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의 희망을 나눠요] “고국 장애인 문화생활 돕고 싶어요”

“고국 장애인 문화생활 돕고 싶어요”

재활의 희망을 나눠요
한겨레신문-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장애인과 ‘나눔의 삶’ 가꾸는 사람들

▲ 하반신 마비에도 50년 동안 국내외 나환자들을 도운 재독 동포이며 하반신 장애인 서순원씨가 17일 오전 판문점 출발을 앞두고 차량에서 감회에 젖어 있다. 이종찬 기자 r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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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하지만 중증장애인 39명이 ‘활동보조 서비스 제도화’를 요구하며 삭발을 하고 서울시청 앞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29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는 ‘잔인한 4월’에 진정한 장애인의 날은 없다. “장애인 자립을 위해 힘쓰면서 희망을 알게 됐다”는 박정자(44)씨, “암 투병 중에도 고국 장애인들의 문화생활을 돕겠다”는 재독동포 서순원(72)씨. 두 사람이 민족 분단의 상징, 판문점에서 특별한 기행을 함께 했다. 이들 두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봄볕처럼 따사로운 ‘나눔’의 삶을 좇아보았다.

소아마비 재독동포 서순원씨

북녘으로 뻗어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바라보는 서순원씨의 눈은,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세월을 바라보는 듯 아득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지난해 봄 대장암 판정을 받고 8개월 동안 항암치료를 받은 서씨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쇠잔한 몸을 이끌고 판문점에 왔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살아 있을 때 저 벽을 허물면 좋겠지만 안 되면 정성을 쏟아 그저 바라보기라도 해야죠.”

반세기도 더 전의 피난길에서 서씨는 소아마비를 앓았다. 꽃다운 열다섯 소녀에게 하반신 마비는 가혹한 시련이었지만 전쟁통에도 뒤집기 연습을 하면서 3년 만에 목발을 짚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길로 서씨는 경북 왜관의 나환자촌 ‘베타니아의 집’을 찾아갔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걸을 수만 있게 된다면 남은 생을 남을 위해 바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8년 동안 왜관과 전북 익산의 나환자촌을 오가며 봉사활동을 하던 서씨는 그곳에서 만난 프랑스 선교단의 주선으로 1965년 소아마비 치료를 위해 프랑스로 향했다. 다리 수술을 받고 프랑스의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서씨는 건축학을 공부한 뒤 아프리카 선교사업을 위해 프랑스에 와 있던 독일인 청년 클라우스 콜러(64·한국이름 서이천)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와 결혼해 독일에 정착했고 의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어떻게하면 살맛나게 살까 연구
삯바느질하며 북 아이들 돕기도

하지만 동양인 여성에 장애인인 서씨를 시집 식구들과 이웃들은 선뜻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에 냉장고도 없는 헛간 같은 아파트에서 남편과 단둘이 시작한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서씨는 삯바느질과 삯뜨개질을 하며 돈을 모았다. 폐품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이웃들에게 판 돈도 보탰다. 애써 모은 돈은 꽃동네와 북한 아이들을 돕는 데 쓰였다. 1985년에는 남편이 받은 유산으로 한국 요리를 가르치는 요리학원을 세우고 그 뒤 한인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생활도 활발히 했다.

꽃동네에 대한 서씨의 애정은 남다르다. 타향살이 40년이 넘었지만 한국에 있는 ‘장애인 동지’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독일의 장애인들은 2~3명에 한 명꼴로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등 사회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잘 돼 있습니다. 솔직히 한국은 아직 멀었습니다. 요즘은 한국에서 장애인들이 어떻게 하면 좀더 살맛나게 살 수 있을까 연구하고 있습니다.”

서씨는 꽃동네에 세계 주방기구를 모아놓은 박물관을 짓고 찻집을 열어 장애인도 문화생활을 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마지막 남은 소원이라고 했다.

얼마 전 서씨는 <불길은 하늘로>라는 제목의 독일어로 된 자서전을 펴냈다. 평생 나눔을 실천했던 서씨는 자서전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나를 완전히 비울 수 있는 그날이 오면 나는 그 텅 빈 가슴속에 불을 지르리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불길은 하늘로 치달으리.”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2006-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