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희망을 향해 달린다

[주간조선 2004-10-04 14:17]

지난 9월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 둔치. ‘2004 테리 폭스 달리기’에 참가한 3000여명의 시민들은 휠체어에 앉은 한 남자를 주목하고 있었다. 송탄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성규(43)씨였다.

그는 1999년 6월, 캐나다 여행 중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를 잃고 그 자신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한 쪽 다리를 잃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한 달의 휴가를 얻은 김성규씨 부부는 교회 동료들과 함께 캐나다 횡단에 도전했고 6월 30일 오후 6시쯤, 세인트로렌스강 하구의 가스페반도의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운전하려고 하는데 친구가 자기가 하겠다며 나보고 눈 좀 붙이라고 했지요. 저는 SUV 차량 뒷좌석의 시트를 눕히고 벨트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누워 잠을 청했죠. 그런데 친구가 졸음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습니다. 저는 차밖으로 튕겨져 나갔고 아내는 뇌출혈을 일으켰습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교회 후배는 현장에서 사망했고요.”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족 착용을 포기하고 휠체어나 목발을 이용했다. 그러다 지난 8월 초 우연히 골수암으로 다리를 절단한 채 암 연구기금 조성을 위해 캐나다 횡단에 도전했다가 숨진 테리 폭스(Terry Fox)를 알게 되었다. 테리 폭스는 그를 휠체어에서 일어나게 했다. 김씨는 ‘5㎞ 코스’에 도전을 결심하면서 캐나다대사관 홈페이지에 자신의 수기를 올렸다.

“테리 폭스가 매일 달린 거리가 42㎞였는데, 접합 부분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조금은 짐작이 됩니다. 8월 26일 새 의족을 맞추고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걷기 연습을 해왔습니다. 집에서 가게까지 왕복 3㎞입니다. 3㎞까지는 그동안 여러 번 걸어봤습니다.”

‘테리 폭스 달리기’는 순위 경쟁이 없다. 대신 완주증만을 준다. 오전 9시40분쯤, 5㎞ 참가자들이 출발했다. 김성규씨는 뒷줄에서 걷기 시작했다. 약 1㎞쯤 걸었을까. 김성규씨가 진행요원에게 “물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가 목이 마른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니었다. 왼쪽발에 통증이 찾아온 것이다. 김씨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벨트 색을 열어 뭔가를 찾았다.

“아니, 됐습니다. 진통제를 차에 두고 왔네요.”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의족한 오른발은 오히려 편해요. 왼발 발등과 발꿈치가 너무 아픕니다. 마약 성분이 든 진통제는 왼발 때문에 먹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요즘은 병원에서 진통제를 한달치를 주곤 합니다.”

2㎞쯤 걷자 그의 어깨에선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앞서 출발한 10㎞ 참가자들이 반환점을 돌아 힘차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반환점을 돌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조깅코스 옆에서 비디오를 찍는 젊은이를 가리켰다.

“이번에 토론토대학 입학 허가를 받은 큰 아들입니다. 제가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 캐나다 의료진이 한국총영사관의 영사에게 ‘거의 살아나기 어렵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한국의 가족에게는 ‘사망했다’고 전해졌다고 합니다. 당시 캐나다로 날아온 큰 아들은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있자 처음엔 꿈인지 생신지 했어요. 당시 여섯 살이던 외동딸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현재 학습장애를 보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3㎞쯤 지나면서 그는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테리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아요. 집에서 연습할 때 이렇게 빠른 속도로 걸은 적이 없거든요.”

그는 약속대로 5㎞를 완주했다. 그는 완주증서를 받아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가 두 발로 5㎞를 걷는 데는 장장 5년이 걸렸다.

[김성규씨 수기] 교통사고로 목·척추 골절, 오른쪽 무릎 절단… “그래도 희망 향해 달린다”

1999년 6월, 나는 테리 폭스가 힘겹게 뛰었을 어떤 길을 ‘캐나다 자동차 대륙횡단’이라는 이름으로 무심히 달리고 있었다. 밴쿠버에서 자동차 대륙횡단을 시작한 우리 가족은 캐나디안 로키를 넘어 온타리오주를 거쳐 퀘벡시티를 지나 가스페반도를 달리고 있었다.

6월 30일, 우리 일행은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을의 아름다운 성당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여행을 더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7월 16일에서야 의식을 찾았다. 한 사람은 벌써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아내는 뇌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는 목과 척추가 골절되고 오른쪽 무릎 아래가 절단된 상태였다. 왼쪽 발목과 발등은 겨우 붙어 있는 상태였다.

며칠 뒤 의사들은 내 아내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회생 확률은 0%이며 2년 정도는 생명연장 장치에 의존하여 살 수 있다고. 원한다면 병원에서 앰뷸런스비행기로 아내를 한국에 보내줄 수 있다고 했다. 난, 내가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아내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기로 선택했다. 그 방법 외엔 없었으니까. 살아있는 사람의 욕심으로 아내를 고통 속에 있게 할 순 없었다. 아내의 생전 바람대로 나는 아내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했다. 이 세상 어디엔가 살아있어줄 내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기쁘다.

내가 그토록 힘들어 할 때, 캐나다 의사들은 자주 날 감동시켰다. 아내 일로 우울해 있을 때 어떤 레지던트는 그런 내 앞에서 탭 댄스와 코믹 댄스를 췄다. 아내의 유골함을 병실 탁자에 올려놓고 한 달을 보낼 때, 한 간호사는 내게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며칠 뒤부터 그는 출퇴근 때, 또 내가 잠잘 때마다 한국말로 인사해 주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내가 아내를 보고 싶다고 조르면 그 간호사는 안된다면서도 결국에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를 아내 병실로 옮겨가 거울로 아내를 볼 수 있게 해줬다. 조그맣고 창백한 아내의 얼굴. 그렇게 몇 번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때 난 목뼈와 척추골절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캐나다 병원에 누워있을 때 나는 암담함 그 자체였다. 그런 내게 퀘벡 주의회는 뜻밖의 큰 선물을 주었다. 의료비에다, 아내 사망 위로금, 내 장애 위로금, 세 아이 교육비 등. 이건 내게 크나큰 희망이 되었다. 퀘벡주는 관광진흥책으로 외국 관광객이 퀘벡주에서 사고를 당할 경우 캐나다인과 동일하게 대우한다. 이번 사고는 우리 측 잘못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퀘벡주는 똑같이 인정해 준것이다.

난 아이들 때문에, 또 아내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고 싶어 그해 9월 12일 치료가 끝나기 전에 귀국을 해서 국내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 11월 초 반가운 손님이 캐나다 퀘벡 주정부에서 왔다. 나의 몸 상태를 확인하러 그 먼 길을 온 것이다. 난 그저 간접세 몇 푼 낸 관광객에 불과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내게 적절한 상담치료 기회를 주선했고 전동휠체어를 보내주었다. 내가 퇴원했을 때는 내 자동차에 장애인 장치를 달아주었다. 처음 1년간은 파출부 비용을, 다음 1년은 교통비 보조로 얼마씩을 보내주었다. 물론 한국 병원에서의 치료비용과 의족도 대주었다.

난 지금 편의점 세븐일레븐 매장 주인이면서 팬시점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수입은 1억원 가량 되려나 보다. 이렇게 되기까지 나는 참 많은 도움을 캐나다와 캐나다 사람들로부터 받아왔다.

캐나다 사람들 호의에 깊이 감사

약 한 달 전 테리 폭스를 알았을 때 난 큰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 왜 당신은 그 먼길을 뛰어야 했는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유만으로 그 큰 고통을,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의족을 안해 본 사람은 모른다. 절단의 아픔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른다. 테리 폭스의 또 다른 아픔은 짐작도 못하리라.

지금도 나는 6개월에 한 번씩 수술실에서 15㎝ 바늘로 마취해가며 척추신경 차단주사를 맞는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마약 성분의 진통제를 한 움큼 받아온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찾아오니까.

테리 폭스는 어땠을까. 이 아픔과 고통을 어느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조금은 알 것 같은 나도 이젠 달린다. 처음엔 한 번에 500m도 못걸었다. 그러나 나는 매일 걷는 연습을 했다. 500m, 600m…. 아마도 테리 폭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무릎이 까지고 엉덩이에 상처가 나고 피가 나왔다. 무엇보다 잘 맞지않던 의족은 날 자주 넘어지게 했다. 결국 난 새 의족을 하기로 했다.

지난 8월 26일 오토복 코리아의 독일인 기술자 랄프는 내게 멋진 의족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나는 하루 약 3㎞를 걷는다. 여전히 엉덩이엔 상처가 생기지만 아마 얼마지 않아 난 5㎞를 걸어볼 것이다. 반바지에 의족한 채 걷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많았다.

테리 폭스는 50㎞도 아닌 5000㎞를 넘게 달렸는데. 나는 걸을 때마다 테리 폭스를 생각한다.

9월 19일 5㎞를 걸어서 완주하리라. 그가 어떤 고통 속에 걸었으며 그가 어떤 뜻으로 걸었는지를 기억하리라. 나는 그를 생각하며 내 남은 삶을 걸으리라. 하이, 테리 폭스^^! 얼마 안 있으면 나도 자네에게로 갈 거야. 그를 만나면 “테리 폭스, 꼭 만나고 싶었어요.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싶다.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테리 폭스 (Terry Fox)

'아름다운 청년' 테리 폭스는 1958년 캐나다 중부 내륙지방인 마니토바주에서 태어나 서부 밴쿠버시 외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야구와 농구, 하키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활동적이었던 청년 테리의 꿈은 프로 야구선수가 되어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다리에 심한 통증을 느껴 그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결과는 골수암이었습니다. 주치의는 "유감스럽지만 당신은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직접 서명해 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18세였습니다.

일년 동안의 투병생활을 거친 끝에 결국 그는 오른쪽 무릎 15 센티 위를 절단했습니다. 그라운드에 서보기도 전에 무너진 그는 암울한 운명 앞에 목놓아 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야구 감독 선생님이 한 말을 떠올렸습니다.

"네가 온 마음을 바쳐 원한다면 뭐든 지 할 수 있다."

그 말처럼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대신 캐나다 횡단 마라톤을 통해 10만 달러를 모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른 젊은이들이 자신처럼 암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암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입니다. 테리는 이 달리기를 "희망의 마라톤"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는 의족한 다리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테리 폭스의 희망의 마라톤>을 후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마라톤에 앞서 18개월 간 5천 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며 연습했습니다. 드디어 1980년 4월 12일 테리는 뉴펀드랜드의 주도(州都)인 세인트존스에서 묵묵히 자신과의 마라톤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달리기가 계속될수록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모금액이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일 이를 악물고 42 킬로미터를 달렸습니다. 이런 모습은 캐나다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무려 5,373 킬로미터. 143일을 쉬지 않고 달리던 그는 1980년 9월 1일 캐나다 중부 온타리오의 썬더베이 외곽에서 마라톤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기 때문입니다. 캐나다 국민들의 슬픔 속에서 테리는 1981년 6월 28일 22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습니다.

테리 폭스를 기념하는 달리기대회를 통해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3억6천만 달러(약 3억7800억원) 이상의 암기금이 모금됐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숨을 앗아간 골수암도 하나하나 정복되고 있습니다.

테리 폭스가 보여준 용기와 인내, 헌신을 기리기 위해 지금도 세계 55개국에서 매년 테리 폭스 달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대회가 열릴 때마다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려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앞다퉈 결승점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김홍식 푸르메재단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