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선 장애인 캠페인] 이승복 박사, 체조선수에서 세계 최고 병원의 의사로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마음이 꺾인’ 사람들 구하는 ‘슈퍼맨’ 의사


체조선수에서 세계 최고 병원의 의사로


⑨ 미국 존스홉킨스대 병원 이승복 박사


» 미국 존스홉킨스대 병원 이승복 박사스홉킨스대 병원 이승복 박사


“제가 체조를 다시 할 수 있습니까? 앞으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흥분해서 내가 물었습니다.


“승복 씨! 당신은 남은 생애를 휠체어에서 보내야합니다. 당신 주치의로서 내가 판단하기에 당신은 앞으로 체조는 물론이고, 혼자 걸을 수도, 일어설 수도 없습니다.”


갑자기 가슴 한복판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나는 뉴욕대 병원 회의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쟁반을 집어던졌습니다. 그 위에 놓여있던 유리컵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지며 유리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회의 중이던 재활의학과 의사들이 깜짝 놀라 벽 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열여덟 살의 나에게 체조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없었습니다. 체조는 나에게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나에게 체조는 물론, 혼자 걸을 수도, 일어설 수도 없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의 삶은 오로지 체조에 바쳐졌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자랑스런 태극마크를 달고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들으며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부질없게 됐습니다.


» 이승복 박사가 전미체조청소년대표 때의 모습.


미국 동부 볼티모어에 있는 세계 최고의 존스홉킨스대 병원에 들어서면 아주 특별한 의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병원 주차장을 지키는 두 명의 흑인 안내원에게 “슈퍼맨 의사가 어느 있느냐”고 물으면 내가 일하는 재활병동으로 안내해줄 것입니다.


나는 손가락 근육이 마비돼 도구를 이용해야 환자 차트를 쓸 수 있습니다. 주문해 특수 제작한 휠체어를 타고 있습니다. 척추신경이 끊어지는 사고로 내 가슴 아래가 마비된 중증장애인이 됐지만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꿈이 이루어져 나와 같은 처지의 장애인들을 돌보는 의사가 됐습니다.


제 이야기가 한국 드라마를 통해 알려지면서 한국은 물론 해외 동포로부터 편지와 전화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주로 ‘장애환자의 입장에서 진료를 해달라’는 격려와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는’ 감사입니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에도 나를 ‘의지의 한국인’으로 소개했습니다.


서울에서 열린 여름신앙캠프에서 알게 된 김양원 씨와 2006년 결혼해 병원 인근의 아파트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내 일과는 새벽 6시부터 시작됩니다. 오전 8시 병원에 출근해 저녁 8시 집에 도착할 때 까지 회진과 강의, 외래진료, 환자 상담, 세미나 등 일분일초가 그야말로 전쟁입니다. 연구실과 회의실에서 점심과 저녁을 샌드위치로 때워야 하지만 내 표정은 밝기만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고 내가 돌봐야 할 환자가 있으니까요.”


» 지난 2006년 신앙캠프에서 알게 된 김양원 씨와 결혼한 이승복 박사.


지난달 병원 응급실에 한국인 가족이 교통사고로 실려왔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습니다. 환자는 자식 교육 때문에 미국에 온 30대 중반의 어머니와 두 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사고 직후 숨졌지만 7살과 9살 난 두 딸은 혼수 상태였습니다.


나는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이국땅에서 한국 사람들이 왜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고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달려온 가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위로하고 주치의를 만나 환자의 상태를 통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면서 제가 사고를 당했을 때처럼 많이 힘들었습니다.


환자들은 물론 미국인 의사들까지 나를 통해 희망을 본다고 말합니다. 매일 아침 존스홉킨스대 병원에 휠체어를 타고 회진하는 나는 환자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1983년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집에 잠깐 들른 나는 이날 짐을 싸서 4시간 거리에 있는 체조연습장으로 향했습니다. 이틀 뒤인 6일이 18번째 내 생일이어서 가족 모두 집에 머물길 바랐지만 나는 뿌리치고 일어났습니다.


떠나는 나에게 아버진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웬 체조냐?”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아버진 제가 열심히 공부해 전문직이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체조선수의 길을 걷기 위해 3년 전부터 집을 떠나 합숙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아버진 늘 화난 얼굴로 나를 대했습니다.


서울에서 약사로 일했던 아버진 더 나은 삶을 찾아 우리 가족을 이끌고 1973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기대와 달리 우리 가족을 기다린 것은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엘리트였던 아버진 불과 몇 년 만에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했고 어머니도 일에 지쳐 집에 오시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 모두 왜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에 온 지 며칠 만에 나는 소년가장이 돼서 두 동생을 챙겨야했습니다. 부모님은 하루 20시간을 일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장남인 내가 변호사나 의사가 돼서 집안을 일으켜주길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체조선수로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엄격하게 대하셨지요.


우연히 동네 YMCA에 갔다가 어깨 너머로 체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유연했던 나는 체조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체조를 시작한 지 불과 4년 만에 미국 체조챔피언대회와 전미체조대회에 출전해 마루와 도마에서 1등과 2등을 차지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7살 때에는 미국 올림픽 예비선수로 선정되면서 미시간대, UCLA, 스탠포드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등 많은 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습니다. 나의 미래는 푸른 하늘처럼 맑았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한국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의 따겠다는 내 꿈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 이민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어린 시절 이승복 박사(아래줄 가운데)의 가족사진.


18번째 생일을 앞두고 7월 4일 훈련을 하러 가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대뜸 “미역국도 먹지 않고 왜 하필이면 운동이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 말이 송곳처럼 어린 제 가슴을 질렀습니다. 속상한 마음에서 체육관에 도착했지만 이번에는 코치가 잔뜩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훈련시간을 늦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질타에, 미국 코치의 싸늘한 눈빛까지 나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두 사람에게 보란 듯이 그동안 피나게 연습해온 고난도 기술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공중에서 한 바퀴와 3/4회전을 하는 고난도 기술 <살토>를 실현하기 마루 한복판으로 달려갔습니다. 몸이 하늘로 솟구쳤습니다. 나는 ‘아버지! 코치님! 나를 봐주세요’ 하고 속으로 외쳤습니다.


잠시 후 ‘쿵’하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린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의사에게 들으니 너무 빨리 떨어지면서 턱이 마룻바닥에 부딪혀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척수 사이의 신경조직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나는 일어서려고 버둥거렸지만 눈을 깜박였다고 합니다.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인근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나는 뉴욕대병원에 3개월간 꼼짝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참 길고 긴 시간이었습니다. 3개월은 내가 살아온 열여덟 해 보다 길었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내 안에 남은 건 분노뿐이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9개월 간 굳어진 손가락만 구부리는 훈련을 받았다고 상상해보세요. 지금 피나는 연습을 해도 부족한데……. 병원한구석에 내던져진 느낌이었습니다.”


기력을 조금씩 회복하자 나는 미친 듯이 훨체어를 굴려 치료실과 병원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낯선 미국에서 체조가 어린 시절 내 삶의 탈출구였듯이, 이번에는 훨체어를 타는 것이 탈출구였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들은 여전히 먹고살기에 바빴고 두 동생이 공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저는 늘 혼자였습니다.


휠체어조차 없었다면 미쳤을 것 같아요. 정말 안가본데가 없습니다. 미로 같은 병원복도 모서리를 돌아가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나에게 휠체어는 체조였고 휠체어를 통해 만나는 세상은 사고 나기 전 철봉과 마루 경기였습니다. 살아있는 신경마저 뻣뻣하게 굳어질까봐 나는 움직이고 또 움직였습니다.


하루 종일 재활치료에 매달리면서 사고 난 지 일 년 만에 비로소 가슴 아래가 마비됐고 손가락 신경이 자유롭지 못한 중증장애인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날 난 참 많이 울었습니다.


» 사고 이후 손 근육이 굳어져 특수보조기구를 사용해야 글씨를 쓸 수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제가 중증장애인이 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렇게 마음이 평온해질 수 없었습니다. 어릴 때 믿어오던 기독교 신앙도 이때부터 독실해져서 처음으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칭찬했습니다. 그때 정말 나에겐 칭찬이 필요했습니다. 혼자 걷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나에게 의사와 치료사들의 칭찬은 마음의 위안이었고, 삶을 지탱해주는 밥이고 생명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비록 육신은 일어설 수 없지만 또 다른 꿈을 향해 일어서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고통스러운 병원생활 중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애니’라는 조무사입니다. 나는 애니의 도움을 받아 매일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더 이상 먹여주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녀가 앞으론 혼자 먹어야 한다는 말이 마치 나를 세상에 내동댕이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화도 내고, 도와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녀는 절대 음식을 먹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제게 앞으로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친 거지요. 그때 내가 벌떡 일어선 것입니다. 눈물 흘리며 혼자 먹는 연습을 한 끝에 기적처럼 흘리지 않고 혼자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병원에는 다행히 저와 같이 학교에 못가는 환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뉴욕대 병원에도 교사 4명이 문학과 수학, 역사 등을 가르쳤는데 그중에 영문학을 가르치는 엘리스라는 할머니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과 나는 영미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엘리스 선생님은 저에게 미국 대학 진학시험(SAT)을 준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 장애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이승복 박사


대학입시 공부가 쉽지 않았습니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같은 자세로 앉아있으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뉴욕대의 재활병원을 세운 하워드 러스크 박사의 자서전 <돌봐야 할 세상(A World to Care for)>을 읽게 됐습니다. 내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무엇을 공부할 지 고민하던 나에게 의학은 횃불과도 같았습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건 나에게 체조에서의 올림픽 금메달과 같았습니다.


1년 만에 퇴원한 나는 하루 종일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의대입시를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내 몸이었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고통스러울 때면 공부하다가 죽자고 다짐했습니다. 5개월의 준비 끝에 정말 기적처럼 원하는 점수를 받아 뉴욕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콜럼비아대에서 공중보건학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콜럼비아대에서 졸업하면서 나는 30여개 대학 의대에 입학원서를 보냈습니다. 이들 대학이 중증장애인을 받아줄 지 걱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면접을 잘 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넉 달 동안 콜럼비아대 의대에 있는 교수와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면접연습을 했습니다. 내가 왜 의대에 들어가려 하는지, 얼마나 열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대답하고 표정 짓는 연습까지 했습니다.


사고난지 10년만인 1993년 4월 마침내 다트머스 의대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야. 나는 의사가 되는 거야’하고 다짐했습니다.


지난해 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제는 서울에 살고 계신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의대시절 주사 놓는 연습을 할 때 직접 자기 엉덩이를 빌려줘 실습하게 했을 때를 기억하며 “살다보니 이렇게 좋은 시절이 있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의대공부는 나에게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줬습니다. 한 달 동안 읽어야할 책이 제 키 정도였습니다. 호박에다 정맥주사를 놓은 연습을 하다보면 새벽이 밝아오고 했으니까요.


그 과정을 거쳐 나는 다트머스 의대와 하버드 의대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계 최고의 존스홉킨스대 병원의 재활의학 수석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 인터넷 팬카페 회원들 역시 이승복 박사를 슈퍼맨이라고 부르며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


수많은 고통이 있었지만 내 희망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에게 육신의 장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없다는 마음속의 장애에 갇히는 것이 무서운 일이지요. 사고로 나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얻었습니다.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아마 의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에게 사고 전과 지금 중 하나를 선택을 하라고 하면 지금의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장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후 그것을 축복이라고 여기기로 했습니다.


절망한 채 병원에 실려 온 환자들은 나를 보면서 희망을 갖는다고 합니다. 내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환자들 앞에서 씩씩하게 휠체어를 밀며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내 사명입니다. 나는 멀쩡한(?) 팔을 놔두고 전통휠체어에 편히 앉아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곤 합니다. 자유롭지 않은 두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자기의 길을 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존스홉킨스 병원 재활병동에 들어서면 여러분은 아주 특별한 의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슈퍼맨 닥터 리, 저 이승복 박사입니다.


이승복 박사 프로필


1965년 서울 출생


1973년 미국 이민(뉴욕 퀸스구역)


1976년 YMCA에서 체조를 배우기 시작함


1980년 펜실베니아주 파켓 국립체조훈련원 입소


1981년 미국체조챔피언대회 마루1등, 도마2등(종합3위)


1982년 국제친선주니어체조대회 종합3위


전미체조대회 마루와 도마에서 금메달 종합3위


올림픽 미국체조 예비선수로 선발


1983년 체조연습 도중 사고로 척수손상(가슴아래와 오른손 마비) 10개월간 재활치료


1984년 뉴욕대 입학, 문학전공


1988년 뉴욕대 졸업


1991년 콜럼비아대 보건대학원 졸업(공중보건학 석사)


2001년 다트머스 의대 수석 졸업


2002년 하버드의대 인턴과정 수석 졸업


2005년 존스홉킨스대 병원 레지던트


2005년~현재 존스홉킨스대 병원 수석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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