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하는 법을 배워요

박희경


▲ 위탁모 박희경씨와 남편 김종우씨. 가운데 예쁜 아기가 박씨네 새 가족이 된 영빈이다


일산에 사는 주부 박희경씨(39). 어려운 사정에 놓인 아이를 맡아 키우는 위탁모 중 한 사람이다. 지금은 4살이 된 영빈이를 집에 데리고 온 것이 지난해 9월이니 벌써 1년반이 되어간다. 당시 영빈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발육상태나 영양상태가 매우 떨어져 있었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대학시절 복지시설에 봉사활동을 다녔던 박씨는 예전부터 '어려움에 놓여있는 아이를 키우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막상 영빈이를 맡기로 결심하자 남편 김종우씨(43)에게 입이 떨어지기 않았다. 궁하면 통하는 법일까. 다행히 대학시절 만난 남편에게 결혼 전부터 입양에 대해서 얘기해 온 터라 조금스럽게 입양이나 위탁문제를 꺼내자 남편의 반응은 다행히 긍정적이었다. 다만 남편은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게 아니냐" 혹은 "남자아이라 어려움이 많지 않겠느냐" 등의 우려를 나타냈다.




▲ 단란한 박씨네 가족. 뒷줄 왼쪽이 첫째 김태홍(15), 아래 왼쪽이 수홍(10), 뒷줄 오른쪽이 셋째 범준(6), 박씨 품에 앉아있는 아이가 넷째 영빈이다.




▲ 몇 년 전 서울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마당이 넓은 일산 전원주택으로 옮겼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기에 최상의 환경이다.


"영빈이를 데려오기로 결심한 후 남편의 확답을 듣기 위해 일부러 메일로 영빈이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바빠서 메일을 열어보지 않을까 집에 있는 프린터기가 망가졌으니 아이 사진을 인쇄해 달라고 했죠. 그 날 밤 남편이 퇴근할 때 인쇄한 아이 사진을 가져왔는데 사진에 눈물 자국이 번져있더군요." 그렇게 남편은 자연스럽게 영빈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세 명의 아이들에게 "동생이 함께 살게 될 거"라는 말이 정말하기 어려웠다.


아들 삼형제 테홍, 수홍, 범준이. 그것도 15살, 10살, 6살이니 집안에 바람 잘 일 없었다. 이번에도 다행히 착하고 바르게 자라준 아이들은

엄마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두 번째 산을 넘은 셈이다. 하지만 아들 삼형제를 키우느라 허리 펼 기회조차 없는 딸을 지켜봐야

했던 친정어머니는 "아들 세명이 모자라서 남의 아이까지 데려오고 미쳤냐. 그러면 네 삶이 너무 고단해 진다"며 화를

냈다. 결국 박씨는 친정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빈이를 데려왔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으랴. 요즘 친정어머니는

누구보다 영빈이를 예뻐한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박씨가 영빈이를 거두지 않았더라면 영빈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영빈이로부터

오히려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웃는 박씨.


그녀가 영빈이와 생활하면서 느낀 감회와 바램을 영빈이 친아빠에게 편지로 썼다.


영빈이 아빠께.


영빈 아빠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었는데 막상 글로 쓰려니까 좀 어색하기도 하고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영빈이가 저의 품에 온지도 벌써 1년이 지나 두 번째 겨울을 함께 맞이하게 되었네요. 작년 가을, 잠실의 한 식당에서 협회 사회복지사님과 영빈아빠, 그리고 아빠곁에 꼬옥 붙어 앉아 칭얼대던 영빈이를 처음 만났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그때 영빈아빠가 저와 인사를 나누고 제게 한 첫 질문 생각나세요? “저어, 이런거 여쭤봐도 될까요? 이미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왜 우리 영빈이를 키우시려는지 궁금해서..


갑작스런 질문에 뭐라고 답변을 했던거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그땐 저도 솔직히 좀 당황했었거든요. 하지만 이젠 편안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거 같아요.


저는 학창시절에 영아원, 고아원에 봉사활동을 다녔어요. 친부모와 함께 살 수 없는 어린아이들의

천사같은 눈빛을 보며 입양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후 결혼을 하고 셋째 범준이를 낳기 전에 사실 아이를 입양할 생각이었어요.


시어머니께 간신히 허락을 받아놓고 남편과 입양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잠시 입양을 미루게 되었고 몸이 불편하셔서 휠체어를 타시는 시어머니와 세 아이들을 위해 지금 살고있는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집을 지으려고 설계까지 마쳤을 때 어머니가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지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어린 새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10개월의 시간만큼이나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인간이

육신의 고통으로 감당해야하는 시간 역시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내 의지대로 내 몸을 움직이고 마음먹은 것을 실행할 수 있다는 현실에,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어요. 이사를 오고 나서 남편과 입양에 대해 다시 의논했을 때 남편의 반응은 소극적이었지요. 저보다 훨씬 따스한

마음을 가진 착한 사람이었지만 데리고 오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려다가 오히려 상처를 주게 될까봐 자신이 없다고 말했지요. 입양을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아이를 위탁해서 수양부모가 되어본 후 입양을 생각해보자며 설득하였고 남편은 이것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이렇게 주저했던 남편이 협회에서 메일로 보내준 영빈이 사진을 회사에서 컴퓨터 모니터로 보고 프린터로 인쇄를 하던 중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데요.


남편의 그 애틋한 마음이 영빈 아빠께도 그대로 전해지리라 믿어요. 사진을 보고 난 남편은 약속된 일주일을 채우지 말고 당장 영빈이가 지내던 시설에서 데려오는게 좋겠다고 제게 전화를 했어요. 한가족이 된다는 생각에 하루라도 빨리 그곳에서 데려오고픈 마음이었을 거예요.


영빈아빠. 영빈이가 처음 저희 집에 왔을 때 밥먹는 버릇을 들이느라 영빈이도 저도 고생이 많았어요. 영빈이는 우유병에 담긴 우유가 주식이었고 밥을 간식처럼 먹던 그곳에서 투정하면 주었던 단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져 있었지요. 떼를 쓰며 사탕을 찾고 밥을 먹으려 하지않는 영빈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가 작아 제 마음을 더 안타깝게 했지요. 끼니때마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실랑이를 벌이고 급기야 회초리로 엄포를 놓기도 했지요.


언젠가 밥을 안 먹고 떼쓰는 영빈이의 엉덩이를 때려주려고 회초리를 드는데 저희 둘째 아들 수홍이 기억나세요? 지난 봄에 어린이 대공원에서 영빈이와 맨발로 자갈길 체험해야한다고 직접 운동화 벗겨주고 영빈이 손잡아 데리고 다니던 아이가 영빈이가 제일 좋아하는 작은 형아 수홍이에요.


수홍이가 갑자기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뽑아 가지고 달려와선 식탁에 올려놓으며 말했지요.“엄마 이 책 좀 읽으세요. 장화홍련전이예요. 엄마가 영빈이를 때려주면 계모라서 그런다고 생각할거예요. 네? 엄마.” 아직 어리다고만 느꼈던 수홍이의 사려깊은 태도에 저도 놀랐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영빈아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요? 저는 아이들에게 단호하게 말해주었지요. “너희들도 여러번 이야기하고 약속한걸 지키지 않으면 벌도 서고 회초리로 매를 맞는 것처럼 엄마는 영빈이도 너희들하고 똑같이 대할거야. 영빈이가 잘못해도 혼내지 않고 그냥 봐주는건 엄마가 영빈이를 잘 키우지 않겠다는 뜻이야. 너희는 영빈이가 식탁예절도 모르고 떼만 쓰고 자기가 먹고싶은 단 음식만 자꾸 먹는 그런 아이로 자라면 좋겠니?” 그때 저의 뜻을 알아챘는지 그날 이후 지금까지 제가 영빈이를 혼낼 때 수홍이는 영빈이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작은 엄마같은 존재가 되었지요.


그렇게 밥과의 전쟁을 벌이던 영빈이가 이젠 식사시간동안 자기자리에서 끝까지 앉아 밥도 먹고 식사중에 기침이나 재채기가 나오면 손으로 입도 가릴 줄 아는 멋쟁이가 되었지요. 처음엔 영빈이의 장에 탈이 난 것으로 오해했을 정도로 심각했던 묽은 변이 이젠 단단하고 건강한 대장님 응가(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난뒤 영빈이의 건강한 변을 보고 제가 이렇게 불러주면 영빈이도 자랑스러워하며 좋아하지요.)가 되었어요.


영빈아빠가 걱정할까봐 이야기를 못했었는데 처음 영빈이를 만났을 때 영빈이가 나이에 비해 말도 느리고 언어 표현이 부족해 적잖이 걱정을 했었지요. 그런데 형들과 어울려 몇 달 지낸 후로 어찌나 쫑알거리며 말도 잘하고 하루가 다르게 어휘력이 풍부해 지던지 깜짝 놀랄 정도였지요.


아마도 그전에 영빈이가 있던 곳에서 함께 지냈던 어린 아기들과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던 영향으로 생각되네요. 지난 겨울, 영빈이가 석달만에 영빈아빠를 만났을 때 상점에 진열된 물건들을 가리키며 이름을 말하자 무척 대견해하며 기뻐하던 영빈아빠 모습이 떠오르네요. 진열된 슬리퍼를 보고 영빈이가 “엄마, 스리퍼 있쩌.”라고 말하자 “영빈이가 슬리퍼도 말할 줄 알아?.”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영빈아빠의 모습은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자식 키우는 기쁨 바로 그것이었지요.


하루가 다르게 커나가는 영빈이의 모습을 곁에서 볼 수 없는 영빈아빠의 안타까운 상황을 생각하며 제 마음이 아파왔지요.


영빈아빠. 옛 어른들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부모의 한결같은 자식사랑을 비유하지만 저는 엄마로서 부족함 때문인지, 세 손가락도 깨물면 아픔이 조금씩 다르더라구요. 저의 친자식 세명에게도 자로 잰 듯 사랑을 똑같이 나눌 수 없는 제가 영빈이를 데려와 키우기로 결심한 것은 제가 가진 사랑을 나눠준다는 마음뿐이었지요. 세 아이들에게 나누던 것을 네명에게 나눠 준다는 마음이었지요.



영빈아빠가 궁금해하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어요.

저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영빈아빠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영빈아빠. 제가 위탁을 결정할 때 가장 망설였던 점이 정들여 키우던 아이를 다시 돌려보내는 문제였어요. 하루하루 저희 가정에 적응해나가는 영빈이를 보며 몇 년후 영빈이가 또다시 겪게될 아픔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일이었지요.


하지만 영빈이가 몇 달만에 만난 영빈아빠를 알아보고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비로소

천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지요. 진정 영빈이의 행복을 위해선 영빈아빠가 하루빨리 자리를 잡고 일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영빈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좋은 옷가지와 풍요로운 음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지난번 영빈아빠와 어린이대공원에 다녀온 후로 영빈이가 아빠에 대한 정체성을 찾게 된 것 같아요. 그전엔 영빈이에게 엄마인 저의 존재가 절대적 피난처였는데 저에게 야단을 맞거나 형들하고 다투고 나면 어김없이 아빠를 찾으며 울게 되었지요.


어제 저녁에도 TV만화를 보던 셋째 형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방해를 하다가 혼이 났나봐요. 얼마나 서럽게 울며 아빠를 찾는지, 예전에 영빈아빠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며 한참을 달래 주었어요.


영빈아빠, 그토록 사랑하는 영빈이와 함께 지낼 수 없는 영빈아빠의 힘든 상황을 제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저에게 한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아니, 꼭 약속해 주셔야해요. 보고싶은 아빠를 그리워하며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영빈이를 위해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일어서는 아빠가 된다구요. 그래서 영빈이를 어느 부모 못지않게 행복하게 해주시기로요.


자식은 부모의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키울 수 없는 일이니, 영빈아빠 자신의 건강에도 소홀함 없이 돌보셔야 할거예요. 제가 아들 셋을 키워본 선배로서 드리는 충고인데요, 특히 남자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려면 부모의 상당한 체력이 필요하거든요. 먼 곳에서 힘든 일을 하시는 영빈아빠가 하루 세끼 식사 거르는 일없이 잘 챙겨 드시고 영빈이에게 건강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끝으로 영빈아빠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제가 영빈이를 키우면서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얻게 되었지요. 물론 개구장이 사내녀석 네 명을 키우다보니, 힘들고 지칠 때도 있지만 사랑스런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에서 그 이상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되지요.


또 이 각박한 세상에도 따스한 마음을 지닌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영빈이에게 멋진 옷과 장난감을 물려주는 이웃집 엄마, 제게 위로와 힘이 되어주는 따뜻한 이웃들, 미용실 방침에 넷째 아들 이발비는 받지 않는다며 한사코 이발비를 사양하는 맘씨좋은 미용실 원장님, 친부모와 함께 살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밤낮으로 애쓰시는 한국수양부모협회의 사회복지사님들, 그리고 영빈이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돌봐주는 세 아들 태홍, 수홍, 범준이, 마지막으로 저의 가장 큰 후원자이며 영빈이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며칠전 비가 내리더니 완연한 초겨울 날씨가 되어버렸네요. 이제 곧 영빈이의 생일이 돌아오네요. 영빈이가 아빠를 보고 싶어할 때마다 지난해 영빈아빠가 생일선물로 준 팔찌를 영빈이 팔목에 끼워주곤 한답니다. 올해도 영빈이가 아빠의 선물을 잔뜩 기대하고 있어요. 영빈이가 받고 싶은 선물을 미리 알아보고 살짝 알려 드릴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쌀쌀해진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영빈이와 함께 만나는 그날까지 안녕히 계세요.


영빈엄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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