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태로 낳은 아이들

신주련 (주부)


저는 19살 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회에서 만난 선후배들과 함께 틈틈이 고아원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나중에 경제적 기반을 잡으면 고아원을 설립하자는 꿈을 가지고 있었죠.


고아원 설립의 꿈에서 시작한 입양


▲ 단란한 신주련씨 가족. 품에 안긴 아이들이 입양한 두 딸.

오른쪽이 첫째 딸 하영, 가운데 맨 뒤가 장남 현찬, 왼쪽이 둘째 딸 아영.[사진작가 박찬학교수 제공]


1997년 연말에 우리나라에 IMF경제위기가 닥쳐왔고, 그로인해 고통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보면서 양심의 가책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말로만 했지 실제로 고통받는 저 아이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저 아이들 중에 한 명이라도 입양해서 우리의 꿈을 실천하자’ 고 마음먹고 1998년 5월에 생후 2개월된 하영이가 우리의 딸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족이 된 하영이는 무척이나 건강했고, 행동 발달도 빨랐습니다. 우리는 10년만에 다시 자녀를 기르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처음부터 온 가족이 입양을 찬성하지는 않았습니다. 믿는 가정인 친정에서는 하영이를 환영했지만 시어머니께서는 부산에서 먼 길을 오셔서는 덩치 큰 현찬이는 세 번씩 번쩍번쩍 안아 주시면서 어린 하영이에게는 눈길 한 번 주시지 않고 부산으로 내려 가셨습니다. 어머니도 우리도 마음이 많이 아팠지요. 그리고 2주 가량 지난 후에 어머니께서 다시 오셔서는 “얘들아,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이 참 장한 일을 했구나” 하시면서 하영이의 교육보험증서를 내 놓으시고는 “내가 힘 닿는데까지 넣어주마”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영이를 키우며 너무나 큰 기쁨과 행복감을 누렸고, 하영이가 너무나 사랑스럽게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고아에게 필요한 것은 가정’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아원을 운영하자던 꿈을 바꾸어 몇 명이 되든 힘 닿는데 까지 입양을 하자 약속을 남편과 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3월에 생후 한 달된 아영이가 우리의 둘째 딸이 되었습니다.


다시 입양으로 얻은 둘째 딸



▲ 첫째 딸 하영과 함께(위) 둘째 딸

아영(아래).[사진작가 박찬학 교수 제공]


생후 34주만에 2.4킬로그램의 미숙아로 태어난 아영이는 처음 우리집에 온 날부터 심상치를 않았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울어대고 온 몸이 뻣뻣하여 업기는커녕 안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고 손발의 미세한 떨림과 숨을 거세게 몰아쉬는 증상은 하루에도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여러 병원을 거친 후에야 아영이가 ‘선천성 뇌기형’이란 병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좌우뇌를 막아주는 막이 없고, 좌뇌와 우뇌가 조금씩 비어 있으며 태어날 때부터 뇌가 기형이 된 상태’라고 ...‘ 앞으로 간질을 할 것이고 정신지체에 언어장애에 사지마비의 증상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의사선생님은 아영이의 상태가 너무 나쁘다고 말했습니다. 병의 결과를 듣는데 아영이의 환한 미소를 생각하면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 검사 결과였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수고가 필요한 아영이를 ‘잘 돌볼 것이다’ 라고 믿으시고 우리가정에 맡겨주신 하나님께 도리어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선천성 뇌기형, 그리고 주위의 파양 권유


그런데 이 일은 우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우리 아영이의 결과를 궁금해 하는 양가 어머님과 친구들, 아는 이들로부터 많은 전화를 받았습니다. 병의 결과를 듣게 된 이들은 한결같이 “못 키운다. 왜 평생 안져도 될 짐을 지려고 하느냐? 지금은 어려서 그렇지 곧 후회하게 될 거다” 등등 너무나 많은 충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냥 키울겁니다. 아영이는 우리집에 올 때부터 아픈 상태였구요. 지금 병을 알았다고 달라질 건 없어요.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고요. 지금은 그냥 아영이가 하는 예쁜 짓 보고 행복해 하구요. 걱정은 그때 가서 할래요.”


저는 아영이의 병이 밝혀지고 난 뒤 목이 메어서 친정 식구들과 통화할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동생도 목이 메이는지 말을 잘 못했습니다.


“언니, 엄마가 식사도 안 하시고 울기만 하고 누워만 계셔...”

“왜? 어디 편찮으신거야?”

“아니, 아영이... 아영이 돌려줄 때까지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울기만 해.”


▲ 두 딸과 함께[사진작가 박찬학교수 제공]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서 고생을 많이 하시면서 우리 네 딸을 키우시고 이제는 행복해 하시던 어머니께서 딸이 앞으로 고생할 일이 너무 마음에 걸려 식사까지 마다 하시고 마음 아파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목이 메였습니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왜 식사도 안 하시고 그러시느냐. 그냥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어머니 사시던대로 편하게 사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니는 니 아픈 딸 때문에 울제? 나도 내 딸 고생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운다”고 말씀하시는데 이유야 어찌되었든 저로 인해 염려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친정 어머니뿐만 아니라 가까이 지내는 이들 대부분이 매일같이 파양을 권유했고 아영이를 돌려주라는 말은 우리에게 가장 큰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아영이를 데리고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지켜본 친정 어머니는 물론 주위의 모든 분들이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지켜봐 줍니다.



재활치료를 위해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이산가족 생활 끝에 이사


아영이는 우리가 살던 대전에서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적었습니다. 대부분의 치료기관에서 1년 이상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릴적 치료가 너무 중요하다고 해서 엄마인 제가 병에 대해 알아야 할 사항도 많아 부모 교육겸 서울에 있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한 달간 입원을 했습니다.


한 달간의 입원치료를 마치고 뻣뻣하던 아영이의 몸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꼭 쥐고 있던 손을 조금씩 펴고 놀기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대전에서 치료를 해 보려고 애썼지만 아영이에게 배정된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이 고작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이후 또 다시 경기도 일산병원에 세차례의 입원을 더 하게 되었습니다.


▲ 영롱한 눈망울이 닮은 두 딸.아영(위) 하영(아래)[사진작가 박찬학교수 제공]


2001년 1월부터 6월까지 네 번의 입원을 통해 저와 아영이는 서울쪽의 병원에서 지내고, 아들 현찬이와 남편은 대전집에서, 그리고 돌볼 사람이 필요한 하영이는 부산의 언니집에서 지내게 되면서 온 가족이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누가 저에게 ‘하영’이라는 말만 해도 하영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입·퇴원이 계속되면서 오랜 시간동안 가족들이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네 차례의 입원으로 인해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우리는 아영이의 치료도 적극적으로 하고 가족들이 모여사는 방법은 서울쪽으로 이사를 하는 방법밖에 없음을 알고 이사하기로 결심하고, 남편은 십년 넘게 일해 왔던 직장에 사표를 냈습니다. 모두가 취직이 힘들다고 하는 때에 남편은 감사하게도 2개월 가량만에 서울근교의 성남으로 직장이 구해졌고 우리가족은 2001년 12월에 이사를 했습니다. 이제 다시 흩어지지 않고 이 모습 이대로 계속해서 모여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지요. 그리고 아영이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해서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축복 덩어리 딸들로 새롭게 얻은 행복


보통 사람들은 우리가 아픈 아영이를 키우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고 슬픔과 고통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우리는 전보다 훨씬 행복해졌습니다. 아영이는 우리에게 잔잔한 기쁨을 많이 줍니다.


치료를 열심히 해 오던 중에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손을 어느날 펴고 놀 때, 또 아영이를 몸에 엎었을 때, 말을 못하는 아영이가 아빠 엄마 오빠 언니 모두 눈동자로 구별해 낼 때, 그리고 아영이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해맑은 미소로 함박웃음을 선사하며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인 줄 알고 감사한 것인 줄 몰랐던 평범한 일상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아영이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귀한 교훈들을 날마다 주고 있는 아영이는 틀림없는 우리 가정의 ‘축복 덩어리’입니다. 엄마인 제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과 기쁨을 안겨준 두 딸이 우리들로 인하여 더 많이 많이 행복해 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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