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프로 선수

이정이 (아름다운재단 사업국장)



벌써 재작년의 일인 것 같다. 아름다운재단에 기금을 조성하고 싶은데, 몸이 불편해 재단을 찾아오기 어려우니 집으로 방문해주었으면 하는 분이 있었다. 추위가 채 가시기전인 어느 봄날, 우리는 분당의 한 아파트로 그 분을 만나러 갔다. 그는 다름 아닌, 프로농구선수였다가 유학까지 갔다 온 현대모비스의 전농구코치 박승일씨였다.




그렇게 활동적이고 해맑은 미소를 지닌 그가 우리를 만나게 된 때는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이하 ALS)이란 병명으로 판정된 직후였다. 흔히 ‘루게릭 병’이라고 불리는 이 병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을 통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대학 졸업 후 16년 만에 TV에서 전신이 마비되는 루게릭 병에 걸려 있는 스승을 발견한 저널리스트 제자가 서서히 몸이 굳어가는 스승 모리 교수와 매주 화요일 만나 나눈 얘기를 엮은 것. 이 책은 인간에게 죽음은 필요하다는 것과 사랑의 의미에 대해 잔잔한 감동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루게릭병 재활센터를 건립하는 씨앗


박승일씨는 마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처럼 내게 다가왔다. ALS로 판정된 후, 그는 환호하던 군중들로부터 잊혀져갔다. 하지만 ALS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길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ALS 재활센터 건립기금 모금을 하고 싶다며 아름다운재단에 의뢰를 해온 것이다. 프로농구선수였던 그가 루게릭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도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수용하며 삶의 의지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삶의 경건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행보가 조금씩 매스컴을 타며 언론매체에 보도가 되기 시작하자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많은 분들이 조금씩 후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박승일 코치는 그렇게 해서 모인 성금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고 싶다고 한 것이다. 루게릭 병의 특성상 치료비가 굉장히 많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들어온 성금을 ALS 환자들을 돕는 씨앗기금(seed money)으로 시작해, ALS 연구 및 환자들의 재활센터 건립 기금을 조성할 수 있겠냐고 의뢰해온 것이다. 평소 ‘농구’의 ‘농’자도 잘 모르던 내가 그로부터 기금조성 의뢰를 받고 인터넷에서 그에 대한 기사를 찾아본 뒤 많이 놀랬던 기억이 난다. 프로농구선수로, 코치로 활동하며 코트를 누비던 그가 근육이 위축되어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되는 병에 걸렸다는 것이 차마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착잡한 마음으로 그의 집을 처음 방문했다. 그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세수를 마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잘 생기고 키가 큰 멋진 사람이 아주 느린 어눌한 말투와 자세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 병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 투병중인 박승일 코치 모습



루게릭 병이란 그렇게 서서히 근육이 위축되어가며, 신체가 마비되어 마지막에는 폐호흡장애까지 일으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이다. 이 병은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하 ALS)으로 1830년 Bell에 의해 처음으로 기술되었으며, 1874년 Charcot에 의해 ALS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ALS는 질환명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임상적으로 근위축, 근력약화, 섬유속성연축 등을 특징으로 하는 퇴행성 신경계 병변이라고 한다. ALS에서는 대뇌 및 척수의 운동신경원이 선택적으로 파괴되기 때문에 "운동신경원 질환"으로도 불리며, 1930년대 이 질병을 앓았던 운동선수의 이름에 기원하여 "루게릭(Lou Gehrig)씨 병"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렇게 내가 루게릭 병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박승일 코치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떻게든지 그의 뜻을 이루도록 돕고 싶었다. 내가 재단에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빈곤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서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모금을 잘하고 싶은 게 나의 소망이다. 하지만 실제로 돕는 방안을 모색하다보면 내 능력 밖의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달으며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우리 사회가 지원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있고 지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아름다운재단에서 일하는 기쁨과 행복함으로 가득차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대체 누구를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우선적으로 도와야 하는가! 이것은 아직도 일하면서 겪는 현재진행형의 딜레마이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 지 몰랐다


이런 내게 박승일씨는 투명하고 공정하며 전문적으로 모금 잘하기로 유명한(?) 아름다운재단이 함께해주면 ALS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확산과 더불어 모금이 더욱 잘 될 것이라 여겨 아름다운재단에 기금조성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의 여생을 ALS 치료 극복을 위해 바치겠다는 그의 신념 때문에, 그리고 내가 처음 의뢰받은 일이라 어떻게든 해보고 싶었으나 기금조성이란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치료비가 많이 드는 ALS같은 난치병 환우을 돕는 전문적인 기관이 있는데 아름다운재단이 이 일까지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이 사업을 더 진행시킬 수가 없었다.



▲ 연세대 선수 시절 (맨 앞이 박승일 선수)▲ 기아 선수 시절 (맨 왼쪽이 박승일 선수)


결론적으로 ALS 전문 의료협회인 한국 ALS협회에서 ALS 환자를 위한 후원금을 모금하며 센터 건립기금을 조성 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 쪽으로 밀어주는 것으로 하고, 그런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다시 그를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황사로 인해 눈가를 연신 닦아야만 했던 어느 봄날, 레스토랑에 들어서는 그를 보는 순간 내가 느꼈던 그 황망함을 잊을 수 없다. 그의 모습은 어느 누가 보아도 시선을 끌만큼 키가 크고 훤칠하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갑자기 나는 할 말을 못 한 채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를 몰랐다. 그 사이에 그는 더 악화가 되어 말을 해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된 것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전달해주어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증상이 진행된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기금조성이 어렵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팠던 건지, 황사 때문이었는지 눈가가 계속 짓무르기만 했던 기억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은 아프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최근까지도 박승일씨는 언론을 통해 그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고, 2003년 12월에 [‘희망을 전하는 거인’ 전 프로 농구코치 박승일의 루게릭 투병일기](대현문화사 간)란 책도 발간하며, 초기부터 지금까지 ‘박승일과 함께하는 als’ 다음 카페 동우회(http://cafe.daum.net/alswithpark)가 늘 그의 곁을 지켜주고 있다. 이 카페는 온라인상의 커뮤니티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가입한 동우회이다. 그러나 그에게 격려의 편지 한 번 써보지 못했다. 너무나 미안하고 할 말이 없어서... 하지만, 이메일 뉴스레터를 통해 그의 근황을 접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늘 기도하고 있다. 희망을 전하는 거인으로 우리 곁에 있어달라고.


우리에게 희망을 전하는 아름다운 재단들


그런 의미에서 2004년 8월에 발족한 푸르메재단 역시 희망을 여는 단체라고 본다. 재활의료시설의 부족으로 적절한 치료와 교육을 받지 못한 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인간적인 병원>을 설립해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은 희망을 전하는 거인 박승일 코치로 인해 희망의 씨앗을 품고, 수많은 푸르메재단을 통해 희망의 줄기가 뻗어나가며, 수많은 아름다운재단들로 인해 모든 사람이 나눔 하나씩 실천하며 나눔의 혜택을 함께 누리는 세상을 꿈꾸다 보면 희망이 넘쳐나는 숲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정이씨는 이화여대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스텝, 참여연대 사무국장을 거쳐 현재 아름다운재단 운영사업국장으로 일하며 들꽃처럼 아름다운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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