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의 희망을 나눠요] 불법체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 장애인 봉사활동

불법체류 방글라데시 노동자들 "언제 쫓겨날지 모르지만 장애인들에 힘이 돼 행복"

한겨레신문-푸르메재단 공동 캠페인

»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자원봉사 단체 ‘엑몬 적십자봉사회’ 회원인 나딤과 소던, 익발, 고건(왼쪽부터)이 지난 28일 경기 하남시 중증장애인 보호시설인 ‘나그네의 집’을 방문해 빨래를 돕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엑몬 적십자봉사회’ 회원들

빨래…청소…목욕… 봉사는 삶의 일부입니다

지난 28일 오후 경기 하남시의 미인가 중증장애인 보호시설 ‘나그네집’. 장애 때문에 말도 또렷이 못하고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30여명이 나른한 햇살과 바람에 그저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승합차 한 대가 들어서면서 마당은 금세 소란스럽고 활기차졌다.

“저희 왔어요. 잘 지냈어요?” 소던(31)이 차에서 훌쩍 뛰어내려 인사를 건네자 누구는 휠체어에 의지해, 또 누구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다가와 환한 웃음으로 맞았다. “어서… 와… 반…가워….” 장애인들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며 더듬더듬 반가움을 나타냈다. 소던 일행 4명은 이들을 한 명씩 꼭 껴안고 손을 잡았다.

소던과 나딤(35), 익발(29), 고건(33)은 모두 자동차 부품공장, 전기모터 조립공장 등에서 일하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이자,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자원봉사 단체인 ‘엑몬 적십자봉사회’ 회원이다. 방글라데시어로 ‘한마음’을 뜻하는 엑몬의 회원은 모두 34명이다.

태풍 ‘루사’가 전국을 휩쓸고 간 2002년 추석 연휴, 소던과 방글라데시 친구들은 해마다 홍수 피해에 시달리는 고향 사람들의 고통을 떠올렸고, 대한적십자사에 수소문한 끝에 강원 삼척시의 한 마을로 자원봉사를 떠나며 이들의 선행은 시작됐다. “이슬람교에선 다른 사람을 돕고,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살라고 가르칩니다. 한국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 있든 봉사는 삶의 일부죠. 삼척에서 만난 마을 어른들이 ‘자식들도 귀찮다고 안 오는데, 멀리서 와 고생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왔다’며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소던은 한달에 두번씩 한국 땅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55명이 살고 있는 이곳 3층집은 하남시 풍산지구 개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사를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돼 어수선했다. 소던 일행의 손길이 닿자 구석구석이 조금씩 정돈돼 갔다. 먼저 청소를 끝낸 이들은 장애인들과 자연스레 어울려 장난을 치며 이야기를 나눴다. “형, 다음달에 올 때는 형 여자친구 될 사람도 데리고 올게.”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 아니야. 사랑해.” “하하하. 나도 사랑해.” 소던과 최아무개(35)씨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사진 찍는 게 취미인 고건은 연방 셔터를 눌러댔다.

언제 어떻게 ‘쫓겨날지’ 모르는 이들의 일상은 불안·차별과 공존한다. 하지만 나딤은 “처음 한국에 온 8년 전에 비하면 이주노동자들도 훨씬 늘어났고, 우리를 대하는 한국 사람들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그는 “세상살이에 섞이기 힘든 장애인들을 위해 무언가 해줄 수 있어 기쁘다”며 “사람보다 소중한 건 이 세상에 없다”고 말했다.

잠깐 쉬는 동안, 물이 나오다 말다 하던 마당 수돗가에서 “이제 잘 나온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들은 “오늘 빨래 못하고 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라며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붙였다. 커다란 빨간 고무통에 가루비누를 풀고 신나게 이불과 옷가지를 밟아댄 지 1시간여 만에 빨랫줄 3개가 꽉 찼다. 하지만 장애인들을 목욕시키는 일은 미뤄야 했다. 나그네집이 이사온 뒤 이웃 주민들이 동사무소에 두 차례나 민원을 넣는 바람에, 목욕 시설을 짓는 공사가 아직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겨레도 반기지 않는 장애인들과, 같은 겨레가 아니어서 차별받는 이주노동자들이 서로 지탱해주며 어울린 한나절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하남/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