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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살 이모와 19살 조카가 사는 법

방귀희(솟대문학 발행인, 방송작가)

내 나이 벌써 49살. 마흔의 끝자락이다.
그깟 나이 숫자에 불과하다고들 하지만 난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다. 불혹의 나이라는 마흔이 내게는 번민과 갈등의 시절이었기 때문이리라.

49살을 나름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원고 청탁을 받았다. 내 넋두리를 들어줄 동지가 생긴 기쁨에 당장 오케이를 했다.
내 사랑을 향해 이렇게 오케이 사인을 몇 번만 아니 단 한번만 했었어도 난 지금 이렇게 외톨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꼬마 외톨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로 추억거리가 없다. 돌 떡을 담가 놓고 찾아온 소아마비로 인해 나는 일찍이 고립되었다. 모든 행동은 엄마와 함께였고, 2살 위인 언니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언니는 만화 책을 빌려오는 일부터 달고나 또뽑기 등 당시 유행하는 길거리의 군것질을 공수하는 역할까지 도맡아했다.

심지어 언니는 초등학교 입학식에 내 이름표를 달고 줄을 섰고, 나는 엄마 등에 업혀서 그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철 없는 나이였음에도 가슴에 싸한 바람이 분다는 느낌이 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공부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몸 동작을 만들며 노래 부르기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사춘기 외톨이

사춘기는 하나의 질병이었다. 난 마치 중병을 앓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꿈도 없었고 열정도 계획도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내가 불행의 희생양이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만 되뇌일 뿐 장애를 딛고 일어서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욕이 없었다. 여전히 공부는 잘했지만, 의욕과는 무관했다. 습관처럼 공부하고 혼자서 속을 끓일 뿐이었다. 남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춘기 소녀의 자질구레한 일상-친구들과 학생관람불가 영화 보기, 동네 독서실에서 공부하기,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남학생들의 시선을 받기 등등-을 즐길 수 없다는 것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초라한 등 푸른 개구리

대학을 졸업했다. 그것도 수석으로, 하지만 난 그 어디에 이력서 한 통 내밀 수가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은 배부른 투정이었던 것이다 .난 내 장애를 인정해야 했고 모든 것을 장애라는 조건에서 해결해야 했다.

장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나를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비록 일은 힘들었지만 밤을 새워도 즐거웠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어려운 형편에 장애인 딸을 공부 가르쳐서 뭐에 쓰겠느냐는 친척들의 비난 속에서 대학원까지 보냈으니 아마도 내가 졸업 후 집에서 놀고 먹는 신세가 됐다면 같이 죽자고 하셨을 것이다.

친척들 앞에서 당당한 엄마를 보니 신이 났다. 하지만 조금 현실에 적응하게 되었다고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린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우물 밖으로 나오면 초라하기 그지 없는 등 푸른 개구리였다.

<조카와 함꼐한 방귀희 씨>

47살의 고아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이제 누구랑 사니?”

그렇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내겐 엄마를 잃은 것 이상의 의미였던 것이다. 가족들은 4살도 아니고 7살도 아닌 47살의 동생을 위해 가족회의를 열었다. 결국 초등학교 입학식 때 나 대신 줄을 서주었던 작은 언니가 나를 돌봐주기로 결정되었다. 언니네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당시 17살이던 조카가 언니에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가 이모한테 가. 내가 오빠 밥 해주면 돼”

그 말에 가게 정리하고, 집도 아이들이 살기 편한 아파트로 옮겨주고 언니네 부부는 한국으로 왔다. 아이들과 생이별을 한 언니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17살 조카에게서 엄마를 빼앗았다는 죄의식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밥상을 받으면 아이들이 먹을 반찬을 내가 먹고 있다는 생각에 목이 메었고, 깨끗이 빨아 다려준 옷을 입을 때도 눈가가 달구어졌다. 목욕을 시켜줄 때도 17살 조카에게 미안해 재잘거릴 수가 없었다.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으면 부모는 물론 형제들의 희생까지 따른다는 것을 47살에 고아가 된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49살의 꿈

응급실을 찾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피 흘리는 환자들 틈에서 난 뒷전이었다.

“나 지금 죽을 것만 같아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

나는 생명을 구걸하고 있었다. 안 태어났으면 더 좋을 뻔 했다느니, 죽었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것은 내 본심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 병명은 갱년기였다. 중년 여성들에게 화병과 함께 찾아오는 질병이란다. 소아마비들은 포스트폴리오 증상이 찾아와 중년 이후 장애가 더 심화된다는 사전 지식을 갖고 있던 터라 갑자기 모든 것이 끝난 양 허탈해졌다.

하지만 그 순간 왠지 더 힘이 났다. 오기였을까? 조금만 더 달리면 완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젖 먹던 힘을 내는 마라토너처럼 나도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인생의 경주를 잘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언니네는 조그만 가게를 냈다. 그런데 워낙 불경기라 걱정이 태산이다.

“도대체 엄마는 뭐 하는 거야. 가게에 손님이나 팍팍 밀어주지 않고”

“아이구 돌아가신 분들이 다 자식들 도와주면 성공 안할 사람이 어디 있니?”

“아냐 엄마가 약속했어. 당신이 죽으면 하늘 나라 가서, 나한테 잘 못해주는 사람들 혼내 줄 거라고 그랬단 말야”

엄마는 틀림없이 큰 천사가 됐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나는 종종 하늘을 향해 말한다.

“엄마, 엄마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말야. 언니 걱정 덜어주는 거야. 알아? 누구하고 살라고 인수 인계도 안하고 갔으면서 그렇게 몰라라 하면 안 되지.”

19살 조카가 학교 공부하며 오빠 밥까지 해주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49살 나는 언니가 해주는 밥을 받아먹으며 하늘 나라를 향해 으름장을 놓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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