애가 있는 24살 희경 씨의 글씨였습니다. 또래 친구 4명과 함께 화장품에 대해 배워서 예쁜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청서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왜 지적장애가 있는 20대 여성들이 화장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걸까 하고 말입니다. 예쁘게 보이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똑같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서툴고 설레는 첫 걸음


주간보호를 이용하고 있는 막내 하은 씨, 바리스타로 일하는 희경 씨, 미경 씨,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용주 씨와 재록 씨. 장애정도가 르고 제각각 다른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의 관심사로 모인 그녀들의 모임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첫 모임은 서투름의 연속이었습니다. 장애를 이유로 늘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환경에서만 살아온 그녀들입니다. 스스로 모임을 갖고 이끌어가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내용으로 진행할지, 누구에게 조언을 구할지, 언제 어디에서 만나야 한 명도 빠짐없이 함께할 수 있을지. 어려운 일들 투성이였습니다.


누군가가 결정해 주길 기다리며 입을 다물고 있을 때도 있고 서로 의견을 내세우다가 다투기도 했습니다. 명확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고 서로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담당자로서 모임 방향을 잡아주기는 했지만, 그냥 그렇게 수많은 실패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성장을 지켜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패와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법이니까요.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나타난 변화



다행이 인근에 천연화장품을 만드는 공방에서 4번의 모임을 갖기로 했습니다. 복지관에서 준비된 프로그램에 참여만 하던 그녀들이 보통의 주민들처럼 모임을 갖는 것만으로도 참 기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모임이 진행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전에 모임 대표인 희경 씨가 공방 사장님과 일정과 내용을 논의한 후 회원들과 내용을 공유하며 모임을 이끌어나갔습니다. 사진촬영이나 회의록 작성 같은 역할도 스스로 나누어 맡았습니다. 모임 전날만 되면 쉴 새 없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세부적인 내용을 미리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삶을 주도할 기회를 빼앗았던 것 같아 사회복지사로서 반성이 되기도 했습니다.


내일은 한 뼘 더


마지막 모임이 진행되던 11월 26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맏언니 재록 씨와 미경 씨, 용주 씨는 길을 잘 모르는 하은 씨의 손을 꼭 잡고 공방에 도착했습니다. 희경 씨는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모임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작업은 붉은 색을 넣은 립밤 만들기였습니다. 색이 있는 화장품을 가져본 적 없는 그녀들은 무척 들떠보였습니다.



공방 사장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정성껏 자신들만을 위한 화장품을 만들었습니다. 저울로 정확한 양을 재고 스포이드로 한 방울 한 방울 정확하게 섞어 넣는 미세한 작업들은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달라졌습니다. 좌충우돌이었던 모임 초반의 모습은 사라지고 차분하게 서로 도와가며 조금씩 해냈습니다. 작업을 노련하게 하는 사람은 없어도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다섯 사람은 한 뼘 더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완성된 립밤을 받아들고 신나는 목소리로 서로 이야기 합니다. “나 예뻐진 거 같지 않아? 내 피부 한번 만져봐.” 자꾸만 거울을 보며 얼굴을 매만집니다. 복지관 연말 모임에는 예쁜 모습으로 나가자고 누군가 말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습니다.


꾸미기 좋아하고 연애도 하고 싶은 평범한 20대. 빨간 립밤을 바르고 자신 있는 모습으로 스스로 일궈나갈 그녀들의 내일이 기대됩니다.

* 글/ 사진= 이명희 사회복지사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서비스지원팀)


※ 지난 11월 26일, 마지막 모임을 끝내고 남긴 기록입니다.


 



▲모임 마지막 날 (왼쪽부터) 박미경 씨, 심용주 씨, 김희경 씨, 김하은 씨, 화장품 제작 강사 공병일 씨, 유재록 씨.

정규 모임은 마지막이지만 앞으로도 2주에 한 번 모임을 갖기로 했다.


 



 


 


기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